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이렇다 할 장난감도 없었고, 뉘 집을 막론하고 부모님은 바쁘셔서 아이들과 같이 놀아 주지 않았다.
늘어지기만 하는 여름 해를 넘기기 위해 친구들과 의미 없는 내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는데, 예를 들어 물속에서 숨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사탕을 한꺼번에 몇 개까지 먹을 수 있는지, 라면을 몇 개까지 먹을 수 있고, 눈을 얼마 동안 안 깜빡일 수 있는지, 태양을 몇 분 동안 바라볼 수 있는지를 내기하다 보면 의외의 결과를 맞을 때가 많다.
겁이 많던 친구가 벌레를 잘 잡기도 하고, 통이 작아 보이던 친구가 라면을 제일 많이 먹기도 하고, 순해 보이기만 하던 친구가 물속에서 가장 오랜 시간 숨을 참기도 했다.
오기인지 객기인지 모르지만, 친구들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 과시하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나 역시 가끔 나의 한계를 넘어버릴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영락없이 탈이 나곤 했다. 손발이 새파래져서 친구들을 식겁하게도 만들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음식을 먹어 버려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고, 바다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떨고 있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나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나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방법임을 어렴풋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상담사가 되고 많은 사람을 만나 상담을 하면서 상담사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은 바로 나의 한계를 아는 것이고,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저보다 더 전문가를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수련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굉장히 두렵고 떨렸다.
‘겨우 이것밖에 안 되냐?’는 비난이 날아올 것 같았고 ‘고작 이 정도냐?’는 조롱이 날아올 것 같았다.
특히 초기 상담사일 때 이런 두려움은 더 컸다. 내가 초보라는 것을 들킬까 봐 겁났고, 무서웠다. 그래서 나의 한계 따윈 보려 하지 않은 채 내담자가 변화하지 않을 때도, 상담이 조기 종결될 때도 내담자 탓을 하면서 초보임을 들키지 않는데 급급했던 상담을 하려다 보니 내담자가 이해하지 못할 전문용어와 외국어를 더 많이 썼고, 진단명을 찾기 위해 고집도 더 부렸던 것 같다. 그리고 변화가 없을 때는 내담자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이런 두려움은 비단 상담사인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나만의 기대치를 정해놓게 되는데, 그 기대치라는 것이 상대방과 협의 한 적도 없고, 심지어는 상대방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남편에 대한 기대치, 자녀에 대한 기대치, 어른에 대한 기대치, 회사에 대한 기대치 등
하지만 기대한 만큼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오히려 기대가 크면 실망도 같이 커질 뿐이다. 그럴 때 내가 기대가 컸었다, 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 내 탓을 하기보다는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상대방과 환경을 원망하기 바쁘다,
남편의 수입에 대한 기대가 큰 부인에게 남편은 ‘나는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올 수 없고, 나의 한계는 오백만 원’이라고 말해주어야 부인이 돈에 맞춰 생활계획을 짤 것이다. 그런데 부인의 기대를 알면서도 남편이 자신의 한계를 얘기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남편은 심리적 압박과 부담감으로 힘들어할 것이고, 부인은 번번이 실망하면서 속상해할 것이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 못하는 것을 타인에게는 당연히 기대하곤 한다.
나는 시집살이가 싫지만 내 며느리는 나를 극진히 모셔주기를 바라고, 나는 밥값을 내기 싫지만 내 친구들은 나를 만나면 당연히 밥과 커피를 사줘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는 부모로서의 한계를 알아야 하고, 교사는 교사로서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할의 혼선으로 인해 정작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요즘 2학기 부모 상담이 진행되는 학교가 많은 것 같다. 상담 이후 선생님으로부터 아이의 어려움이나 문제행동을 듣고 상담 문의가 많이 오고 있다. 부모 입장에서 자녀의 문제를 관심 있게 지켜봐 주고 부모에게 전달해 주는 교사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교사 역시 자신의 관점과 판단을 믿고 아동의 심리적, 정서적, 관계적 어려움을 돕기 위해 애쓰는 부모님을 만나면 그 아동이 더 특별해 보이고 더 관심을 주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데 가끔 아동이 경험하는 문제를 부모에게 전달했을 때 굉장히 화를 내는 부모님이 있다고 한다.
“왜 우리 아이를 장애아 취급하느냐?”
“왜 우리 아이만 미워하느냐?”
“왜 우리 아이를 문제아로 만드냐?” 등등
아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 온 마음이 필요하다는 인디언 속담이 있다. 아이를 성장시키는데 음식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 인성, 규칙, 사회성이 필요한 것과 같다.
아이가 열이 날 때, ‘왜 우리 애가 멀쩡한데 열이 난다고 하냐?’라고 화내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아이가 학교 안에서 관계에서, 학업에서, 감정에서, 행동에서 또래와 다른 행동과 양상을 보일 때,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알려 줄 때는 왜 다르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이런 부모의 반응과 대처가 무서워서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다고 토로하는 선생님도 계신다.
그런데도 교사는 교사의 역할이 있고, 또한 역할과 역량의 한계에 대해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 한 명의 의사가 모든 환자를 살릴 수 없고, 모든 수술을 다 할 수 없기에 분야별 전문의가 있는 것처럼 교사라도 모든 학습지도, 생활지도, 인성 지도, 관계 지도를 모두 다 잘할 수 없다.
부모 또한 부모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서 길렀지만, 자녀에 대해 다 안다고 자만하면 안 된다. 부모가 자신으로 인해 실망하고 속상해하는 것을 좋아할 아이는 없다. 만약 아이가 부모 앞에서 하지 못하는 행동을 밖에서 한다면 그건 그 정도 부족함과 못남도 받아주지 못하는 부모 스스로를 탓해야 할 것이다. 작은 세숫대야에 담긴 물로는 고작 세수하고, 발을 씻을 수 있지만 넓은 바다에서는 항해도 할 수 있듯 부모는 바다가 되어야 한다,
밥은 잘 챙겨주는데, 마음은 못 챙기는 부모, 공부는 잘하는데 공감은 안 되는 부모, 돈은 잘 버는데 놀아 줄 줄 모르는 부모, 지시는 잘하는데 사랑한다는 말은 어색한 부모.
그런데도 부모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것은 무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다 안다고 착각하는 오만이 아이도 관계도 다 망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려주는 사람의 관점과 단어를 고깝게 들을 것이 아니라 한 번쯤은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구나!’ 고민해 보고 점검해 보길 바란다. 그것이 지식이 아닌 지혜를 가르치고 준비하는 부모와 교사의 참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