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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에 일제 강점기 여수 군사시설을 짚어보다

우천으로 '답사'대신 주철희 박사 강의로 진행

  • 입력 2017.08.16 06:24
  • 수정 2017.09.23 05:55
  • 기자명 전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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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여서동 여수지역발전협의회 회의실에서 강의를 하는 주철희 박사

해방 72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여수의 군사시설을 짚어보는 의미있는 8.15기념 강좌가 있었다.

'여수역사바로알기 시민모임'에서는 해방 72주년을 맞아 지역행사가 전혀 없어 일제강점기 여수의 군사시설 답사를 기획했다.  비로 인해 강좌로 대체했다. 이 강좌는 지난 15일 오후에  두시간 동안 여서동 여수지역발전협의회 회의실에서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가 맡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여수를 말한다>의 저자다.

'광복'의 날보다 '해방'이 더 적합
먼저 주철희 박사는 8월 15일은 광복보다 해방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며 명칭에 의문을 제기했다. ‘광복’은 빛을 되찾았다는 뜻이지만 실제로 한국이 주체적으로 일본에서 벗어나지 않은데다 분단이라는 아픔이 연이어 닥쳐왔기 때문에 온전하게 나라를 되찾았다고 보기는 어려워 이 표현에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에도 모두 해방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헌법 역시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시정부의 정통을 이어받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1948년에는 ‘임시’라는 단어를 지우고 정식정부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1919년 임시정부가 진정한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주철희 박사는 광복절의 명칭이 생긴 이유가 1948년 이승만이 독립유공자 법을 지정하면서 광복군을 근거로 스스로에게 상을 주며 ‘광복절’이라 칭한 것이 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주철희 박사의 저서 <일제강점기 여수를 말한다>

여수에 남아있는 아픈 역사의 잔재

주철희 박사는 일제강점기 여수의 상황을 설명하며 현재 남아있는 여수 곳곳의 일제 잔재를 하나하나 짚어갔다.

1930년 여수에서 광주를 잇는 광려선(전라선)이 개통되었다. 당시 여수에서는 조선 면화생산의 60%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광려선은 사람을 태우는 용도가 아니라 면화와 쌀을 수탈하기 위한 도구였다. 

특히 마래터널은 조선인과 ‘꾸리(苦力)’라 불리며 조선에 강제로 끌려온 중국과 만주 노동자들의 산물이었다. 일본은 조선은 미개하다고 주장하며 수탈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1897 독립신문에 이미 전남에 해산물 회사가 설립되어 있다는 기사가 실려있을 정도로 발전된 곳이었다

아름다운 오동도와 돌산 역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과거 여수의 채석장 두 곳은 현재 오동도 앞과 돌산 우두리 절벽이다. 이곳에서 채석을 하여 방파제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중국인과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특히 레일바이크 출발지점 근처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뼈가 묻어 있다. 그당시 벌교에는 약 3천명의 중국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신월동 역시 일제시대에는 해군202부대와 군수품 공장이 들어서 있는 항공기지였다. 일제강점기 전국적으로 비행장이 많았지만 수상비행장 활주로는 여수가 유일하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풀이 우거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다. 여수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1931년 일제가 전쟁을 시작하며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축출되었다. 당시 480명 중 전라남도가 108명으로 가장 많이 축출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군수품을 모으기 위해 놋그릇을 마을마다 걷게 하거나 관솔 기름을 얻기 위해 어린 학생들이 산에 가서 솔방울을 채취하도록 시켰다.

호남장례식장 지하벙커 역시 해안관측소 및 포대진지로 추정되며 여천초등학교 근처에도 임시 자하벙커가 있다. 이곳은 흙을 덮어 마치 산 밑 지하벙커처럼 위장하였다. 현재 물탱크와 물을 공급할 흔적 등이 발견되었지만 여수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현재 천사벽화 근처는 오포대라고 조선시대에 정오를 알리는 포를 쏘던 곳이었다. 오포대에 설치된 조공등은 여수시내의 모든 관측을 알려주던 일종의 서치라이트이자 군사시설을 감독하던 곳이었다, 이런 장소는 여수 시내에 오포대 딱 한 곳뿐이다. 

주철희 박사는 조금만 노력하면 이 시설들을 보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편의 훌륭한 스토리텔링으로 여수의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부터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기까지의 역사를 설명하는 주철희 박사

“역사를 바로 보는 안목을 길러야”

주철희 박사는 강의를 하는 내내 “역사를 글에 적힌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볼 수 있다”고 말하며 스스로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본은 전쟁에 항복하며 한국과 대만을 침략한 이유가 영토침략과 주권침탈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으며, 당시의 이 주장은 현재 일본이 한국에 전쟁배상과 사과를 하지 않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이는 곧 독도문제로 연결된다. 

주철희 박사는 우리가 우리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다시 깨달아야 한다며 도시재생의 근본 역시 역사인데 우리는 '도시 재생'을 역사의 흔적을 없애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한국의 교육은 한국이 외세를 침략한 적 없다고 가르치지만 고려가 명나라 요동지방을 공격한 요동정벌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같은 역사를 과장없이 가르치는 것이 역사를 바로 아는 첫단계라는 말과 함께 강의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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