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지킴이'를 '멍청이'라 부르는 웃픈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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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지킴이'를 '멍청이'라 부르는 웃픈 현실
  • 심명남
  • 승인 2019.11.2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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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본 여수 돌벅수 펴낸 엄길수 저자 신간 인터뷰
전국 최다 돌벅수 분포지 여수....여수만의 독특한 명문 새긴 '남정중', '화정려'
일제의 문화 말살정책에 핍박받은 여수 돌벅수... 벅수 뜻 제대로 알고 불러야
돌벅수 저서까지 25년, 여수 돌벅수 전문가가 말하는 돌벅수의 문화적 고찰
미술로 본 여수 돌벅수 펴낸 엄길수 저자의 모습
미술로 본 여수 돌벅수 펴낸 엄길수 저자의 모습

“벅수가 뭔지 아니?”
“약간 띨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큰딸)”
"벅수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아들)”

예상대로였다. 대학을 졸업한 큰딸과 고딩인 막내아들의 답변은 벅수에 대해 어릴 적 내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에라 벅수야"라고 놀려대던 바보 이미지 말이다. 반면 더 젊은 세대들은 고장의 벅수는 관심조차 없다. 교육의 부재 탓이다.

'여수지킴이'를 '바보 멍청이'로 부르는 웃픈 현실

문득 지난 9월에 방영된 KBS 2TV <전매청> 연등동 벅수편이 떠올랐다. 여수엑스포역에 온 리포터는 여러 명의 택시기사에게 ‘여수에서 벅수가 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하나같이 "바보 멍청이”로 말해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리포터는 벅수전문가를 찾아간다. 그 주인공은 25년 전 돌벅수를 연구해 석사학위를 취득한 조각가 엄길수씨였다. 벅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명쾌한 답을 내렸다.

“벅수는 우리 민족의 지킴이입니다. 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몸통에 이름을 새겨놓은 조형물입니다.”

그의 말에 진행자와 시청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2개월이 흘렀다. 약 30여 년간 벅수를 연구해온 그가 얼마 전 돌벅수 책을 출간해 화제다. 미디어넷통이 펴낸 세 번째 책 <미술로 본 여수 돌벅수>가 바로 그것.

이 책은 본지 엄길수 이사장이 25년 전 자신이 쓴 논문을 바탕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돌벅수 분포지인 여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펴낸 책이다. 여수지역 역사 기록물로 교육계에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책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초판은 완판되고 재판을 찍고 있으니 핫한 돌벅수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에 대해 저자의 스승인 이태호 명지대학교 초빙교수는 “여수사람 엄길수의 손길로 다시 태어난 여수 돌벅수는 마을 수호신이자 민중의 자화상 형상으로 여수 사람의 미의식이 반영된 '해학미'와 '자연미'로 보는 엄길수의 시각이 자랑스럽다”라고 호평했다.

이어 “여수 돌벅수를 당당하게 건강함과 단순하고 소박함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공동의 이상으로 다가가는 살아있는 미술작품으로 여긴 점은 기존 민속학적 접근과 달리한 시각”이라고 극찬했다.

또 다른 스승인 원로 조각가 강관욱 교수는 “엄길수는 격동의 시기에 전남대학교에서 만난 나의 제자다“면서 ”그는 타고난 리더십과 지치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평생 석조를 해온 나지만, 그는 벅수에 대한 집념과 끈기로 책을 펴고, 아름다운 고향 사랑에 푹 빠져 사는 엄길수가 부러울 뿐이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수가 그를 사랑하고 자랑하게 되리라 믿는다“라며 제자의 여수와 돌벅수 사랑을 추켜세웠다.

장승은 벅수의 표준말이다. 벅수는 사투리가 아니다. 단지 시대와 지역별로 부르는 이름이 달랐을 뿐이다. 여수는 석장승을 돌벅수라 불렀다. 돌벅수는 지역을 나누는 경계석이자 이정표 역할과 함께 불길한 기운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해왔다.

여수 돌벅수 만의 독특한 명문 '남정중', '화정려'

전국에 세워진 장승의 명문과 확연히 구별되는 여수 돌벅수 '남정중(南正重) 화정려(火正黎)의 모습
전국에 세워진 장승의 명문과 확연히 구별되는 여수 돌벅수 '남정중(南正重) 화정려(火正黎)의 모습

여수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돌벅수가 남아있는 지역이다. 진남관인 전라좌수영성 서문인 연등동에 세워진 한 쌍의 돌벅수는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224호로 지정된지 오래다. 연등동 돌벅수 뒷면에 제작년도가 새겨져 조선후기 정조 12년(1788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눈길을 끄는 건 여수 돌벅수는 전국에 세워진 장승의 명문과 확연히 구별된다. 몸통에 새겨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과는 달리 '남정중(南正重) 화정려(火正黎)라는 여수만의 특색 있는 돌벅수가 세워졌다. 이는 하늘을 관장하는 남정중과 땅과 바다를 관장하는 화정려, 마치 포세이돈 같은 바다신에게 자신을 지켜달라는 간절함이 담겼다.

엄길수 저자는 “주먹도끼 시대에서 스마트폰 시대까지, 생활과 예술은 같이 간다. 삶 자체가 미술(美術)이다”면서 “돌벅수는 여수 지킴이며 살아있는 미술이다"라고 여수 돌벅수의 의미를 부여했다.

여수 돌벅수를 바라보는 저자의 돌벅수 사랑은 남다르다. 그래서 새롭게 제작되고 있는 여수 돌벅수는 여수의 미의식과 여수돌벅수의 참맛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뼈아프다.

“여수사람들은 해학미와 자연미가 넘치는 돌벅수에게 저마다 소원을 빌었죠. 전통 돌벅수는 정 터치 마감으로 다듬었으나 부드럽고 따뜻해요. 반면 요즘 제작된 돌벅수는 전동공구로 표면을 매끄럽게 연마했지만 차가운 느낌입니다. 소원을 빌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겨요.

석굴암을 엉뚱하게 만들어 놓고 복원했다고 하면 범죄입니다. 봉산동 벅수를 비롯해 마을입구에 복원한 돌벅수들은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어요. 벅수가 간직한 인문학적 배경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수만의 특색 있는 돌벅수를 이어가려면 반드시 전문가와 상의해야 합니다.”

아래는 지난 15일 <여수넷통뉴스> 사무실에서 엄길수 저자와 나눈 인터뷰다.

- <미술로 본 여수 돌벅수>를 쓰게 된 계기는

“미디어넷통에서 출간한 <납북어부의 아들>과 <조계산의 눈물>이 지역에서 관심을 끌었다. 이번 출간의 의미는 기록이다.  여수의 역사인 기록문화가 부족해 그동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수 돌벅수는 여수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풍어와 풍년, 질병 그리고 왜구침략을 막는 수호와 지킴이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세월에 마모되고 훼손되고 기억 속에 잊혀가는 것이 아쉬웠다. 조선 실학자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썼던 심정으로 조선후기 동시대에 만들어진 여수 돌벅수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 책을 언제부터 구상했나

”3년 전 여수넷통뉴스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신문사에 <미디어넷통> 출판사를 만들었다. 여수를 주제로한 기록물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매년 책을 출판하였고 이번 책 <미술로 본 여수 돌벅수>는 세번째 책이다. 사실 '뉴스의 힘'이 '시민의 힘'이라 믿고 세상을 바꾸는데 동참하고자 신문사 대표를 선택했다. 교육계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언론인의 역할을 뚜렷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발행인 칼럼을 쓰며 독자와 소통하게 되었고, 그 중 전공분야인 우리 지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시작했다."

- 책 제목이 왜 미술로 본 여수 돌벅수인가

"원래 학창시절 미술의 미(美)자는 양(羊)의 큰 대(大)자가 합한 '아름답다'는 뜻글자다. 즉 사람에 있어서 양고기는 음식이고 가죽은 집과 옷을 만드는 의식주다. 생활과 예술이 같이 간다. 삶 자체가 미술(美術)이다. 삶이 반영되지 않는 예술은 없다. 주먹도끼가 자연을 변형하여 만든 최초의 도구로 절박함 속에 만들어낸 연장으로 인류를 지금껏 살게했다.

여수 돌벅수 또한 절박함이 있다. 공동의 이상에 대한 지역민의 심성이 반영됐다. 단순히 돌로 만든 조각 뿐만이 아닌 '살아있는 미술'이다. 섬박람회를 앞두고 여수의 캐릭터로서도 연구해 볼 가치가 크다.“

 연구논문에서 돌벅수 저서까지 25년 "돌벅수는 민중의 자화상"

자신이 조작한 벅수를 들어보이며 여수 돌벅수를 설명하는 엄길수 저자
자신이 조각한 벅수를 들어보이며 여수 돌벅수를 설명하는 엄길수 저자

- 돌벅수에 대한 연구는 언제부터 했나

“<여수지역에 분포된 돌벅수 연구>인 나의 석사학위 논문과 <호남지방 석장승 연구>라는 논문이 토대가 되었다. 80년 광주민주항쟁으로 좌절이 심했던 시절 역사에 관심이 많아 박물관에 자주 갔다. 구석기 유물관에서 유리 전시장에 진열된 주먹도끼(돌도끼)를 보던 중 학예사에게 돌도끼도 미술이냐? 물으니 명쾌한 답을 하더라. 돌도끼는 인간 최초의 도구인데 이런 것이야말로 ‘최초의 미술이다’고 얘기했다.

구석기인들의 만능도구인 돌도끼야말로 사냥이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절박함에서 만들어진 도구로  "삶 자체가 예술이다"라는 큰 깨달음은 얻는 전환점이 되었다.

미술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후 한국미술사를 대표하는 이태호 교수님을 만나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돌도끼가 최초의 미술이라면 ‘여수 돌벅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미술이다’는 생각을 했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지만 그곳에서 자산어보를 썼다. 여수 ‘지킴이’로 형상된 돌벅수를 연구하면서 민속문화재인 돌벅수와 관련된 제작 과정 등 상세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여수는 돌벅수에 대한 기록이나 분포도 조차 없어 수소문으로 다리품을 팔았다 . 조선후기 호남지방 돌벅수와 여수 돌벅수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여수사람들은 풍어를 기원하면서, 또 뜻하지 않은 바다의 위험과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하기 위해 상징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여수에서는 그 수단으로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에서의 수호신인 ‘여수 지킴이’를 등장시켰고, 여수 돌벅수는 ‘수호신’의 상징으로 조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수지역 돌벅수는 14곳에 25기가 있으며, 여수 돌벅수 유형과 조형의 특징 등을 25년 전 논문을 써서 학문적 검증을 마쳤다.”

- 南正重(남정중)’火正黎(화정려)’라는 여수 돌벅수만의 독특한 명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명문에 나타난 ‘南正(남정)’과 ‘火正(화정)’은 중국 上古(상고)의 관직 이름이고, ‘重(중)’과 ‘黎(려)’는 사람 이름이다. 즉 ‘남정’이란 관직은 ‘중’이, ‘화정’이란 관직은 ‘려’가 맡았다는 뜻이다. ‘중’은 하늘을 다스렸고, ‘려’는 땅을 관장했다. 또한 ‘려’는 불, 여름, 남쪽 바다를 맡은 신으로 알려졌다. 내륙의 벅수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또는 ‘당장군’, ‘주장군’ 등 장군에게 보호를 기원하였지만 해안가 여수사람들은 바다의 수호신에게 지켜달라는 의미의 명문을 사용했다.

- 올해가 '역사의 해'로 의미가 크다

"여수 돌벅수에 반영된 미의식은 '해학미'와 '자연미'이다. 난 여기에 '민중의 자화상'이라는 용어를 붙였다. 올해는 역사의 해다. 역사는 기록이다. 중요민속문화재인 여수 돌벅수를 책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의 심정으로 여수의 돌벅수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기를 둘러메고 다시 현장을 찾아 다녔다. 22년 전 사진과 비교해가며 현재의 벅수를 책으로 펴냈다."

- 벅수의 유래가 궁금하다

"벅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학문적인 뚜렷한 연구는 없다. 벅수의 기원은 신석기,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승은 솟대, 선돌, 돌무더기, 신목, 신당 등과 함께 원시 신앙의 조형물로 유 목·농경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농경문 청동기에 새겨진 솟대 그림만 보더라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 귀면문전, 통일신라시대 녹유귀면와, 고려때 국장생과 황장생의 기록이 있다.

1909년에 지석영에 의해 간행된 <자전석요>에서는 장생이라고 하였고,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의하여 ‘장승’이 표준말이 된 것이다.

벅수는 생김새가 각기 다르듯이 명칭 또한 시대와 지역 그리고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뉜다. 벅수의 명칭은 법수(法首)가 음운이 변천되어 굳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각 시대와 지방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지금도 남해안 여러 곳 벅수골 이란 마을 이름이 사용되고 있으며, 여수에서도 연등동 벅수골, 봉산동 벅수골, 동산동 벅수골 등 지명을 의미하며, 벅수골 수퍼, 벅수골 미장원, 벅수골 노인정 등과 같이 지명을 이용한 상점이 그대로 남아있다. 

잘못된 표현 중에 하나가 나무로 만들면 장승이고 돌로 만들면 벅수라는 표현하는데 구분은 없다. 

미신숭배가 아닌 문화재적 접근 필요한 벅수공원 테러사건

미디어넷통이 출판해 초판 발행 며칠만에 완판이 끝나고 재판에 들어가며 이슈를 일으킨 미술로 본 여수 돌벅수 책표지 모습
미디어넷통이 출판해 초판 발행 며칠만에 완판이 끝나고 재판에 들어가며 이슈를 일으킨 미술로 본 여수 돌벅수 책표지 모습

- NO 재팬 불매가 활발하다. 일제가 여수돌벅수 말살정책에도 관여했나

" 여수는 이충무공의 위대한 승리로 대표되는 군사유적과 유물이 많은 지역이다.  임진왜란의 승리의 지역인 여수는 일제 강점기에 이 지역에 대한 탄압과 역사를 왜곡하는 사례가 많았다. 호국문화재인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타루비>등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이미 핍박을 받았다.

그 중 마을 지킴이인 돌벅수 경우도 그 한 예이다. 연등동 벅수는 일제 강점기에 무너졌을 개연성이 크다. 호국의 상징인 진남관 성문지킴이인데 일본사람들이 좋아 할 리 없다. 3.1운동이후 문화 정책도 한 몫 했다.

한편 돌벅수에 대한 잘못된 시각의 하나로 흔히 바보 같은 사람을 두고 벅수 같다고 한다. 이것은 마을 지킴이를 바보로 만들려는 일제 강점기 문화정책인 식민사관의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단결된 마을공동체의 문화를 업신여기는 일본 문화 정책과 친일 세력들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 여수의 수호신이고, 지킴이인 돌벅수를 더 이상은 바보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수 돌벅수는 호국의 성지로서 긍지 넘치는 여수반도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여수 지킴이가 '멍청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여문 벅수공원 테러사건도 겪었던데

”2000년 새천년을 맞이했다. 당시 여수시민단체에서 벅수공원 건립을 추진하자는 제안이 내게 들어왔다. 마치 1999년 호명에 사는 분(향토사학자 이중근선생님)의 선산에 불이 나 70년이 넘는 적송들이 그을어져 나무의 기능이 상실되어 소나무를 기증해 주셨다. 호명으로 포클레인과 중장비를 동원해 나무를 싣고 내 조각실인 돌산 평사리 모장으로 가지고 와서 여수시민들과 함께 여수의 벅수를 제작했다.

당시 시민사회단체가 여문공원에 허가를 맡아 2000년 5월 5일 나무벅수 20기를 세웠다. 또 여수엑스포 유치를 기원하는 시국장승과 전통의 문구인 '남정중'과 '화정려'를 새겨 세우고, 솟대와 고인돌과 산성의 이미지를 함께 배치하여 시민들의 기원를 담은 명실공히 여수의 '여문벅수공원'이 조성되었다.

이후 공원에서 결혼식 하는 사람도 있고 노인들이 잔치도 많이 벌였고, 어린이날 소원성취 행사를 하고 공원으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비오는 새벽에 전화가 왔다. 가보니 모든 조각들을 전동톱으로 썰어 빗속에 넘어져 있었다. 예쁘게 만든 솟대마저도 전기톱으로 잘려 난장판이 되었다. 잘려진 솟대에 앉아있는 새 두 마리만 온전히 남았는데 그 새는 아직도 내 작업실에 보관중이다. 가슴이 아팠다.  

벌써 19년이 흘렀다. 새천년을 기원해 세운 여문벅수공원이 특정 세력의 소행으로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여수 공동체 문화와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우리 역사와 함께해온 여수 돌벅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접근이 필요하겠다.

인문학의 부재로 현대화된 여수 돌벅수는 마을곳곳에  전통적인 돌벅수 모습인 해학미와 자연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텔레토비 마냥 우스꽝스럽게 제작된 모습을 사진에 담고있는 엄길수 저자(우측)
인문학의 부재로 현대화된 여수 돌벅수는 마을곳곳에 전통적인 돌벅수 모습인 해학미와 자연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텔레토비 마냥 우스꽝스럽게 제작된 모습을 사진에 담고있는 엄길수 저자(우측)

- 가장 와닿은 여수 돌벅수를 꼽는다면

“이 책을 쓰면서 올해 다시 여수 돌벅수들을 방문해 보니 어느 것을 꼬집어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느꼈다. 여수 역사와 세월을 함께해 오며 우리지역을 지켜왔던 돌벅수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봉산동 '남정중'은 해학미와 천진 난만한 심성이 잘 반영됐다. 개도의 여석 돌벅수는 단단한 숫돌로 조각하여 지금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그 '해학미'와 '자연미'가 반영된 매우 뛰어난 돌벅수다. 선소의 돌벅수는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마모되었으나,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여수 역사와 함께해온 여수의 소중한 돌벅수다.

하지만 새롭게 제작되고 있는 돌벅수는 여수전통 돌벅수에 대한 장점이 반영되지 못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종포해양공원, 돌산케이블카, 돌산 우두리 마을, 화양면 화동리 벅수만 보더라도 그렇다. 여수전통 돌벅수의 참맛을 살리지 못해 아쉽다.

- 마지막 돌벅수 저자로서 여수에 대한 문화적인 조언이 있다면

“새롭게 창출해 낸 여수 돌벅수는 몸체에 쓰인 명문만이 전통적인 것이고, 얼굴이 지닌 상징성은 전통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의 어떤 의지를 읽어 내거나 느낄 수 있는 공감대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여수 돌벅수를 제작한 미술인들은 대부분 치졸하고 변질된 돌벅수를 조각했다는 혐의를 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돌벅수 조각도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돌벅수의 현대화는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 후기의 여수 민중들이 그들의 자화상으로 이미지를 창출하여 여러 가지 정형을 제시하였듯이 오늘의 돌벅수 제작자, 아마도 미술인들은 이 시대 민중의 상을 담아내는 21세기의 돌벅수를 창출해내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 이러한 조형목표를 가지고 돌벅수를 새긴다면 조만간 우리는 우리 시대의 멋진 돌벅수를 만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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