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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꼬인 사태...보리, 1999년

  • 입력 2016.10.12 12:29
  • 수정 2016.11.04 08:54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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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일기(5)

ⓒ 김자윤

산다는 건 어떻든 간단치가 않다.

시작한 지 얼마 되잖은 유정란 농장의 일만해도 그렇다. 산 좋고 물 좋은 건 누구에게나 다 좋은 거겠지만, 기실 먹고사는 문제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청산에 사는 복을 시샘할 자 누구 있으랴, 흐르는 물 앞에 서면 누구든 따라 흐르지 않을 쏘냐. 청산유수를 벗하고 살기엔 청빈만이 살 길이로되, 귀여운 새끼들 한둘이라도 옹알옹알대며 주렁주렁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있으니, 짠한 마눌의 끼니 걱정에 숨죽여 내쉰 한숨소리라도 귓바퀴에 구르는 날엔, 머슴아 가장으로서 목전의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한 존립의 기로에서 이 한 몸 '목심을 건 생존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터.

예전의 생협운동의 가락을 살려 시작한 유정란 농장은 그 중 찾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을지도 몰랐다.

상표 쪼가리엔 ‘농부가 된 환경운동가’의 사진이 촌스럽게 박혀 있다. 광고 일선에 표지 디자인으로 찍힌 암탉은, 물론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병아리 떼를 앞서 종종종 걸음하고 있다.

거기엔,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베개 삼아, 황토흙 속에서 목욕하며, 녹색의 들풀을 제멋대로 뜯어먹고 낳은 ‘야생유정란’이, 짚으로 만든 꾸러미 속에 소담스레 포장되어 있었고.

하아, 그림 좋군! 이 정도면 문명사회의 고급 소비자들의 입맛을 돋구는데 전혀 문제가 없겠는 걸,

생산으로만 말하면, 지네들이 알아서 꼬박꼬박 잘 낳아주니 걱정을 붙들어 매어둬도 되겠다. 그러나 창업 초기라, 판매가 눈앞에 닥친 급한 문제였다. 언제까지 ‘산중에까지 들어와서’를 뇌까리고만 있을 수 없다.

결연한 태도로 마케팅 전선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속다짐을 거듭했다. 왕년 한때엔 어깨띠를 두르고 대학가 거리 홍보전에 투입되었던 적도 있었지 않았던가.

예전의 인맥들을 주욱 훑어봤다. 지금은 연락조차 끊긴지 오랜데..., 그렇다고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잖는가,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고말고.

결벽증을 내세울 건덕지도 없는 주제에 이런저런 상념이 고개를 쳐드니 한참을 망설인다.

에라이 모르겠다. 어제와 오늘, 연거푸 밀린 닭알의 재고 청산을 위해, 지난 시절의 동지들한테까지 급기야 구조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다행히 쌓인 닭알을 배달해 달라는(옛정을 참작했을 것으로 사료되는) 오더가 몇 군데서 떨어졌고, 나는 비로소 기침을 해서, 가까이는 순천, 여수, 광양으로부터 멀리는 마산, 창원까지 남도를 한 바퀴 순회할 거리를 소화시키며 장거리 운전을 다녀오게 되었다.

온종일 낯선 도시와 사람들과 부댖끼다 산골마을에 돌아오니 마을어구에 있는 표지석도 반갑다.

피로하긴 했나보다. 바깥나들이가 간혹 즐거울 때도 있다. 그런데 판매행각 차 나선 발길이란 왠지 찜찜하다. 그러니 안팎으로 피로감을 더한다.

방구석에 들어서자마자 지친 몸뚱아리 아무렇게나 누인다. 허망한 시선으로 멀찌감치 방바닥에 놓인 접시 하나 들어온다. 누군가 먹다 남긴 참외 몇 조각, 칙칙한 느낌이 왠지 불길했지만 생각없이 한두 조각 베어 물었다.

하루 종일 고생한 나의 육신을 위로라도 할 겸 뭐든 먹어줘야 된다는 일종의 통념, 아마 생존 본능의 발로였을 것이다.

ⓒ 김자윤

그로부터 몇 시간 되잖았을 것이다. 마른하늘에 왠 날벼락일까, 별안간 아랫배에 숨 막힐 지경의 불길이 치솟고, 남태평양 어딘가에서 휘몰아쳐 올라온 듯한 복풍이 돌바람처럼 창자를 긁어 발기기 시작했다.

그저 잠깐 만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신은 아득하고 인적은 간 데 없는데, 무념무상 통각삼매지경을 얼마나 헤매었을까.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고독한 실존에 몸부림치던 그 절통지경에도 틈을 내었으니, 광주에서 내과를 하는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피차 평소엔 연락조차 안 하고 사는 사이라곤 하나 급할 땐 친구가 제일이다.

이 친구, 그런 경우엔 영락없이 둘 중 하나, 라고 못부터 박는다. 화장실을 갔느냐, 갔는데도 안 나온다, 그러면 필경 장폐색일 개연성이 높다. 당장 큰 병원엘 가라, 시간 끌다간 큰 코 다친다!

우리 성질이, 어지간해선 병원 문턱도 밟기 싫어하잖여, 내 병원이라고 생긴 것을 맨 처음 가본 것이 아마 대학교 다닐 때나 되었을 것이었다.

여름날 이층집 주방 안쪽에 자리한 그 방이 그땐 지독하게 더웠던 모양이다. 더워서 유리창을 떼어내려다 안 되니까, 확 잡아채었지. 눈 깜짝할 새에 갈라진 유리창이 내 가여운 팔뚝에 걸려있었어. 엉겁결에 보았는데 글쎄, 잘려나간 알통이 팔 아래쪽으로 불룩 튀어나와있지 뭐야. 생전에 처음 병원신세를 지고서 무겁게 기브스를 한 팔을 달반이나 목에 걸고 다녔다는 거 아냐.

아래로 새어나오지 못할 것들이 속에서 틀어오른다. 창자를 끊어놓을 듯 극한의 통경을 반복해대니 천하장사라도 몸부림치지 않곤 못 배겼을 고통의 나락 속에서 헤매었다. 그렇게 온갖 짓을 다 경험해가며 내리 삼일 낮밤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는 지경에야, 암환자들이 맞는다는 마약 진통제를 맞고도 삼십 분을 넘기지 못하는 극악한 고통의 동굴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나의 정황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다록과 빈목이라고 어찌할 구원의 책략이 있었겠는가.

앉지도 서지도 못할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일찌기 침술만큼은 강호에 맞설 상대가 없다는 허명을 달고 있는 다록의 아우의 취중 침술도, 한때 서울 변두리 빈민촌을 누비며 틈틈이 익혀서 기술만큼은 남다르다고 호언하며, 뜸과 침으로 농민구제의 때를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던 빈목의 득의만만한 좁쌀뜸 시술도,

일각에 혼절한 장문인의 안타까운 비보를 접해 듣고, 오밤중을 마다않고 한걸음에 달려온 여수의 지인, 치과 원장과 스포츠 마사지 기술자 김씨의 사력을 다한 파워 안마도,

의리면 의리, 책임이면 책임으로 완벽히 무장한 건달들과 그의 친구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상황이 좋아질 수 있다는 한 오라기의 희망도 찾을 수 없게 되자, 이제 다른 대안은 없었다. 응급실로 가는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는 장문인의 엄중한 판단에 따라!

응급실에 접수하고 나서도, 병원이 할 수 있는, 이를테면 수술을 피할 수 있는 혹시 가능한 어떤 방도가 있을까, 그 경우의 최선을 탐색하느라, 갖은 검사들을 견디다가,

“피할 수 없으면 부딪쳐라!”는 지혜의 경구가 헛헛한 장문인의 뇌리에 되새겨졌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정해진 수순대로 수술대 위로 신속하게 옮겨지는 것이었다.

장이 꼬였다고도 하고, 막혔다고도 했다. 그대로 하루 이틀만 방치했다면 이넘의 장이 썩을 대로 썩어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 김자윤

배 위아래에 불로 지진 뜸자국이 흔연한 걸 발견하고서, 환자와 보호자의 낯짝들을 찬찬히 뜯어보는 담당의사의 눈빛에선 눈앞에 보기 드문 어떤 야만인을 보는 듯, 야릇한 낌새 하나 스쳐 지나갔다.

마취제를 놓는 듯 어둑한 방구석에선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수선대고 있었다. 허물어져가는 의식의 뒤통수에 익살맞은 표정의 소리들이 앵앵거렸다.

배가 온통 상처투성이라, 이리 가를까, 저리 가를까, 살짝 돌려 째지 뭐. 지들끼리 아무렇지도 않게 수군대는 소리들만 잠들어가는 내 무의식의 귓전을 떠돌았다.

멈추어버린 의식 저편으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보인다. 눅눅하고 칙칙한, 무형상 속의 형상 같은 그림자, 사위스런 공기를 가르며 가믈한 저 무의식의 깊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무엇인가. 또 다른 나의 그림자인가. 그 그림자를 흐릿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자는 또 누구인가.

아스라한 빛이 엷은 미소처럼 그림자를 비추기 시작한다. 저 빛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림자를 따라 무겁고 칙칙하게 엉겨 붙어 있던 안개의 자취도 사라진다.

마치 밝음이 그 안에 어두움을 포옹한 듯, 새벽의 미명이 의식 저편에서 나를 손짓하고 있는 듯, 바랜 갈옷을 입고서 가슴 속엔 휘황한 옥을 품은 듯, 캄캄한 방 한 가운데 비추인 한 줄기 빛이 티끌과 하나 되는 듯, 봄을 맞은 계곡의 물소리가 겨울의 얼어붙은 대지를 흘러 적시는 듯,

황홀했다.
밝은 의식의 빛이 나의 혼을 깨우고 있었다.
어두운 기억은 점차 사라져 갔다.
이제부터는, ‘보리’로 살아야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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