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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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②
  • 오병종
  • 승인 2019.02.1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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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 이항복의 추모 “노량을 깊고 깊은데...”
대첩비는 높이 305cm, 너비 124cm, 두께 24cm다.  초대형 원석은 황해도에서 옮겨온 것이다.

400여년전 황해도에서 옮겨온 돌로 만든  '대첩비'  

여수에 세워진 충무공대첩비는 높이 305cm, 너비 124cm, 두께 24cm다. 국내 문화재비석으로는 최고 최대 크기다.

비문의 글은 당시 영의정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이 지었다.

고소대 현장 안내판에도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좌수영대첩비로도 부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수군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비석으로, 국내 비석 중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하다”라고 소개한다.

초대형 비의 원석은 황해도에서 가져왔다.

큰 돌이 황해도에서 옮겨온 과정이라든가 대첩비가 세워지게 된 내력은 나중에 부속비석인 ‘동령소갈비’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현재 대첩비 왼쪽의 비석이 건립 내력을 적은 기실비 성격의 ‘동령소갈비’다. 동령소갈비(東嶺小碣碑)의 의미는 동령현(지금의 충무동)에 세운 작고(小)둥근(碣)비석(碑)이란 뜻이다. 안내해주는 기실비로서 대첩비에 부속된 비석인 셈이다. 두개는 한 묶음이다.

중앙 대첩비 왼쪽은 대첩비 건립 내력을 새긴 부속비(동령소갈비) 이고  오른쪽은 '타루비'다

이 동령소갈비에는 이순신 후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유형공이  해서관찰사로 발령나서 근무하다 거기서 돌을 구했다는 내용을 전한다.

“(유형은) 힘과 생각을 간절히 한 끝에 강음현(江陰縣; 황해도 金川郡의 일부)에서 쓸만한 돌을 얻어서 바다를 통해 한강어구까지 운반하여 온 다음, 조정(朝廷)에 이곳으로 옮겨 줄 것을 청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바닷가에 내버려 둔 지가 몇 해가 되었다.” 
(‘동령소갈비’ 비문 중에서. 번역은 한국고전번역DB)

범국민적 관심과 지원으로 건립되다

황해도에서 여수로 돌의 운송과 이후 작업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전국의 유명 석공들을 여수로 모아야 했고, 공사에 참여할 인부나 비용도 필요했다.

여수는 물론이고 인근 고을 지도자들과 퇴직 관료, 변방의 장수들까지 비용을 댔다. 너나없이 좌수영 영민들도 울력으로 돕고, 작업 인부 식량을 조달해주면서 조각하고 새기는 기념비작업을 반년간 마쳤다.

요즘으로 친다면 ‘충무공대첩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돼 활동한 셈이다.

비문에는 비를 세울 때 많은 명사들이 나섰고 현직은 물론 퇴직관료나 부호들의 기부도 이뤄지기도 했으니, 건립성금이 갹출되고 자원봉사자가 모집되었다는 얘기다.

고소대 비각안에는 대첩비를 중심으로 왼쪽에 동령소갈비가 오른쪽에는 ‘타루비’가 있는데 각각 건립연대가 다르다.

타루비는 받침석 포함해 보통 사람 키 높이 정도 크기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5년 후 1603년에 막하에 있던 수군 병사들이 세웠다.  보물 제 1288호다.

타루비는 충무공 이순신의 순국한지 5년 후 1603년에 막하에 있던 수군 병사들이 세웠다.

대첩비는 1620년에 세워졌다. 대첩비 건립내력을 적은 기실비인 동령소갈비는 1698년에 세웠다.

동령소갈비를 세우면서 타루비도 대첩비 옆으로 옮겼다.  대첩비 원래 세운 동령현은 충무동인데 거기서 비석이 일제 강점기때 사라진다. 비각도 헐리고...  

1931년 동아일보 기사 사진에 나타난 종고산 자락 충무동의 충무공비각 모습.   당시 신문 캡쳐
여수시문화원 DB <사진으로본 여수발전사> 위 사진과 거의비슷하다. 자료집에는 몇년도 사진인지 표기가 되지 않았다.  사진제공 여수시문화원.
여수시문화원 DB <사진으로본 여수발전사> 1934년 비각이 없는 모습의 대첩비. 사진제공 여수시문화원

대첩비는 충무공 순직운명한지 22년만에 세워진 비석이다. 당시 누차 이공을 기려야 한다고 건의했어도 살림이 어려운 조정은 답을 못했다. 전쟁 직후 복구에도 신경써야 하는 탓도 작용했다. 조정의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순직후 22년이 걸렸다. 그때도 기록에는 전현직 관리와 인근 수령, 좌수영 변방 장수들이 도와서 건립했다고 비문은 가록한다.

“마침 충무공의 맏아들인 전현감(前縣監) 회(薈)가 와서 보고 서로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흘리며 즉석에서 막료(幕僚)인 전현감(前縣監) 임영(林英)과 전판관(前判官) 정원명(鄭元溟) 등에게 명하여 원근의 석공(石工)들을 불러 모으게 하고, 또 돌을 운반할 비용을 모으는데 호조참의(戶曹叅議) 이창정(李昌庭)공과 순천부백(順天府伯) 강복성(康復誠)공이 특히 많이 힘을 보탰다. 

이에 인근 읍(邑)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들이 혹은 물자를 보내어 도우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힘을 다하여 거의 반년 만에 끝내게 되어, 그 뛰어난 고금을 꿰뚫는 충성이 옥돌에 새겨져 만세(萬世)토록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
 ('동령속갈비‘ 비문 중에서. 번역은 한국고전번역DB)

비문작성도 당대 명사들이 ...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내용도 비석에

먼저 비문의 제목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 전액은 김상용의 글씨다. 비문 내용은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이 지었고, 글씨는 한석봉을 능가한다는 당대의 명필 김현성이 썼다. 돌에 새기는 일은 목공들의 몫이었다.

대첩비 탁본. 사진제공 여수시문화원
대첩비 내용은 이항복이 글을 짓고, 명필 김현성의 서체로 썼다. 이충무공과 수군들의 공적, 마지막 전사하는 순간도 기록돼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수군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수군대첩비인만큼 이공이 해전에서 거둔 전과와 명나라 진린제독과의 공동작전 등도 기록됐다. 마지막 전사하는 순간에 충무공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대사로 잘 알려진 대목도 비문에 새겨졌다.

“공이 새벽녘에 총탄에 맞아 쓰러졌으나, 오히려 여러 사람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우리 군사들이 기운이 꺾일까 두렵다’고 하였다”

‘통제사이공수군대첩비’ 비문에는 이공의 성품에 대한 찬탄도 이어진다.

“온화하고 대범한 덕과, 과단성있게 판단하는 재주와, 상과 형벌을 공평하게 집행하는 용기는 보통 사람이라면 족히 백세(百世)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겠지만, 공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하찮은 일일 것이니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이어서 백사 이항복은 이공이 최후를 마친 “노량의 물은 깊고 깊은데 여기에 이공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노라” 시(詩)로써 장문의 대첩비문 대미를 장식한다.

“지난 임진(壬辰)년에 미친 도적들이 역심을 품고 이웃 나라를 침범해 왔다네.
여러 고을들이 궤멸되고 수 많은 적들은 마치 무인지경을 밟듯이 하네.
이 때에 오직 이공만이 그 기세를 더욱 떨쳐 바닷가를 지키셨네.
천자가 무위(武威)를 떨쳐 많은 군대를 보내고 진린(陣璘)을 장군에 임명하셨네.

(중략)

노량(露梁)은 어슴푸레 흐릿하고 물은 오직 깊은데 여기에 비석을 세우노라.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고 공의 이름 우뚝하여 영원토록 으뜸가는 제사를 받으소서”
   (대첩비 비문중에서. 번역문은 한국고전번역DB)

1947년에 옮겨세운 충무공비각(대첩비각). 일제 강점기 신사터였던 고소대에 다시 세웠다.
편집자 소개글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3.1운동의 근본정신은 ‘독립’과 ‘평화’입니다. 그리고 3.1운동의 근본정신을 일깨워줄 여수의 상징물로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떠올려 봅니다.

본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5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합니다. 충무공대첩비에 담긴 내용과 역사성을 깊이 살펴보면서 100년을 맞은 3.1운동 근본정신을 새기고자고 합니다. 지난 16일 1편에 이어 이번 기사는 2편입니다.

① 초대 여수군수 오횡묵의 회고 “한서린 파도소리” (2월 16일)
② 오성대감 이항복의 추모 “노량을 깊고 깊은데...” (2원 19일)
③ 통제사 유형과 증손자 유성채... 대를 이은 ‘여수사랑’ (2월 22일)
④ 일제강점기 말에 헐려버린 비각과 대첩비, 그리고 ‘복구’기성회 (2월 25일)
⑤ 현대에 되살려야 할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 정신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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