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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의 '투표지 박스' 임의 개함, 괜찮을까요?

선관위의 임의 개함으로 선거 소송 무색해져

  • 입력 2020.08.01 19:12
  • 기자명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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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5 총선 당시 여수의 관외 사전투표함
▲  4.15 총선 당시 여수의 관외 사전투표함
ⓒ 정병진


 



청양군선관위가 뚜렷한 법령 근거 없이 4.15 총선 투표지 보관 박스를 '임의 개함'한 사실이 드러나 파장이 일 전망이다. 선관위가 보관 중인 봉인 투표지 박스를 임의 개함한 건 지난 십 년 사이 알려진 사례만 이번까지 세 차례여서 재발 방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청양군선관위는 시흥의 한 고물상에서 발견된 4.15 총선 사전 투표지 유출 경위를 확인하고자 지난 21일 보관 중인 관외 사전투표지 박스를 열어 실물 투표지 1778매를 확인했다.

그리하여 관외 사전 투표지 중 유효표(1751매) 중에서 문제의 훼손된 투표지와 일련번호가 동일한 실물 투표지를 찾아내 중앙선관위를 통해 해명 자료를 발표하였다.

이 자료에서 중앙선관위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2020. 7. 21.(화) 청양군선관위는 정당추천위원 참관 하에 관외사전투표지 확인결과 투표용지교부수와 투표수가 일치(1,778매)하였고, 유효표(1,751매)에서 언론 기사의 일련번호와 동일한 관외사전투표지 실물을 확인하였습니다."

지난 4일 경기도 시흥의 한 고물상에서는 반으로 찢어진 4.15 총선 사전 투표용지가 발견됐다. 이 투표지는 한 시민단체가 중앙선관위에서 나온 트럭을 따라가 폐지 더미에서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선관위의 해명 자료를 보면, 유출 경위 파악을 위해 청양군선관위가 '정당추천위원 참관 하에' 보관 중이던 관외 사전투표지 박스를 개함하였다. 그래서 전체 실물 투표지의 일련번호를 낱낱이 확인해 훼손 투표용지와 동일한 투표지를 찾아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선관위는 투표지의 청인, 관리관 도장, 일련번호 등을 두루 확인한 결과 문제의 훼손된 투표지는 "코로나19 확진자를 위해 설치된 특별사전투표소(경북 경주시 양남면제2사전투표소, 현대차 경주 연수원)에서 인쇄 중 훼손된 청양군선관위의 관외 사전투표용지"임을 확인하였다고 말한다.

이어 "사전투표가 끝난 뒤 선거관계 서류를 경주시선관위에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훼손된 투표용지 등 투입봉투'가 누락돼 다른 물품과 함께 폐기되는 일이 빚어졌다"는 사실도 파악해 '관리 실수'의 '책임을 통감하며 송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앙선관위의 해명과 사과로 이 문제가 봉합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고물상에서 발견된 투표용지의 유출 경위는 파악돼 다행이다. 하지만 그 확인 과정에서 청양군선관위는 '위원장의 결재'만으로 관외 사전투표지 보관 박스를 뚜렷한 법적 근거 없이 임의 개함하였다. '정당 추천위원 참관 하에' 봉인을 해제하고 투표지를 확인했으니 괜찮은 게 아니다.

선거법에 의하면 모든 투표지는 개표 종료 이후 투표지를 박스에 넣어 위원장 도장을 찍고 봉인해 당선인의 임기 중까지 보관하게 돼 있다(법 제186조). 일단 봉인이 된 상태의 투표지 박스는 구·시·군 위원회 위원장의 직권으로 임의 개함할 수 없다.

이 같은 '재검표' 행위는 선거 소청과 소송(당선무효소송, 선거무효소송)으로 법원 명령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돼 있다. 그러기에 선거 후보자나 선거인이 선거 결과에 의구심이 있거나 불복하는 경우 법원에 절차를 밟아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양군선관위는 법원의 '재검표' 결정이 난 게 아닌데도 위원장의 결재만으로 투표지 보관 박스의 봉인을 해제하였다. 그런 뒤 관외 사전투표지 전량을 확인함으로써 사실상 재검표 행위를 하였다.

이에 대해 중앙선관위 공보과의 한 주무관은 2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제도 개선과 지침 보완이 필요한 사항 같다"고 하였다. 31일 또 다른 주무관은 "의혹제기가 있어서 위원장 내부 결재로 개함한 것"이라며 "해명 자료 이외에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청양군선관위 관계자는 "중앙선관위와 충남도선관위까지 함께 논의해서 개함을 진행한 것"이라며, "공식 해명과 답변은 중앙선관위 공보과를 통해 들으라"는 말만을 되풀이 하였다.
  

 2020년 4.15 총선 여수 개표장
▲  2020년 4.15 총선 여수 개표장
ⓒ 정병진


 


한편 전남 여수시선관위는 2013년 3월, "18대 대선 개표 결과 한 투표구에서 투표용지 교부수보다 1매가 더 나온 명확한 이유를 밝혀 달라" 취지의 정보공개 청구를 받았다. 그러자 "위원장 사인으로 봉인되어 보관 중이던 해당 투표구 투표지와 잔여투표용지를 위원장 결재로 개봉해 직원이 민원내용을 확인한 뒤 다시 봉인하여 보관"하였다. 그런 뒤 그 법적 근거를 공직선거법이 아닌 민원사무처리 규정의 정의(제2조)와 처리결과의 통지(제14조)을 들었다.

2016년 제20대 총선(4.13) 당시에는 경남 진주의 한 투표구 관내 사전투표 결과가 새누리당 몰표로 나왔다. 이에 한 지역 언론이 해당 지역 선거인 중 다른 당에 투표한 사람 몇 사람을 찾아내 보도하자 큰 파문이 일었다.

이에 진주선관위는 "위원회결정으로 정당 및 언론관계자 참관 아래 비례대표 관내 사전투표지 봉인을 해제해" 해당 투표구의 투표지에 대한 '재검표'를 실시하였다. 당시 선관위는 그 법적 근거를 '투표함의 개함 규정'(공직선거법 177조 제1항)을 들었다. 하지만 이는 '개표' 개시 이후 절차에 따른 '개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개표가 종료돼 투표지 봉인이 끝난 이후 이루어지는 '재검표'의 '개함'을 뜻하는 건 아니다.

외려 공직선거법은 '투표함 등에 관한 죄'(제243조 제1항)에서 "법령에 의하지 아니하고 투표함을 열거나 투표함(빈 투표함을 포함한다)이나 투표함 안의 투표지를 취거·파괴·훼손·은닉 또는 탈취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투표함을 임의 개함하지 못하게 한다. 개표완료 이후 '선거쟁송'에 따른 증거조사는 증거보전 절차를 거쳐 법원이 하게 돼 있다(법 제228조 증거조사).

선관위는 봉인 투표지 박스의 해제가 법원의 결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매번 선거 이후 일각에서 부정선거 의혹이 일고 선거무효 소송이 제기되지만 자체 결정으로 투표지 보관 박스를 열어 확인하지 않고 법원 결정을 기다린다. 이는 소송을 제기하는 후보자나 선거인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청양군선관위는 단지 찢어진 투표지 한 장이 고물상에서 발견돼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다는 이유로 위원장 결재를 거쳐 투표지 보관박스를 임의 개함하였다. 이는 선관위가 필요하다면 위원회 결정만으로 보관 중인 투표지 박스를 필요하다면 언제든 열어 볼 수 있다는 오해를 낳기 충분하다.

이처럼 선관위 내부 결정만으로 투표지 보관 박스의 개함이 가능하다면 굳이 법원에 소송까지 해서 선거 결과를 다툴 이유조차 없어진다.

따라서 이번 청양군선관위의 관외 사전투표지 보관 박스 개함은 훼손된 투표지 한 장 유출 경위에 대한 해명에 도움은 되었을지 모르나, "선관위가 선거법을 수호하기보다는 스스로 무너뜨림으로써 소탐대실"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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