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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골여행기5] 석인상 답사하다가 국경경비대 조사받기도

목이 잘린 석인상... 무관심한 현지인들

  • 입력 2022.10.21 16:03
  • 수정 2022.11.01 11:50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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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암으로 정교하게 만든 "람트석인상" 모습 ⓒ오문수
▲ 사암으로 정교하게 만든 "람트석인상" 모습 ⓒ오문수

일행이 동몽골을 방문한 시기는 9월말. 혹시 눈이 올지도 모르니 겨울 채비를 단단히 하고 오라는 가이드 말에 따라 두꺼운 겨울 잠바와 내복을 준비해 배낭에 담고 떠났는데 수흐바타르 아이막 다리강가솜을 코앞에 두고 눈이 왔다. 몽골의 '아이막'은 우리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명칭이고 '솜'은 우리의 '군'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명칭이며 몽골어 '골'은 우리의 '강'을 지칭한다.

동몽골에서 고대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설화나 유적이 전승되고 있는 지역은 도르노드아이막 할힌골솜의 보이르호수 주변과 수흐바타르 아이막 다리강가솜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석인상과 비슷한 모습의 석인상이 여럿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석인상의 원조일지도 모른다. 고조선유적답사단 안동립 단장과 필자가 한국 여행자들을 쉽게 만나볼 수 없는 몽골 오지를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 다리강가 스텝지대에 세워진 7개의 석인상 중 목이 잘린 한 기의 모습으로 남성성기의 모습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오문수
▲ 다리강가 스텝지대에 세워진 7개의 석인상 중 목이 잘린 한 기의 모습으로 남성성기의 모습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오문수
▲고조선유적답사단 안동립 단장이 머리가 잘린 석인상에 목례를 한 후 땅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올려 원상회복한 후 촬영한 모습  ⓒ오문수
▲고조선유적답사단 안동립 단장이 머리가 잘린 석인상에 목례를 한 후 땅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올려 원상회복한 후 촬영한 모습 ⓒ오문수

몽골 동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는 다리강가의 광활한 초원에는 크고 작은 화산분화구와 작은 호수들, 모래언덕이 군데군데 있다. 이 지역은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귀족정치체제 하에 있었고 초원은 베이징에 거주하는 황제의 말을 기르는 왕실 방목지로 이용되었다.

다리강가에서 신성시 여겨지는 산 실링복드

오늘날 다리강가는 신성한 산들로 유명하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산이 실링복드로 다리강가 동쪽 약 70㎞ 떨어진 곳에 있다. 많은 몽골인들이 이 사화산을 신성시하고 있다. 옛날에는 '여성 등반 금지'라는 규정이 있었지만 요즘은 여성도 등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중산간 쯤에 차를 세워두고 안동립 단장과 필자 둘이서 정상 등반에 나섰다. 갑자기 초속 30~40미터의 눈보라가 몰아쳐오니 몸을 가누기 어려웠고 거의 수평으로 내리치는 눈이 얼굴을 때리니 아프기까지 했다. 정상에서 화산분화구를 보려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차를 세워둔 곳에 오니 눈이 10cm 정도 쌓여있었다.

▲ 실링복드 산 정상에 있는 오보 모습. 9월말인데도 초속 30~40m의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쳐 앞뒤를 볼 수 없었다 ⓒ오문수
▲ 실링복드 산 정상에 있는 오보 모습. 9월말인데도 초속 30~40m의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쳐 앞뒤를 볼 수 없었다 ⓒ오문수
▲ 눈보라와 강풍이 몰아치는 실링복드산을 오르니 오보위에 비행기 모형이 놓여있었다. 안전운항을 기원했을 걸로 추정된다. ⓒ오문수
▲ 눈보라와 강풍이 몰아치는 실링복드산을 오르니 오보위에 비행기 모형이 놓여있었다. 안전운항을 기원했을 걸로 추정된다. ⓒ오문수

정상에 오르면 깃발로 뒤덮힌 커다란 오보가 있는데 퀴퀴한 냄새가 난다. 몽골인들이 봉헌한 음식, 우유, 동전이 주변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다리강가와 실링복드를 연결하는 길위에는 '몽골의 홍길동'이랄 수 있는 '토로이반디(Toroi-Bandi)' 좌상이 있다. 그는 만주 지역 통치자의 말을 훔친 후 실링복드 산에서 숨어지냈다. 가이드 저리거씨가 실존 인물이었던 '토로이반디'에 대한 일화를 들려줬다.

▲  "몽골의 홍길동"이라고 불린 "토로이반디" 좌상 모습.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 그를 닮으려는 의협심 강한 몽골청년들이 실링복드를 찾는다고 한다. ⓒ오문수
▲ "몽골의 홍길동"이라고 불린 "토로이반디" 좌상 모습.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 그를 닮으려는 의협심 강한 몽골청년들이 실링복드를 찾는다고 한다. ⓒ오문수

"토로이반디는 실존했던 인물로 부자들의 물건을 훔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에 그의 일생을 본받고 싶어하는 몽골 청년들이 실링복드를 찾아와요. 제 어릴적에 북한에서 수입해온 <홍길동전>을 상영했는데 어떤 친구는 30번도 더 보았다고 해요.

그때까지 몽골 영화 주인공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영화가 없었거든요. 그 영화가 어찌나 인기가 있었든지 영화관 앞에서 줄서있던 어린이들이 한꺼번에 넘어지면서 한 몇이 압사당한 일도 있었어요."

수십개 석인상이 있는 다리강가 스텝지대

다리강가 주변 스텝지대에는 수십 개의 '발발'(인간 형상으로 조각된 석상)이 있다. 대부분 머리가 잘린 석인상은 13세기와 14세기 몽골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한 손에 들린 컵에 음식을 공양하는 모습이다.

실링복드산 뒤편 초원에는 호르깅 혼디(Khurgiin Khundii) 석인상 7개가 있다. 제주도에 있는 석상과 비슷한 석인상 6개는 현무암으로, 나머지 한 개는 암회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주위가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지대이기 때문에 현무암 석인상은 이해할 수 있지만 화강암으로 만든 석인상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지역을 관장하는 권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가이드이자 운전수인 저리거씨가 다리강가 초원에서 석인상있는 곳을 묻자 방향을 알려주는 할머니 ⓒ오문수
▲ 가이드이자 운전수인 저리거씨가 다리강가 초원에서 석인상있는 곳을 묻자 방향을 알려주는 할머니 ⓒ오문수
▲  다리강가 초원에서 초원을 응시하는 석인상. 머리가 잘려있어 목례 후 원상회복한 석인상 모습이다.ⓒ오문수
▲ 다리강가 초원에서 초원을 응시하는 석인상. 머리가 잘려있어 목례 후 원상회복한 석인상 모습이다.ⓒ오문수

초원을 굽어보는 석인상 대부분은 발에 신발을 신고 모자를 썼다. 그 중 2개는 수흐바타르 박물관으로 이전해 전시 중이라고 한다. 동행한 고조선유적답사단 안동립 단장이 목례를 한 후땅바닥에 떨어져있던 머리를 원위치에 복원하자 옛모습이 드러났다.

사람이 거의 살고 있지 않는 초원에 서있는 석인상이 왜 머리가 잘렸을까? 머리 잘린 석인상에 대해 <알타이의 제사유적>의 저자 블라지미르 D. 꾸바레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앙아시아와 중부아시아의 많은 연구가들은 석상을 연구하면서 그들의 특수한 파괴현상에 대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이 튀르크인의 적들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세메레치예' 지역에는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이슬람인들이 유목민족의 세계로 침투하였다.

다른 연구자에 의하면 현대 튀르크어족의 주민들은 째려보는 것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또한 석상이 사람이나 가축 등에 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석상의 머리 부분을 부수었으며 완전히 없애거나 땅속에 파묻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람트석인상이 간직한 비밀은?

해질 무렵이 되자 일행은 초조해졌다. 동몽골을 찾은 가장 커다란 목표 중 하나인 '람트(Lamt)석인상'을 찾아야하기 때문이었다. GPS를 보며 길도 없는 초원을 한참 헤매다 젊은 유목민을 만나 석인상을 물으니 "이 근방에 그런게 있느냐?"며 오히려 반문한다. 무관심한 그들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데 저 멀리 두 개의 석인상이 보인다.

모자를 쓰고 가까이 서있는 키 110cm의 석인상은 한손에 그릇을 들고 있었고 뒤편에는 무덤을 발굴한 흔적이 보인다. '람트석인상'은 13~14세기 몽골의 역사와 문화 민족을 추정해볼 수 있는 요소들을 제공하고 있다.

사암으로 만든 석인상은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오른손에 그릇을 들고 의자에 앉아있다. 다른 석인상과 차이가 나는 것은 모자에 매듭 장식이 있었다. 평화로운 몽골 가정을 묘사한 이 석인상은 몽골에서 여태껏 본 석인상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국경경비대 군인 하나가 다가와 카메라를 보잔다. 카메라 속 사진이래야 석인상과 아름다운 경치가 전부인데도 부대로 가잔다.

▲ 람트석인상에서 백여미터 떨어진 지역에 있는 석인상. 머리와 팔 다리부분이 손상되어 있다. ⓒ오문수
▲ 람트석인상에서 백여미터 떨어진 지역에 있는 석인상. 머리와 팔 다리부분이 손상되어 있다. ⓒ오문수

둘 다 군대를 제대한 예비역이고 군사보안이 뭔지 아는데 너무한다 싶으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네 번에 걸친 카메라 검사와 승용차에 실린 짐검사까지 마친 군인들은 한국에서 자료조사차 왔다고 하니 또 다른 석인상 위치까지 알려줬다.

차를 타고 다른 석인상을 보러 가는 중 퍼뜩 떠오른 게 있다. "내가 몽골에 단단히 미치긴 미쳤나보다! 3년 전에는 몽골 서쪽 끝 알타이 산맥 인근에서 암각화를 조사하다 국경경비대에 불려갔는데 이번에는 몽골 동쪽 끝 다리강가 지역에서 석인상을 조사하다 국경경비대에 끌려가다니!" 암각화가 있는 서쪽 끝 국경 알타이산맥은 몽골 중국 러시아 국경이 맞닿은 지역이고 다리강가 석인상은 몽골 동쪽 끝에 있어  중국과 국경선이 맞닿는 곳에 있다.

귀국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가지 자료를 조사했지만 학자들이 면밀하게 조사해놓은 자료가 없다. 단지 몇 명의 학자들이 도르노드아이막 할힌골솜과 수흐바타르 아이막 다리강가솜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반도로 내려왔을 거라는 주장만 있었다. 한참 자료 조사를 하다 <뉴제주일보>가 2018년 12월 발행한 '서재철의 오지기행'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기사에는 "2018년 8월 9일 한국과 몽골 학자들이 다리강가 지역 석인상을 조사한 후 람트인 석인상 앞에서 제주에서 가지고 온 돌하르방 모형을 들고 '조우식(遭遇式)'을 하면서 감격해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일행은 한국 역사학자들이 본격적인 조사를 통해 석인상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주기 바라며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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