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독도를 러일전쟁(1905년) 당시 편입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발견됐다.
일본측 주장에 의하면 러일 전쟁 당시인 1905년 2월 15일 외무성에서 훈령을 내렸고, 시마네현에서 1905년 2월 22일자로 편입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2005년부터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해 매년 2월 22일에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일본에서 20여 년간 공부한 후 부산외국어대학에서 한일관계사를 가르쳤던 김문길 교수(한일문화연구소 소장)는 수년 전 시마네현 오끼섬을 방문해 독도에 어업회사를 차렸다는 회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회사는 없어지고 대신 회사 사장(야하다 사이타로)의 손자인 '야하다 소산'을 만났다. 다음은 사장의 손자인 '야하다 소산'이 할아버지의 <죽도일기>를 김문길 교수한테 전해주면서 했던 말이다.
"죽도(독도)는 우리 할아버지가 명치시절부터 전쟁 전까지 죽도(독도)에 회사를 차리고 고기를 잡은 일본 땅인데 한일협정(1965년 6월 22일) 때 일본 땅이라고 문서화하지 않은 것이 억울해 당시 다케시다 관방장관 한테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사장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당시 관방장관한테 보낸 탄원서를 김문길 교수한테 직접 보여줬다. 문서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교수는 문서에 적힌 내용을 자세히 검토한 후 일본이 1905년부터 독도를 본인들 땅으로 편입한 것은 명백한 허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당시 한일협정 체결 당사자들은 독도가 어느 나라 영토란 것을 명확히 하지 않고 넘어갔다. 한국인들은 불만속에 넘어갔지만 일본 시마네현 주민들은 원성이 컸고 독도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렸던 어부 야하다사이타로가 외무성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다음은 김문길 교수가 사장의 손자인 '야하다 소산'으로부터 획득한 문서에 근거해 쓴 글이다.
'문서1'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도에 어업회사를 차렸던 '야하다사이타로'가 '다케시다 관방장관'에게 보낸 탄원서다.
"나는 야하다 사이타로로 현재 83세다. 시마네현 오끼 고가촌 다이오지 후시미라는 동네에 산다. 6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독도(죽도)에서 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독도가 일본영토란 것은 세상이 알고 있다."
참고로, 일본 어부들이 독도에서 해산물을 채취해갔다는 시마네현 오끼섬은 독도에서 157.7km,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87.4km 떨어져 있다.
'문서2'는 독도에서 해산물을 채취한 일본 어민들의 상황을 설명한 자료다.
"독도(죽도)에는 해산물이 풍부하여 미역 등 많은 해산물을 채집했고 특히 물개를 잡았다. 물개는 오사카, 고베 서커스 곡예단에 팔았다. 당시 독도에서 잡은 물개 박제 세트는 여러 곳에서 전시하고 있다."
'문서3'의 밑줄 친 부분을 보면 일본이 1905년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다고 주장하는 사실이 틀렸다는 걸 명확하게 증명해준다. '문서3'내용이다.
"(죽도는) 소화 4년(1929년) 관보에 시마네현 관할 구역으로 편입하고 행정상으로 오키도 고카촌으로 소속되었다."
위 '문서3'을 보면 독도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편입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주권을 상실한 때이다.
일본측 주장에 의하면 독도는 러일전쟁 당시인 1905년 2월 15일 외무성 훈령에 독도를 죽도라고 편입했다고 했다. 또한 시마네현 고시 40호로 편입했다면서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했다.
하지만 김문길 교수 주장에 의하면 "시마네현 고시40호는 직인이 찍혀 있지 않고 회람으로 돌린 것이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고 한다. 독도의 날을 맞이해 다시 한번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