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학생의 눈앞에는 공책보다 태블릿이, 칠판 대신 대형 스크린이 자리한다. 인공지능이 맞춤형 문제를 제시하고, 학생의 표정과 반응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학습 난이도를 조정한다. 교사의 손에는 분필 대신 데이터가 들려 있다. AI는 이제 학교의 교과서이자 조교이며, 동시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되었다.AI가 교육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개별화 학습’이다. 과거 교실이 동일한 속도의 진도를 강요했다면, 이제는 학생마다 다른 학습 여정이 가능해졌다. 어떤 이는 빠르게 문제를 풀고, 또 다른 이는 기
2026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예비후보 등록은 내년 2월 20일부터 시작된다. 불과 네 달여 남은 시점에서 여수시장 출마를 준비하는 인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시민들 또한 “이번에는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제9대 여수시장은 향후 4년간 여수산단 석유화학산업의 불황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어야 한다. 이 위기를 돌파하지 못한다면 여수 경제는 더 큰 침체에 빠질 수 있다.지금 여수에 필요한 시장은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다. 추진력과 결단력, 배짱, 그리고 경제를 내다보는 안목을 갖춘
노자는 말했다.“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러들며, 언제나 겸손하게 제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막히면 바위를 뚫고, 막아도 결국 길을 내며 바다로 나아간다. 이번 한미·한일 정상회담에서 우리가 목도한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는 바로 이 ‘물과 같은 리더십’을 보여주었다.처음부터 나는 이재명 대통령을 믿었다. 그는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풍부한 행정 경험을 쌓아온 준비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극우 보수 세력은 그를 악의적으로 폄훼하며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워왔
국가여! 그동안 책무를 다 하였는가. 혹 4398번 거짓 여인이 대낮에 활개를 칠 수 있도록 방조하지는 않았는가?헌법학자 임지봉 교수는 “헌법이 ‘권력 제한 규범’이기 때문에 최고 권력자도 헌법이 부여하지 않은 권한을 행사하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라고 말한다.이 발언은 오늘 우리가 마주한 현실, 즉 헌법적 권한이 없는 김건희 씨가 대통령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그 뒤를 윤석열 대통령과 검찰, 그리고 이를 옹호한 세력이 방패막이 삼아 민주주의 제도의 취약점을 드러낸 사태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용서하자. 하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타인을 지배하려는 충동이 강하다. 그 지배를 통해서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얻기 때문이다.”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의 이 말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병리적 현실을 꿰뚫고 있다.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어른들이 공부를 멈춘 채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제도권 교육을 마치고도 지식은 갇힌 채로, 사고는 굳어진 채로 멈춰버린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독서를 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으며,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이만 먹었을 뿐, 내면은 자라지 않은 사람들이다.이들은 언제나 정답만
역사는 잊지 않는다. 선한 지도자의 이름도 기록하지만, 악행을 저지른 권력자의 이름 역시 길이 남는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수많은 권력형 비리가 있었지만, 3617번, 이 수감번호만큼 깊은 상처를 남긴 숫자는 없었다. 3617번, 윤석열.그는 국가를 통째로 사유화한 자였다. 검찰 권력부터 장악한 그는, 법치를 무너뜨리고 국민의 삶 위에 군림했다. 하지만 그의 탐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최근 드러난 충격적인 보도는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그는 북한 무인기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군사적 긴장을 유도하고, 그 위기를 명분 삼아 계엄령 선포를
에머슨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불은 욕망이고, 가장 차가운 것은 무관심이다.”라고 말했다. 혹 그 뜨거운 욕망이 살인적인 폭염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살인적인 폭염이 다시 찾아왔다. 도시는 펄펄 끓는 가마솥이 되었고, 거리의 나무는 숨을 헐떡인다. 사람들은 실내에 갇혀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긴다. 문제는 단순히 불편함에 그치지 않는다. 폭염은 이제 생존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한 재난이 되어가고 있다.그런데 우리는 이 폭염을 그저 '날씨'라고만 치부하며 넘기고 있는 건 아닐까. 더위가 심할수록 더욱 에어컨을 틀고, 거리에는 더 많은
흔히 어른들은 말한다.“너 그렇게 살면 망한다.”“평범하게 살아라.”“그런 일로 어떻게 먹고살래?”이 말들은 충고일까, 협박일까. 한낱 걱정인 듯하지만, 많은 청소년들의 꿈을 꺾고, 자존감을 낮추며, 정해진 틀 안에 가두는 벽이 되곤 한다.물론 어른들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세상의 기준을 통해 ‘안전한 길’을 알려주려는 선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안정된 삶’이라는 공식을 따르는 삶이 유일한 성공의 길이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하버드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미래의 진짜 성공은 자신이
사람이 세상에 홀로 존재한다면 정의도 불의도 필요 없다. 타인과 부딪히고 함께 살아가며 비로소 이 두 개념은 모습을 드러낸다.정의는 공동체의 방향을 불의는 경계해야 할 위험을 말해준다. 그런데 현실의 삶은 단순하지 않다. 많은 이들이 가슴속에 정의와 불의를 함께 품고 살아간다.우리는 때로 분노한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서기도 하고 억울한 이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날엔 침묵하거나 심지어 부당한 권력에 기대어 자기 이익을 챙기기도 한다.정의와 불의는 그만큼 가까이 있다. 마치 인간의 그림자처럼 늘 우리 곁에 있
하루 만에 기적이 일어났다. 대통령이 바뀌었을 뿐인데,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침 지하철 안에 흐르던 음울한 기운은 옅어지고, 출근길 거리엔 오랜만에 밝은 인사가 오갔다. 마치 겨울 끝자락에 갑자기 찾아온 봄 햇살처럼, 우리 마음에도 따스한 빛이 스며들었다.그것은 단지 권력 교체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거짓말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법 위에 군림하던 자들이 이제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믿음, 그리고 그동안 눌려 있던 진실이 다시 숨 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만들어낸 ‘심리적 회복’이었다.우리는 오랫동안 눈에 보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난 6개월, 이 말은 국민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이젠 괜찮겠지” 하고 안심하려는 순간, 그 설마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 국민을 수렁으로 끌어당겼다.내란은 늘 그 설마 속에 악마를 숨겼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내란이었건만, 그들은 반성은커녕 반칙과 법치를 교묘히 이용해 살아남았다. 헌정을 유린하고 국민의 뜻을 짓밟은 자들이, 오히려 정의의 탈을 쓰고 다시 권력을 넘보는 참담한 나날이었다.그러나 그 설마가 현실이 되는 것을 막아낸 건, 결국 깨어 있는 시민들이었다. 마침내 국민이 이겼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이 단순하고 분명한 속담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선 더는 통하지 않는 것 같다.불법을 저질러도 당당히 정치판에 서고, 거짓말을 일삼아도 표를 얻는다. 책임지지 않는 자가 권력을 잡고, 성실히 살아온 국민이 외면당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불안정한 세상이 되어버렸다.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기준은 분명해졌다. 예측 가능한 사회를 이끌 수 있는 대통령, 다시 말해 콩을 심으면 콩을 수확하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두게 해줄 사람을 뽑아야 한다. 정직함이 보상받
12월 3일 내란 사건 이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 사이 다수의 국민은 밤잠을 설쳤다. 나라가 어디로 흘러갈지, 민주주의는 다시 설 수 있을지, 불안과 분노, 무력감이 교차했다. 한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엉뚱고개가 나타났고, 목숨 걸고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악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산 너머 산이었고, 눈 위의 서리였다.하지만 지금, 다시 그 내란 세력에게 ‘표’를 달라고 외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대낮에 벌어지고 있다. 선거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향해 또다시 포장된 구호를 내밀며,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하려는 그들의 음모는
요즘 들어 유난히 자주 보게 되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 앞에서 울먹이며 말끝을 흐리는 사람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는 정치인들 그 눈물은 마치 반성의 눈물 같지만정작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호하다. 그리고 대개 그 눈물의 유효기간은 너무나 분명하다. 바로 ‘선거 날까지’다.‘악어의 눈물’이란 말은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먹이를 삼킨 뒤에도 울음을 흘린다는 전설 속 악어처럼 권력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위태로워질 때에만 눈물을 보인다.그 눈물은 연민과 공감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실상은 냉혹한 계산 위에 놓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소설가 한강이 남긴 이 말은 1980년 5월 광주를 설명하는 가장 절절한 문장이다. 그날, 총칼 앞에 쓰러진 이들의 피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고, 살아남은 자들의 양심을 흔들었다.그럼에도 그 진실을 짓밟은 이들은 신군부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자신들을 구국의 주체로 포장하고, 국민을 속이며 역사를 조작해왔다. 그 후예들은 오늘날까지 보수라는 외피를 쓰고 권력을 지켜왔다.‘질서’와 ‘안보’라는 명분 아래 공포와 이간의 정치를 지속해왔고, 마침내 또 다른 내란의 늪에 스스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진실은
학교부적응을 겪고 있는 미란이는 부유한 가정에 호감형의 외모를 갖고 있는 학생이지만 중학교 이후로는 지속적으로 부적응을 겪고 있다.수업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이 어렵다보니 학교성적은 평균 30점이 안되고, 친구 관계도 어려워하고 있다. 먼저 다가가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다 친구가 말을 걸어와도 우물쭈물하다 대답할 기회를 놓쳐버리기 일쑤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친구들 역시 미란이에게 말을 거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아이가 되어버렸다.쉬는시간이면 삼삼오오 모여있는 아이들 사이에 오롯이 혼자서 숨을 쉬는 아이가 미란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 말은 오늘 대한민국 사법부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처럼 들린다.어린왕자는 끝없이 계산하고 따지며 자기 세계에 갇힌 어른들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우리 사회의 사법부가 그 어른들보다 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은 슬프고도 두렵다. 그것은 탐욕주의와 보신주의, 그리고 그로 인해 얽히고설킨 ‘사법 카르텔’이라는 이름의 괴물이다.최근 대법원의 초고속 판결, 내부에서 터져 나온 현직 판사들의 자성의 목소리,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적 실망은 단순히 한 사건
장자는 "과거를 붙잡는 것은 그림자를 쫓는 것이고,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거울 속 환영을 붙잡으려는 것이다."라고 했다.대한민국 사회는 과거와 미래라는 두 그림자에 사로잡혀 현재를 잃어가고 있다.특히 아이들에게, 우리는 오지 않은 미래를 끊임없이 걱정하도록 강요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를 답습하도록 만든다. 결국 대한민국은 아이들에게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되어버렸다.입시, 취업, 결혼, 노후. 이 나라는 살아 있는 생명을 앞에 두고도 늘 '다음'을 이야기한다. 초등학생에게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시키고, 고등학생에게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망치는 방식이 있다. 그들은 종종 자식이 잘되면 자신이 잘 살았다고 여긴다.우리 사회에서 자식의 성공은 부모의 자랑이자 인생의 보상처럼 여겨졌다. 삶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는 일이 아니라, 자식을 먹이고 키우는 일이었고, 그마저도 등골이 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자식은 곧 인생의 증명이었고, 그 증명이 화려할수록 더 잘 산 삶이라고 믿었다.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제 앞가림을 잘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해하는 건 인간적인 감정
2014년 4월 16일, 아침 바다는 평온했지만, 대한민국은 가장 어두운 침몰을 목도했다.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고, 304명이 구조되지 못한 채 희생되었다. 그중 다수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국가는 구조 골든타임 동안 어디에 있었는가. 현장은 혼란과 무능으로 가득했다. 해경은 진입을 망설였고, 방송은 엉뚱한 정보를 흘렸으며, 정부는 정확한 대응보다 책임 회피에 몰두했다. 무엇보다도 참담했던 것은,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그 한마디였다.망자계생(亡者繼生), 죽은 자는 산 자를 통해 다시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