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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일기(17) Y 운동으로의 초대

여수YMCA에서 총무직을 맡다

  • 입력 2016.07.25 18:42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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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윤

자취방 골방생활이 무턱대고 좋은 건 아니다.

그러나 물 설은 객지의 변두리 비탈진 언덕의 외딴 집에 붙박힌 채로, 억압과 지배를 거스르는 가슴속 한낱 반역의 기미조차 감춘 초라한 청년의 입장으로서는, 그러한 골방의 시간이, 붕새의 비상과 같은 정신적 초탈을 기도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터라.

나 홀로 한적하게 골방을 지키고 앉아서, 골똘히 어떤 생각의 실마리를 따라, 과거와 현재, 주제와 소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런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헤쳐 넘나드는 재미 또한 쉬이 싫증나는 습벽만은 아닐 터.

텍스트와 콘텍스트 간의 밀밀한 대화의 흐름을 타고서, 언어적 표명과 행간의 묵시 속을 누비며, 유명(有名)과 무명(無名)의 현현(玄玄)한 교직을 발견하고 해석해내는 즐거움이, 사람들을 만나고 떠들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하여, 골방생활이란, 좁은 방안에다 커다란 상을 탁자처럼 펴놓은 위에, 가지가지 책들과 필기도구들과 찻잔과 그리고 유사시 접선을 기도할 전화번호들이 너저분하게 펼쳐진,

나만의 공간과 시간, 나만의 자유를 한정 없이 허용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기도를 하건, 명상을 하건, 독서를 하건, 그런 건 문제가 안 된다.
그나마 시샘하는 자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지금은 모 대학의 교수로 있는 은 선배가, 마침 한가로운 뱃고동 소리가 낮의 단잠을 깨우는 항구의 도시 여수의 어느 퀴퀴한 골방에서, 내가 독방이 주는 자유의 묘미에 젖어들고 있을 때, 다짜고짜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여수 와이의 총무로 일하고 있었던 은 선배는, 매우 단호한 어조로, 와이에 들어오라고, 함께 일하자고, 월급 20만원 줄 거라고, 새로 지은 건물에서 멋들어지게 한번 일 해보자고, 꼬드겼던 것이다.

1987년 유월 항쟁이 있었던 그해 말쯤 이었겠다.
유혹이 되었다. 그러나 하고 있는 일을 핑계로 사양했다. 아직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기회비용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므로.

말의 씨가 남긴 위력이 상당했던가, 결국 이듬해인 88년도에 순천 와이 간사로 취직했다. 월급은 34만원이었고, 당시 그 지역 간호사 급여가 46만원, 일반직 급여들이 대충 70-80만원 정도였던 것에 비교하면, 운동하는 활동가의 급여로는 그 정도로도 호사였다.

이래일 총무님은 나보다 딱 스물이 많으셨다. 와이의 운동적 경영적 기반을 비교적 탄탄하게 구축하고서 의욕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계셨을 터였다. 한창 청년의 시절, 스물하고도 아홉의 나이였다.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그해 88년은 개인적으로 내게 변화가 많았던 해로 기록되었을 터다.

ⓒ 김자윤

그 이듬해인 89년도에 나는 은 선배의 사정으로 공석이 된 여수 와이의 실무 책임자로 갔다.
그때부터 1994년 말까지, 여수 와이의 총무로서 일했던 만 6년의 기간, 거기에 95년 말 귀농 이후의 한두 차례 더 순천과 성남, 남원을 오가는 출행까지를 포함한다면, 약 8년의 기간이 나의 본격적인 대중 운동의 시기를 가름했다.

지역운동과 주민운동, 지방자치와 생활세계 운동, 환경, 생협, 소비자, 반핵 반원전 운동, 교육, 청년, 노동, 농민 운동과의 연대활동에 이르기까지, 와이운동의 스펙트럼은 그야말로 무지개색깔처럼 다양했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잘하면 백화점, 잘못하면 잡화점 같은 잡식성 운동이라 할 만한.
그런 까닭에, 중심을 잡고 주변을 통섭하는 일을 능기로 하여, 일과 사람의 근간을 붙들어서 폭과 깊이를 통찰하고 조절하는데 혹여 실패하게 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인 것이 또한 와이의 일이었다.

그러한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간사(幹事)’란 무엇이던가?
말 그대로 “일의 줄기를 붙들고, 가닥을 추리는 이” 아니던가.
간사 직을 수행하는 나날이 그동안 쌓아온 나의 내공과 외공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실현하는 시기였음은 분명한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들과 이슈들의 한 복판에서 이를 추스르고 해결하는 일이 활동가의 일이다. 디딤돌을 건너듯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다니며, 관계와 관계 사이를 조정하고 도모하는 것이 활동가의 일의 몫이다.

문제가 있는 곳에 그 문제의 답이 있게 마련일 터,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데에, 바로 활동가의 보람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과 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망하게 뛰어다니다보면,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되기 십상이다. 현상의 세계에 압도당한 세월의 길이가 오래다보면, 나의 ‘내면’과 직접 대면하여 대화하고, 성찰하는 여유를 잃어버리기도 역시 쉬울 것이다.

자아를 밖의 세계와 동일시하는 습관이 계속되다보면, 내면의 자아가 ‘소리’를 지를 때가 있다.

극단적인 소외감과 상실감에 항변하는 자아의 신음소리를 들을 겨를도 없이, 소용돌이쳐오는 문제들 속에 빠져서 일상을 끝없이 헤메다 보면, 몸이 아파오기도 하고, 마음 또한 평온과 행복의 뒤안을 떠돌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계속되는 몸과 마음의 신호음을 무시하고 외면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판사판(理判事判)”이라는 말이 있다.
도(道)판에서 항용 쓰이는 말이다. 자기 수행의 도리를 말해 ‘이판(理判)’이라 한다면, 수행자의 수행력을 중생을 향해 돌려준다는 의미로 쓰는 ‘회향(回向)’은 사판(事判)이게 된다.

자신의 깨달음을 내면화한 도리를 다한 수행자를 ‘이판승(理判僧)’이라 하고, 그러한 깨달음의 바탕 위에서 깨달음의 열매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나눔의 도리’를 수행하는 이를 일러 ‘사판승(事判僧)’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판승이란 말은 비난의 대상을 일러 쓰는 말일 수 없다. 그리고 사판승의 전제로 다는 말엔 반드시 이판의 자격을 갖추어야 함을 내포하고 있게 되는 것이니. 사판승이란 존경의 대상으로 흔연하고도 무게감 있게 쓰여 지는 도리를 암묵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성서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는 없다”는 말로 ‘이판사판(理判事判)’의 도리를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에너지(사랑)와 지혜가 대중에게 회향할 수 있기에 충분하지 않는 자의 지도력으로 누군가의 길을 안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지 않겠는가.
글자 그대로 이판사판 공사판이 되어버릴 게 눈에 불을 보듯 뻔한 데 말이다.

ⓒ 김자윤

와이에서 간사란 예수의 제자 된 사람이다. 제자는 스승의 모습을 닮아있게 마련이고, 스승의 길을 가야되는 도리를 몸소 행하기로 서원한 자이다.

나의 간사 시절을 돌이키는 것으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는 바, 프로그램(일)을 만들고 운영하고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일로써 제자 됨의 소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제자는 이제 스승으로서 오롯이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승의 길, 그것이 제자의 길이 된다.
세상의 어느 스승도 스승의 제자였다. 그리고 제자의 제자의 제자는 끝없는 스승의 길을 간다. 바로 그런 점으로부터 나의 간사 시절을 회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야 짐짓 깨닫는 스승과 제자의 도리를. 이판, 즉 사판의 도리를.

나의 몸과 마음이 쉴 곳이 없는데 어느 누가 와서 내게 ‘쉼’을 구하겠는가?
나의 몸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나의 마음조차 욕망과 분노의 파도에 휩쓸리는 터에 어느 중생의 마음에 위로가 되어줄 수 있겠는가?

세상의 길을 안내하는 스승이 된다는 것은, 그러므로 먼저, 자기 자신을 여미고 깨닫는 도리를 잊지 말아야할 것 같다.

“길을 가는 데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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