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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넋두리

  • 입력 2016.12.16 16:17
  • 기자명 장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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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생의 기본 빛깔은 슬픈 색이 아닐까? 인생은 아름답지만 슬프고, 슬퍼서 더 아름답다. 그런 가운데 나이가 들어가며 모든 걸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슬픔을 슬쩍 덧칠하는 거나 같다.

그 붓 자국이 아름다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이 정도가 되면 슬픔은 그림자도 깃들 수가 없다. 진실로 스피노자의 확신이 부럽다. 며칠 전 친구는 술잔을 거푸 비우며 생각없이 살아온 우리 자신들을 비웃었다. 아니 그게 비웃음이었는지 생각 없이 살아도 큰 죄짓지 않고 사니 대견하다는 칭찬이었는지 분명치 않다. 그래도 자꾸 어깨가 움츠려드는 것은 세상의 힘의 관계에서 절대적 열세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정치인들은 죽일 놈들이고 더러운 놈들이지만 하늘같은 건방을 떨며 산다. 잘난 모든 이들이 그 유치한 놈들 앞에서 고개를 꼬고 비위를 맞춘다. 그런 건 옛날부터 그래 온 것이 아닌가. 사람이 정치란 걸 필요로 한 이래로 계속 그래 왔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요즘처럼 정치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조영해 볼 수 있는 것도 드물지 않는 것이다. 그래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도 그것을 곱씹어 가면서 나도 정치인이 되어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더러는 그 죽일 놈이고 더러운 놈들을 안주 삼아서 부지런히 술잔을 기울이면서 살아보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색깔을 바꾸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도 아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세상은 단세포동물이 지배해버렸다. 그 동물들과 싸우는 것이다. 청와대가 단세포동물로 차곡차곡 전이되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한껏 허망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셈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것이 내 땅에서 일어난 나의 문제였다. 어릴 때부터 골수까지 박히게 들어왔던 이야기들은 ‘때려잡자 ㅇㅇㅇ’하는 구호들 거리마다 빨간글씨로 도배해놓은 반공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 것들이 커가면서 얼마나 허망한 것을 붙잡는 헛그림이었는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치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절망감, 그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허망한 것이었는가. 육십이 넘은 저 처녀 대통령이 단세포동물의 괴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또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달라져 있다. 밤새 뭔가 새로운 유치함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얼마나 달라져 있는 것일까. 달라지는 것도 없으면서 들려오는 소리는 단세포동물의 생존 투쟁이다. 그래도 나는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은 분명한데 들려오는 모든 것들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져 있는가. 다시 한번 곱씹어보면서 하루를 새롭게 또 맞는 것이다.

그렇다 환부는 충분하게 곪아야 한다. 그리고 확실하게 치료해야 한다. 뿌리부터 도려내야 한다. 모르는 것이 병이요. 알게 되는 순간에는 무섭지 않다. 우리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치유법이 있다면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치료법이 있으므로 그 때부터는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상황은 곧 생명으로 환원이 된다. 환부는 갈수록 깊이깊이 곪아가고 우리는 그 환부의 고통을 끊임없이 체득하고 있다. 아침마다 고통의 목소리를 내지른다. 어느 순간이면 확실하게 도려내는 꿈을 그린다.

광화문 광장, 서울시청 앞, 광주 구도청 광장 등 전국의 여기저기를 비쳐주는 화면은 참으로 대단한 활력이다. 하얀 까운을 입고 매스를 들고 나서는 저 대중들의 시술의 행보에 삶의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 진리를 보면서 나는 하루의 활력을 찾는다.

주식이 곤두박질 치고, 해외 투자자들이 발길을 돌린다고 한다. 그리고 경제사정은 자꾸 악화일로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늘 그런 것들에 서둘러 양보해왔다. 그

리고는 그것이 참으로 대단한 미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곧잘 후회하면서도 세끼 밥을 위해서 선택해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곧잘 저 더러운 놈들을 욕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그림이었는지. 주식이 곤두박질 치고, 해외투자자들이 발길을 돌려도 내 세끼 밥상에 올라는 오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우선 급한 것은 내 환부를 통해 들어오는 고통의 것들 그리고 장래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이 고질의 병이 주는 두려움이 더욱더 고통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서 배우는 것은 ‘아하 이런 것들이 인생이었어’ 하는 말에 곱씹어 다시 되새김해본다. 정도와 품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이란 늘 모순과 함께 살게 되어 있다.

내 몸의 면역이 나의 건강을 지켜주듯이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면역이 우리를 그들과 싸우게 만들고 건강하게 지켜준다. 좋은 날엔 조용하고 싶다.

웃으면서 비껴서고 싶다. 비껴선 내 길을 가고 싶다. 그러나 좋지 않은 날이라고 하는 순간, 좋은 날을 향한 그리움으로 오늘을 나서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 좋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화문 앞에 가서 하얀 까운을 입고 매스를 들고 나서볼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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