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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 류형과 증손자 류성채...대를 이은 ‘여수사랑’

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③

  • 입력 2019.02.22 11:01
  • 수정 2021.11.18 14:42
  • 기자명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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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첩비 상단이 비각 서까래에 곧 닿을 것 같다.   ⓒ 오병종

임란 7년전쟁 막바지에 수군 장수 중 이순신의 분신으로 불러도 손색없는 류형(柳珩)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노량전투에서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받고 바로 수군지휘권을 넘겨받은 장수였다.

여수 고소대 충무공비각에 들어서면 지붕을 뚫을 듯이 서까래에 닿을 정도로 비각을 가득 채우고 서있는 초대형 ‘통제이공수군대첩비’가 있는데 바로 류형이 그 비의 원석을 황해도에서 구한 사람이기도 하다. 류형이 돌을 구했기에 대첩비가 건립될 수 있었다.

류형은 해남현감으로 전라좌수영에 파견돼 충무공의 막료로서 전장에서 활약하며 충무공과 함께 적과 싸운 장수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노량해전 전투광경이 대첩비 옆 작은 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충무공은 총 한 발에 목숨을 잃었으나, 류형은 6발을 맞고도 살았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마지막 전사 장면

장수 류형은 부상한 몸으로 전사한 충무공 뒤를 이어 현장 지휘를 맡았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은 류형은 해남현감에서 전라우수사로 승진했고, 승승장구 다시 통제사로 이순신 후임이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선조 34년 11월 9일)에는 그의 통제사로 발령받은 사실이 적혀있다.

“한준겸(韓浚謙)을 병조 참판으로... 김현성(金玄成)을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류형(柳珩)을 경상우도 수사 겸 통제사(慶尙右道水使兼統制使)로 삼았다”

선조 34년이면 1601년 충무공 사후 이시언이 통제사로 여수를 거쳐갔고 후임 통제사로 부임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충무공을 기리려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비를 세울 계획도 그가 세웠다.

류형이 경상우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로 근무할 때 이웃 순천부사 이수광과 합심해 임난 전후 복구에 두 사람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후 복구가 시급한 터라 여유가 없는 조정에서는 순직 3년째인 1601년에 곧장 충민사(최초 이순신 사액사당)는 세웠지만 비 건립은 여러 차례 탄원에도 여의치가 못했다.

지봉 이수광은 이충무공 만장에 "짐승들도 그 이름에 놀라고, 공로는 천하에 크게 들렸네. 왜적을 모두 달아래 내쫒고, 장수별은 새벽바다에 떨어졌네"라고 슬퍼하지 않았던가. (김종대 저 <이순신,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에서)

그런 이수광의 조력이 있었음에도 여수에서 비 세우는 일을 계획에만 그치고, 결국 류형은 황해도(해서절도사)로 발령받아  통제사 직을 떠난다.

동령소갈과 대첩비.  앞의 동령소갈(작은비석)에는  대첩비 세운 내력을  별도로 적은 비석이다. 대첩비 세운지 78년 후에 곁에 세웠다.

대첩비 옆 작은 비에는 황해도에서 돌을 구했다는 류형의 공적이 적혀있다. 

“류형 공은 전출되어 황해도 절도사로 가게 되었다. 몸은 비록 타도에 있으나 마음은 이 역사(役事)를 잊지 못하다가 강음(황해도)에서 돌을 구하였다. 해변에 버려져 있은 지 몇 년이 지나게 되었다”

지금의 대첩비가 될 초대형 고급돌을 여수로 보내려고 한강 하구 바닷가까지 옮겨 놓고는 후속 작업에서 막히고 만다. 하지만 류형은 임종의 순간에도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이야(충무공)의 비석이 세워지지 않으면 내 묘 앞에도 비를 세우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류형공이 죽은 이후에 그가 구해 둔 돌이 기반이 돼서 대첩비건립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대첩비 왼편 ‘동령소갈’이라고 불리는 대첩비의 부속비는 대첩비 건립내력을 새긴 비석으로 이 비 역시 류형과 관련있는 인물이 건립했다. 

류형의 증손자 류성채는 두 세대 건너 절도사(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로 부임받아 여수에 오게 된다. 대첩비와 동령소갈비의 건립연도 차이 만큼의 시차를 둔 대를 이어 증조부와 똑같이 여수로 부임해 온 것이다.

‘동령현의 둥글고 작은 비석’(東嶺小碣:동령소갈)은 증손자가 증조부의 업적을 포함해 대첩비 건립 경위와 비각을 세워 보존한 내력들을 적었다. 대첩비가 세워진지 78년 후 1698년 일이다.

결국 대첩비는 증조할아버지의 돌, 그 옆 ‘동령소갈’ 작은 비는 증손자 돌인 셈이다. 류형과 증손자 류성채. 두 분 후임 통제사들은 대를 이어 선임 통제사 충무공 추모에 정성을 다했다.

전후 복구사업에 진력한 증조부 류형은 여유가 좀 없었다면, 증손자 류성채는 두 세대를 지나  차분하게 전라좌수영의 기틀을 다지고 여유있는 리더쉽을 보여준다.

그러한 흔적이 여수시 남면 횡간도 너른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절도사 류성채는 그 바위에 전라좌수영 관하의 관원들이 활을 쏘며 놀이를 즐기고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각석문'을 남긴다.

여수시 남면 횡간도 바위에 새긴 돌. 류성채의 흔적이 있다.  사진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節度使柳星彩.軍官折衝廉奇鐸安海宇.順天府使朴斗世.防踏僉使李以峻.戊寅五月朔日 절도사류성채.군관절충염기탁안해우.순천부사박두세.방답첨사이이준.무인오월삭일”

각석문은 절도사 류성채가 좌수영 장수들인 연기탁, 안해우, 순천부사 박두세, 방답첨사 이이준과 함께 이곳에 와서 활을 쏘고 연습한 흔적인 것이다.

‘향토문화전자대전’의 횡간도 향토사 분야 책임 집필자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연구이사는 위 각석문은 안정적인 사회분위기가 반영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횡간도는 전라좌수영 수군 궁수루(弓手樓)와 놀이청이 있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해군하계휴양소쯤 역할로 여겨진다. 좌수영 관하의 장수와 관원들이 활을 쏘고 연습하며 다소 즐기면서 지냈기 때문에 상당히 안정적인 당시 사회분위기를 말해주고 있다”

접근이 용이하게 사람 키높이 정도의 '소갈'비를 대첩비 곁에 류성채가 대첩비 건립내력을 적어 78년 후에 세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류성채는 초대형 비를 가까이 접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보고 접근이 용이한 키 높이의 ‘소갈(작은비)’을 세워서 거기에 비가 세워진 내력을 상세히 적었던 것이다.

현재 각종 자료에 대첩비 건립이 1620년 외에도 1615년이라고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대첩비에 새겨진 만력 43년을 건립 기준으로 본 탓이다. 그런데 작은 비에는 구체적으로 경신년 정월에 건립했다고 기록돼 있어 1620년이 건립연도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대첩비에 새겨진 만력 43년(1615년)은 백사 이항복이 비문을 지은 해이고 비 건립은 경신년(1620년)인 것이다.

작은 비에는 대첩비를 경신(庚申)년 정월(元月)에 세웠다(立)고 표기가 돼 있다. 경신년에 세우고 타루비도 옮겼다고 적었다.

대첩비 오른편의 ‘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인 선조 36년 1603년에 이충무공 부하 장졸들이 세운 ‘눈물비’다. 타루비는 대첩비와는 별도의 비다. 하지만 왼쪽의 ‘동령소갈’은 대첩비의 부속비여서 대첩비와 한묶음이나 마찬가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동령소갈(비)은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건립 경위와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 그리고 건립하기까지의 어려움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후세에 충무공 이순신을 숭모하는 정신을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글은 남구만이 지었고 1698년(숙종 24)에 세웠다.

그런 류성채였기에 당대의 문장가 남구만도 증손자 류성채의 청을 흔쾌히 받아 비문을 撰(찬)해 주었으리라.

그런데 대를 이은 역사적 비석이 일제 강점기 말 뿌리째 뽑히고 여수에서 사라지고 만다.

지금은 고소대에 서 있지만 이 비석들의 원래 위치가 어디였는지를 말해주는 게 바로 ‘동령(東嶺)소갈’이라는 명칭이고 여수 고지도다.  ‘동령현에 세운 또다른 작은 비석’의 동령현은 지금의 충무동이다.

1847년 발간한 전라좌수영 지도에 나타난 충무공비각 위치. 지금의 충무동이다.

1847년에 발간된 「호좌수영지」에 실린 전라좌수영지도에는 지금의 충무동 성의 서문 바로 밖에 ‘충무공비각’이 다른 5~6개의 비각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지도의 충무공 비각과 대첩비가 일제강점기에 사라져 버린다.

가운데가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편집자 소개글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3.1운동의 근본정신은 ‘독립’과 ‘평화’입니다. 그리고 3.1운동의 근본정신을 일깨워줄 여수의 상징물로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떠올려 봅니다.

본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 충무공대첩비에 담긴 내용과 역사성을 살펴보고자 「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5회에 걸쳐 아래 순서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① 초대 여수군수 오횡묵의 회고 “한서린 파도소리” (2월 16일)
② 오성대감 이항복의 추모 “노량을 깊고 깊은데...” (2월 19일)
③ 통제사 유형과 증손자 류성채... 대를 이은 ‘여수사랑’ (2월 22일)
④ 일제강점기 말에 헐려버린 비각과 대첩비, 그리고 ‘복구’기성회 (2월 25일)
⑤ 현대에 되살려야 할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 정신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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