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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전쟁 ‘고아’였던 팔순 노인의 ‘첫 미소’

  • 입력 2020.07.02 10:40
  • 수정 2021.06.30 09:10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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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설가 양영제. 지난달 25일 ‘한국전쟁기(이야포, 두룩여, 여자만) 미군폭격 민간인 학살 명예회복 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남자는 집으로 가는 다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안개가 짙었으나 다리 난간에 한 여자가 강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는 직감은 하였지만 여자를 스쳐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강가에는 여자 시신이 발견되었다.

남자는 친구에게 자신의 방관으로 여자가 죽게 되었다고 괴로워한다. 친구는 남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지만 남자는 방관된 죽음의 기억이 평생 각인되어 자신을 괴롭힐 것이라고 말한다.”

까뮈의 소설 ‘전락’에서 나오는 한 장면이다.

흔히 지울 수 없는 기억을 각인되었다고 한다. 오십 년 이전 각인된 앨범이 있다. 내가 보낸 유년시절의 한 장면.

거지형제가 다투자 동네사람들이 몰려든 그곳은 종고산 밑 공화동 '동산동 성당' 밑이며 그 당시에 귀퉁이에 ‘미락제과’라는 빵집이 있었다.

나는 몰려든 어른들 다리 사이를 비집고 내 머리통을 집어넣었다. 거지 두 명이 다투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안쓰러워했다. 거지 두 명은 형제였으며, 미군깡통에 동냥해서 얻어온 밥 때문에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성(형)이 먹으랑께 나는 배 안 고프당께.”
“니 안 묵으면 때려분다잉 빨리 묵어라!”

오십 년이 넘은 지금도 눈을 감고 고향 여수를 생각하면 거지형제가 다투던 소리가 들려온다.

여수에는 유독 거지가 많았다.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이 많았다. 그래도 여수가 정이 많고 먹을 것이 많아서 거지에게는 살 만 한 곳이었다. 적어도 여수사람들은 거지라고해서 업신여기지 않았던 곳이다.

심지어 거지가 집에 와서 동냥을 얻으려하며 밥상까지 차려주곤 했던 곳이다. 1948년 여순항쟁 당시 악귀 이승만 진압군에 의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자료. 미군 구호과 피난민 모습.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인터넷 포털)

고아들 대부분은 구두닦이, 아이스께기(요즘 아이스 바)장사. 넝마(폐 휴지 줍기) 등으로 잔인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오로지 부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노래가 구전된다.

“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
내 죄 아닌 내 죄로 얽매여
들풀처럼 버려진 이 한 목숨 가시밭길 헤치며 살았다.
상처뿐인 내 청춘 피 눈물장마
아 누구에 잘못입니까?”

이 땅을 식민지, 신식민지로 지배한 제국주의자들 때문이다. 그들에게 빌붙어 일제의 황견(黃犬)이 되고, 미국 백구(白駒)가 되어 권력을 잡고 자국민을 탄압한 반민족 세력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잘살며 국립현충원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팔순이 된 전쟁고아를 여수에서 만났다. 오십년 전 내가 어릴 적 여수에서 봤던 그런 거지생활을 부산에서 똑같이 했던 노인이다. 노인 역시 거지에서 구두닦이로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노인에게는 밥을 동냥하여 먹어야 했고 학교를 보내야 할 동생이 있었다. 그래서 부모 대신 신문팔이 트럭 조수생활을 하면서 동생을 키우며 살아내었다. 나는 노인에게 미군 군화를 닦는 구두닦이 사진 등을 보여주었다.

필자가 어르신에게 보여준 사진 

“어르신 이렇게 살았습니까.”

내가 묻자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본디 거지가 아니었고, 구두닦이를 해야 할 어려운 집안도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이북에서 땅을 가지고 있었고 모친이 기독교 신자였다.

삼팔선이 그어지고 이북에서 토지개혁이 시작되자 이남으로 넘어와 서울에서 자리 잡았다. 엄마 아버지 오 형제 일곱 식구 중 장남으로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초등학교 운동장에 수용되었다. 미군은 학교운동장을 병참기지로 삼고자 피난민들은 내보내라고 한국정부에 명령을 내린다.

2018년에 이야포 사건 당일인 8월 3일 이야포 현장에 헌화하는 이춘혁 어르신

미군 명령에 따라 부산시는 피난민들을 배에 태워 섬으로 이동시킨다. 피난선이 거문도를 향해 항해하고 있던 중 여수 안도 앞 바다를 지나가게 된다. 안도를 지키고 있던 경찰은 피난선을 검문하기 위해 이야포에 강제로 정박시킨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미군 전폭기가 날아와 피난선을 폭격한다. 이것이 1950년8월 3일 아침에 일어난 미군의 이야포 학살사건이다.

한 순간에 미군폭격기에 의해 부모형제를 잃고 살아남은 전쟁고아 형제가 부산으로 다시 돌아가서 거지생활 하면서 목숨을 부지한 까닭이다.

나는 노인의 일대기를 담기로 했다. 한 개인의 비극적 삶을 담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 패권싸움에 의한 이 나라의 근현대사 비극이 고스란히 노인에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2019년 이야포 현장에는 당시 상황을 적어놓은 표지판이 설치됐다. 그 앞의 이춘혁씨.

내가 노인이 이야포 학살의 마지막 생존자인 것을 알고 이야기를 담기 시작한 것이 삼년 전이다. 처음 전화로 이야기를 담을 때 노인은 울먹거리며 자신이 겪었던 미군에 의한 학살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나는 분노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받아 적을 수 없었다. 작년 8월3일 지역신문사 여수넷통이 주최한 이야포 학살 위령제에서 노인을 다시 만났다. 노인은 내 인사를 받기도 전에 안내판이 어디 세워져 있는지 묻고선 허우적거리며 날 따라왔다.

어마어마한 학살사건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조그만 안내판 문구를 한 글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던 노인을 일전에 다시 여수에서 만났다. 박성미 시의원이 마련 해 준 숙소에 들어가 노인의 피눈물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6월25일 여수시 의회 간담회에서 노인을 또다시 만났다. 사적으로 묻혀버릴 수 있었던 노인의 비극적 삶이 공적 역사의 장으로 처음 들어오는 장소였다. 칠십 년이 걸렸다.

지난달 25일 이야포 토론회 후 방청 학생으로뷰터 꽃다바를 받는 이춘혁씨

여수시 시의회 증언 자리에서 이야포 학살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은 이렇게 말 했다.

“보상보다도 이야포에 조그만 위령탑 하나 세워 주이소. 부탁합니다.”

나는 어르신과 다시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김창주 회장이 마련해준 숙소 '비고리조트'에서 밤새 또 그 분의 얘길 들었다.

잘못된 국가 역사가 국민에게 어떤 삶을 살게 했는지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기때문이다. 이 땅에 군부독재정권과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때문에 학살의 책임을 묻지 못하고 살아온 전쟁고아 삶이다. 이 땅에서 근현대사를 살아낸 민중의 삶이기도 하다.

웃음소리인가? 나는 어르신 삶을 적어가다 내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들어 어르신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어르신은 정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분명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그 순간 나는 치유가 시작되고 있음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야포 학살에 대해 다시금 조사가 있어야 한다며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 인터뷰가 방송된 날 깊은 밤이었다.

토론회 후 참가자 기념촬영 모습. 이춘혁씨가 가운데 노란 모자 쓰고 선물 받은 장미 한송이를 들고 있다.

거지,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깨끼 장사 그리고 미군부대 트럭 조수로 살아가다 그나마 당신이 잘 생겼기 때문에 결혼할 수 있었다는 농담을 하시면서 첫 미소를 내게 지어보여 주었다. 그동안 피눈물 섞인 울먹거림만 받아 적다가 처음으로 받아 적은 농담이었다.

이게 후대가 해야 할 일이다. 후대는 선대가 있었기에 현재 이나마 민주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후대는 또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잘못된 역사를 바로 전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야포 학살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 같은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게 어르신의 깊은 바램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 해 7월 26 일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패권을 빼앗기기 않으려는 미군은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남하하는 피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그리고 며칠 지난 8월 3일 또다시 여수 안도 이야포에서 또다시 피난선을 폭격 학살하였다.

여수시 남면 안도 이야포 전경

자국민이 학살당했어도 잔인한 국가는 부인했고 대중은 외면했다. 노근리 학살이 밝혀지고 평화공원이 세워졌듯이, 이제 이야포에도 평화공원이 세워져야 한다. 절대반공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된 기억증후군(repressed memory syndrome)을 치료하는 것은 ‘용기’다.

용기없는 수동적 '방관자' 여수에서 이제는 당당히 여순항쟁과 이야포 학살에 대해 '담지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게 여수에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여수가 되는 것이다.

여수 중앙동에 여순항쟁, 안도 이야포에 미군기에 의한 학살 위령탑과 평화공원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여수시 행정기관이 비겁하게 역사와 마주하기를 주저하면 지역 언론이 시민운동을 펼쳐 모금을 해서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때서야 이야포 학살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여수의 미소이며 자랑이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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