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초등학생 시절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구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다. 휴게실로 나가면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일흔살이 넘는 동안 두어 번 통화한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해 무슨 일인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나이 든 사람의 연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이! 친구야! 잘 있었어? 웬일이야? 근데 너도 나이가 들었는가 보구나! 나도 나이들다 보니까 가끔 옛친구가 보고 싶을 때가 있었어. 하하하"
"응, 바쁜 일 없으면 일요일 날 고향에서 상희랑 점심이나 먹자구"
전화속에서 들려오는 친구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다. 친구는 '70년 이상 계속되는 우정과 진정한 친구인 노상희'를 말하며 약속 장소와 시간을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책상 앞으로 되돌아오며 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존재를 알아주는 친구와 글을 통해 어려운 친구에게 공감을 보낼 수 있다는 행복감 때문이다.
내 고향은 기차마을로 유명한 전라남도 곡성이다.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지가 있는 살기 좋은 고향이지만 오곡초등학교 6학년 2반 아이들은 지독히도, 정말 무던히도 가난한 친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많은 친구가 점심 도시락을 가져올 수가 없어 6.25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서 구호물자로 보내온 강냉이죽을 받아먹던 친구들이었다. 가난하고 배고팠지만 해맑았던 친구들.
8일 여수를 떠나 섬진강 옆 기찻길을 따라 곡성평야에 들어서니 들판은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푸근한 고향 땅이다. 만나기로 약속한 식당에 도착하자 멀리 대구에서 온 친구 조완용이 아내와 함께 왔고 곧이어 고향에서 농사짓고 있는 노상희 친구도 도착했다. 반갑게 악수를 마치고 점심식사 하는 동안 우리 식탁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조용한 곡성기차역 까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계속했다.
97년도에 빚보증... 40억 날린 대구 친구
초등학교 졸업앨범 사진값이 없어 앨범 사진을 못 찾은 대구 친구는 14살에 곡성을 떠나 외갓집인 대구로 갔다. 철다리 아래 단칸방에 기거하면서 섬유기계제작 수리 회사에 입사한 그는 동생 다섯 명과 어머니를 대구로 불러와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1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식구들 생계를 책임진 채 열심히 일한 그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돈도 잘 벌며 승승장구한 그는 38살에 공장을 차려 직원이 30명이나 됐다. 호사다마라고 그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거절할 수 없는 지인의 보증을 잘못 서 40억원이 통째로 날아갔다.
그는 이후 40억을 다 갚았다. 실은 10억 정도는 빼돌릴 수 있었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모두 갚았다. 빚을 다 갚고 나니 10원 한 장도 남지 않았다.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빈털터리로 와서 지금껏 이룩했던 살아온 세월이 억울했다.
활달한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는 성격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일어서겠다는 생각으로 파지 줍기에 나선 그는 용달차를 이용해 대구 시내를 돌았다. 파지와 박스가 보이면 용달차에 싣고 고철이 보이면 짐칸에 실었다. 파지를 가득 실은 트럭을 싣고 파지 수집상에게 가면 기름값 빼고 2~3만원 밖에 안됐다.
잘나가던 친구가 부도났다는 소식은 노상희를 비롯한 몇 명의 고향 친구 귀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어느 날 고향 친구인 노상희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네 소식 들었다. 힘들지? 내가 3백만원 보내니 다시 일어서라! 이 돈은 나중에 네가 돈 벌면 갚고, 어려우면 안 갚아도 돼"
노상희 친구가 보내온 돈과 전화를 받은 그는 엉엉 울었다. 자신이 열심히 일해 번듯하게 살게 된 형제들이 단돈 1원 한 장 보내준 적이 없는데 현금 3백만원을 보내다니. 그것뿐이 아니었다. 가을 김장철이 되면 김장할 수 있는 배추, 무, 파, 갓, 고추 등의 김장재료까지 보내왔다. 김장재료를 받아 든 완용이는 또 다시 울었다.
고향 친구로부터 따뜻한 응원을 받은 조완용이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했다. 다음 해에는 1억을 벌어서 아들에게 아파트 한 채를 사줬다. 남은 돈을 들고 노상희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곡성으로 출발할 찰나에 또 다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야! 완용아! 나 신삼식이야! 내가 너한테 빌려준 돈 1백만원 얼른 갚아라. 급해서 그래 "
"뭐라고? 나는 너한테 돈 빌린적 없는데?"
전화로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됐다. 노상희 친구가 신삼식, 고경자 친구에게 "완용이가 부도가 나 어렵다고 하니 우리 각자가 백만원씩 내서 완용이를 도와주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조완용이는 3백만원을 들고 친구 세 명을 찾아와 농협이자 5%까지 쳐서 갚았다. 빚을 갚은 그는 친구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한 번은 돈을 빌려줄테니 전화해라"고 말했다.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열심히 일한 조완용이는 현재 경제적 어려움이 없다. 올해 말에는 진정한 친구인 노상희가 살고 있는 곡성의 명산에 살고 싶어서 530평을 샀다. 10월달부터 건축을 시작할 계획이다. "진정한 친구가 있는 곡성 명산저수지 옆에서 벌을 키우며 살다가겠다"고 말한 조완용이 입을 열었다.
"진짜 친구가 내 가족보다 더 좋더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산다. 요즈음 상희 건강이 안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려 마음이 안 좋다"
곁에서 듣고만 있던 조완용 친구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덧붙였다.
"남편 친구분 뒷모습을 바라볼 때 몇 년 전보다 힘이 없어진 것 같아 마음 아파요".
61세에 독학으로 중학교, 62세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패스 한 후 66세에 방송통신대학 졸업 한 친구.
내 친구 노상희. 참 무던한 친구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했었지만 논 한 마지기가 없던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에서 열심히 일했다. 결혼해서 부터 산 논이 현재 40마지기가 넘는다. 학교를 못 다녔지만 책을 놓지 않았던 노상희는 61세에 공부를 시작했다.
혼자서 강의록을 보고 중학교 검정고시를 시작한 때가 61세다. 1학기는 농사철이라 힘들고 바빴다. 농사가 끝난 겨울철이 되면 시간 여유가 있어 공부하기가 수월했다. 1년만에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다음 해에는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딸이 "아빠 고등학교 검정고시 쉽지 않을 텐데요"라고 말했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대학졸업장이다. 그는 63세에 방송통신대학에 도전해 4년 반 만에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해 문학사가 되었다. 그가 늦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공부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는 가난해서 못 배운 게 한이 됐고 둘째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싶어서야"
담소를 마치고 헤어지려는 찰나에 노상희 친구가 "친구들에게 줄려고 가져왔다"며 멜론 한 상자를 들고왔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친구들 자랑을 마친 후 멜론을 측정해보니 지름이 18㎝에 무게가 3.1㎏이나 됐다. 친구에게 "어떻게 멜론을 이렇게 크게 키웠어?"하고 물으니 한 구덩이에 한 개만 놔두고 솎아버린다고 한다. "올해 유난히 더워서 절반은 실패했다"는 친구가 준 멜론 선물이 친구의 우정만큼이나 달다.
요즈음 내 전화속에는 지우지 못한 친구의 번호가 쌓여간다. 나이들었다는 얘기다. 속상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오순도순 가까이 지내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주간보호차량을 타고 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위안이 되는 건 고향에 좋은 친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조건없이 3백만원을 보낸 친구와 27년 동안 쌀 한 가마와 김장재료를 보내는 친구가 있어 좋다. "어려운 친구를 아무 조건없이 도와줬는데 일어선 모습을 보니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 듬직한 고향 친구와 헤어져 여수로 돌아오면서 떠오르는 생각 하나.
"친구들아! 아프지 마라! 그래야 내년에 또 만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