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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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 오병종
  • 승인 2019.02.1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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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초대 여수군수 오횡묵의 회고 “한서린 파도소리”
여수  고소대 충무공비각 안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 는 보물 제 571호다,  높이 305cm, 너비 124cm, 두께 24cm로 대첩비 문화재 중  최고 최대의 비석이다.
편집자 소개글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3.1운동의 근본정신은 ‘독립’과 ‘평화’입니다. 그리고 3.1운동의 근본정신을 일깨워줄 여수의 상징물로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떠올려 봅니다.

본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 충무공대첩비에 담긴 내용과 역사성을 살펴보고자 「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5회에 걸쳐 아래 순서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① 초대 여수군수 오횡묵의 회고 “한서린 파도소리” (2월 16일)
② 오성대감 이항복의 추모 “노량을 깊고 깊은데...” (2월 19일)
③ 통제사 유형과 증손자 유성채... 대를 이은 ‘여수사랑’ (2월 22일)
④ 일제강점기 말에 헐려버린 비각과 대첩비, 그리고 ‘복구’기성회 (2월 25일)
⑤ 현대에 되살려야 할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 정신 (2월 28일)

1947년에  여수 고소대에  옮겨 새로 조성한  현재의 충무공대첩비각.  일제 강점기때 충무동의 비각이 헐려  해방 후 일제 신사터였던 고소대에 다시 세웠다.  이런 내용은 안내가 되어있지  않고 있다.  

지난해 세밑에 여수군 초대 군수를 지낸 오횡묵(1834∼1906)의 시문집 「여수 잡영(雜詠)」을 번역한 『오횡묵의 ‘여수 잡영’, 120년 전 여수를 읊다』가 출간됐다. 전남대 명예교수인 김준옥 박사, 여수지역사회 연구소 김병호 이사장, 전남 문화재전문위원 김희태 박사. 세 분이 펴냈다.

이 책의 원전 ‘여수잡영’은 106편의 한문연작시 형태다. 여수의 문화 명소와 자연 경관, 산업 생활 현장 이곳저곳을 다양한 인문학적 서사로 풀어나간 귀중한 여수기록유산이다.

오횡묵 여수군수 재직기간은 1897년4월부터 1899년 6월까지였다. 오군수 재임 마지막을 기준으로 보면, 딱 120년 전이다. 흔히 한문으로 적힌 우리 기록 유산들의 기록년도를 요즘처럼 ‘2019년’식으로 표기하지 않고 ‘기해년’으로 표기한다. 그래서 한 갑자씩 돌기 십상인데, 1899년 이임하던 해가 ‘기해년’이었으니 올해가 오횡묵 군수의 재임을 마친지 2주갑이 되는 해이다.

‘주갑’이라는 60년 단위는 당해연도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긴요하게 쓰인다. 예컨대 작년 2018년도는 무술년이었으니 1598년 무술년 이순신 장군 서거 기준으로는 7주갑이었고, 올해 기해년은 전라좌수영 설치년도 1479년이 기해년이었으니 전라좌수영 설치 9주갑 되는 해이다.

지난해 12월 14일 발간한 『오횡묵의 ‘여수 잡영’, 120년 전 여수를 읊다』

그래서 『120년전 여수를 읊다』저자들은 “「여수잡영」은 여수군 창설 무렵의 자료이지만, 기본적으로 전라좌수영의 역사성 및 공간과 함께한다”고 밝히고, 해당 번역서가 “현대인들에게 120년 전의 여수는 물론 540년을 거슬러 전라좌수영의 역사적 공간을 사실적으로, 감성적으로 이해하는 교재”이기를 바란다고 책머리에 적었다. 당시 돌산은 여수군이 아닌 돌산군이어서 ‘여수잡영’ 대상이 아니다.

106곳 중 눈에 띄는 곳이 ‘충무공비각’이다. 오군수는 비각을 찾아보고는 “(이충무공)이름은 역사에 기록돼 있으되, 장군의 못다한 한이 파도되어 출렁이네”하며 소회를 읊었다.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어 드리워지고
공덕은 백성들의 흘린 눈물에 있네
나라위해 바친 목숨 끝없는 의지여라
장군의 못다한 한, 파도되어 출렁이네

名垂邦籙紀功過 (명수방록기공과)
德在民心墮淚多 (덕재민심타루다)
報國殞身無限意 (보국운신무한의)
惟公遺恨海天波 (유공유한해천파)

영인본 '여수잡영' 중에서  표시된 부분이 '충무공비각' 원문

오횡묵은 여수 106곳을 둘러보고 한결같이 7언4절 한시로 적었는데, 무엇을 노래했는지 그 위치는 어디인지를 말미에 꼭 주석으로 달았다.

위의 시에서도 말미에 “충무공비각은 서문밖에 있고 곁에 타루비도 있다”(忠武公碑閣. 在西門外又有墮淚碑 : 충무공비각. 재서문우유타루비)는 식으로 106편 모두 주석을 달았다.

비각엔 언제나 대첩비와 쌍으로 딸린 ‘타루비’가 있었으니, ‘(충무공의) 공덕은 백성들의 흘린눈물에 있네’라고 노래하며 바로 옆 ‘타루비’도 같이 언급하고 넘어갔다.

국가에서 1973년 문화재를 지정할 때 대첩비와 타루비를 묶어서 보물 제 571호로 지정했다. 같은 비각 안에 쌍으로 존재해서 편리하게 지정한 셈이다.

비각 안에는 중앙의 대첩비 좌우에 '동령소갈비'와 '타루비'가 안치돼 있다.

비의 내용과 건립연도가 전혀 다른 두 점이 동일 문화재로 지정된 모순을 지적하며 그간 여수문화원과 여수시가 꾸준히 정부에 분리 지정을 요구해 왔었다. 지난 1998년도에 타당하다고 받아들여 타루비는 대첩비와 같은 보물이지만 제 1288호로 분리지정된다.

타루비는 눈물을 흘리며(墮淚타루) 장군을 기렸다는 '눈물비석'이다. 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인 선조 36년 1603년에 이충무공을 기리는 비석 중에 맨먼저 세워졌다.

타루비 비문에는 왜 눈물비석인지를 밝혔다.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공순신을 위하여 짧은 비를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라고 한다. 대개 중국 진나라의 양양(襄陽) 사람들은 양호를 생각하며 그 비를 바라보면서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를 취한 것이다”

1847년 발간한 <호좌수영지>의  '전라좌수영 지도' 에 나타난 충무공비각의 당시 위치

비각을 세우면서 당시 좌수영성 서문밖 동령현(지금의 충무동 216번지 부근) 비각은 늘 두비석이 함께 안치되었다. 동령현에 세워졌던 이충무공수군대첩비와 이공의 덕을 기리는 타루비는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여수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한다.

오 군수가 노래한 비각은 1942년 당시 일본인 여수경찰서장에 의해 헐린다. 비각안의 기념비도 반출당하고 만다.  322년간 전라좌수영과 여수를 지켜온 대첩비를 여수에서 없애버린 것이다.

오횡묵 군수는 이미 120년 전에 그러한 운명을 알기라도 했단 말인가? 오횡묵의 애절한 노래 아직도 귓전에 머문다.

“역사에 기록된 이름이여! 
아직도 흐르는 백성들의 눈물, 장군의 못다한 한, 
오늘도 파도되어 출렁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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