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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탈출해 나가사키로 향한 하멜, 그가 전한 것

나가사키 여행기2] 바다를 대한 두 국가의 다른 시선

  • 입력 2015.05.05 10:27
  • 수정 2015.05.05 10:30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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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지마를 관광하는 서양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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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열린 공간과 닫힌 공간으로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바다를 열린 공간으로 본 선진국들은 바다를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공간으로 여겨 강대국으로 도약했지만, 닫힌 공간으로 여긴 조선은 철저한 쇄국 정책으로 문화적 고립주의에 빠져들었다. 

15~16세기 이후 유럽 각국이 대항해 시대로 접어들어 유럽인들이 동북아시아에 접근하기 시작하자 중국과 일본은 제한적 개방 정책을 진행했지만, 조선은 철저한 쇄국 정책을 고수했다. 결과는 일제 강점기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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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일행을 안내한 기무라씨가 17세기 네델란드 상선모형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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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당시의 데지마 모형물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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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 외국 문물을 접할 수 없었던 건 아니다. 선조 15년(1582년)에 제주도에 도착한 마리이, 선조 37년(1604년) 남해안에 도착한 스페인의 후안 멘데스(Juan mendes), 인조 5년(1627년)에 경주 부근에 도착한 네델란드인 얀 얀세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가 있다. 벨테브레는 조선 여인과 결혼해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후 조선에 정착해 화포 제작에 도움을 줬다. 

유럽 표류인의 네 번째 사례는 효종 4년(1653년) 제주도 해안에 도착한 36명의 하멜 일행이다. 도착 초기에 36명이었던 일행은 굶주림과 전염병 등으로 14명이 죽고 전라 좌수영(12명), 순천(5명), 남원(5명)에 수용돼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 본국으로 돌려 보내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죽을 날만 기다려야하는 한심한 처지를 깨달은 하멜 일행(8명)은 1666년 9월 전라 좌수영을 탈출해 히라도에서 일본인들에게 붙잡혔다가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 1년을 보낸 후 네델란드로 귀국했다. 그가 쓴 <하멜 표류기>는 유럽 사회에 조선을 처음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일본인들이 유럽 문물을 받아들인 창구 '데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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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데지마에 살고 있던 네델란드 관리들이 자신들의 배가 항구에 들어오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지붕위 관측소에 올라간 것을 그림으로 나타냈다. 당시에도 망원경을 사용한 유럽인들을 조선에서는 야만인으로 취급했으니 당시의 조선인들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야만인 취급당한 하멜일행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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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에 사용됐던 시계와 가구들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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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은 유럽인들을 남만인(南蠻人)이라 부르며 야만인 취급을 했다. <하멜 표류기>에  쓰인 내용이다.

"조선의 여인들과 아이들은 우리가 괴물처럼 생겼으며 물을 마실 때는 코를 뒤로 젖혀 마신다고 했다. 양반댁 하인들은 우리를 숙소에서 끌어내 조롱하고 짐승처럼 데리고 놀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이들을 대하는 상황은 어땠을까? 1543년에 일본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을 처음 접한 일본은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와 무역을 활발히 전개했고, 1613년에는 일본 사절단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선진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나가사키 내항 깊숙이 들어가 배가 정박하는 '나가사키 데지마 워프'에서 몇 발짝만 가면 17세기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일본인들과 장사를 했던 '데지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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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델란드인들이 데지마에서 사용한 지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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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는 에도 바쿠후가 1636년 천주교 포교를 막을 목적으로 시내에 흩어져 있던 포르투갈인을 한 곳으로 모아 거주시키기 위해 에도 막부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15,000제곱미터인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이다. 

1639년에 포르투칼인들이 퇴거한 후 일시적으로 무인도가 되기도 했으나, 1641년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이 이곳으로 옮겨진 후 안세이(安政)의 개국 (1859년)까지의 218년간 일본에서 서구를 향해 열린 유일한 창구이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 상관원의 주택이나 창고 등이 있으며 가축을 사육하고 여러 가지의 식물도 심었다. 에도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에 걸쳐 진행한 항만개량공사 등으로 주위가 매립되어 바다에 뜬 부채 모양이 상실되었지만, 일본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한 곳이다.

데지마의 크기는 동쪽과 서쪽 약 70미터, 북쪽은 약 190미터, 둘레는 약 563미터, 총 면적은 1만 5000평방미터이다. 단아한 모양의 일본식 주택과 네델란드식 주택으로 지은 데지마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신학교 건물이 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가재 도구와 유럽에서 가져온 선진 문물들이 전시돼 있다. 

여러 가지 색깔이 들어간 카스테라와 저울, 시계, 지진 측정도구 등도 있다. 심지어 전기를 일으키는 실험 도구가 있었다고 한다. 하멜 일행은 자신들을 야만인이라고 조롱하며 놀리는 조선인들을 보고 속으로 얼마나 한심했을까? 일행을 안내한 기무라씨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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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네델란드인들이 만들었던 카스테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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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는 천주교 때문에 발달했습니다. 당시 영주가 기독교를 허용해 3만 명 정도의 기독교인이 살았습니다. 1860년대 이전에 일본 귀족들은 네발달린 동물들은 먹지 않고 천한 사람들만 먹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서양 음식을 배우면서부터 육고기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데지마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에도 막부 시대(1603-1868) 데지마에 온 유럽인들은 막부를 만나기 위해 166회나 다녀갔지만 조선인들은 12번 밖에 오지 않았다. 결국 일찍 서양 문물을 접한 일본은 새로운 문물과 신무기를 갖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의 쓰라린 지배를 받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상황을 잘 활용해 해양 강국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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