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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에서 풀 뜯던 마지막 소

꽁트식으로 풀어쓴 소에 대한 추억까지

  • 입력 2018.01.14 20:42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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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배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구봉산자락은 풀을 뜯는 소들로 가득했다. 북쪽의 50여 호 남짓한 대치마을 만해도 농가의 필수 자산으로 집집마다 소를 길러 전체 60마리가 넘었을 정도였다.

소를 이용해 농사지을 일이 없어진 현재(2017년)는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다.

필자는 2~3년 전 초여름 텃밭을 가꾸던 구봉산 뒷들에서 풀을 뜯는 ‘워낭소리’를 들었다.

당시 함께 한 여름을 보내면서 그들의 생명과 행복에 대한 애절한 소망의 ‘워낭소리’를 마음으로 들었기에 <여수넷통뉴스>독자들과 추억을 나누고자 한다.

풀 향기로 가득한 2015년 초여름 대치마을 큰터골 뒷들로 내려가는 나를 누가 부른다. 연신 꼬리와 귀를 털어가며 풀을 뜯고 있던 새끼를 거느린 암소 한마리가 송아지를 부르는 워낭소리였다. 아침 일찍 주인이 묵정밭에다 풀을 뜯으라고 긴 고삐로 묶어 놓고 간 것이다. 풍경 안 달린 소울음 워낭소리였다.

나는 이 소를 만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눈 대화를 요구하며 멈춰서기 시작한 지가 십 수 일이 되어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그렇지만 정작 가까이 다가서면 아직까지 그것만은 허락을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두르며 물러서 버린다.

  ⓒ 김자윤

내가 처음 이 녀석을 만났을 때 수십 년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래서 대뜸 다가서려 했으나 여 나문 발치서부터 경계하는 몸짓으로 머리를 돌려 거부해버렸다. 그런 녀석이 서운하였지만 새끼 때문에 경계해야 하는 본능적 행동으로 해량했다. 내가 어렸을 때 여름이면 날마다 하천변이나 산비탈로 소를 몰고 다니며 풀을 뜯기러 다니던 그때만을 상상하고 녀석이 나를 친구로 덥석 받아줄 것이라 착각과 조급했음을 뉘우쳐야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녀석은 만날 때마다 중얼중얼 인사를 나누어 얼굴을 익히고 가끔씩 한 낮이면 통에 물을 떠다 머리맡에 놓아 주고는 쪼록쪼록 소리가 나도록 말끔히 마시는 것을 지켜보며 친구사이로 만들어 나갔다. 그래서 암컷이니 ‘우순이’라 이름도 지어줬다.

그러는 사이 달포가 지나자 점점 신뢰가 쌓여 이제는 가까이서 마주 보아도 우순이와는 얼굴을 돌리지 않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우순이 앞에 걸음을 멈추고 깜박일 줄도 모르는 커다란 눈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네자 표정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이다. 무겁게 희푸른 깊은 눈망울 속엔 반가움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반갑다 우순아! 그런데 네 얼굴을 자세히 보니 어쩐지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해 보이는 구나”

파리를 쫒으려고 쉬지 않고 좌우로 꼬리를 후리며, 두 귀는 귀대로 끊임없이 털어 대던 그가 못 참겠다는 듯 머리를 한차례 크게 휘젓고 나더니 다시 눈을 맞추며 마치 무슨 말씀이냐고 묻는 듯 고개를 들었다 놓았다.

“네 얼굴이 깨끗하여 미녀로 보이기는 하다마는 눈에 익었던 코뚜레가 없으니 옛날에 보던 소들이 아닌 것 같구나! 그리고 귀에 달고 있는 노란표찰의 ‘88949’라는 번호는 또 무엇이냐? ” 

혼자 중얼거리니 그때 뒤쪽풀밭에 숨죽이고 앉아 있던 새끼가 궁금하다는 듯 제 어미 곁으로 다가와 엉덩이를 기대고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석 달 남짓 되어 보이는 새끼의 귀에도 역시 ‘05562’라는 번호표가 달려 있다. 궁금증을 알아챈 우순이가 대답했다.

“우리도 나라에서 관리하고 도와준다고 달아준 주민번호랍니다. 세상이 변했지 않아요.”

그래 너희들은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 옛날 조상세대들과 달리 코뚜레를 벗어버려 정말 행복하겠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표정을 흐리더니 측은한 눈빛으로 젖먹이를 돌아보고 나서는

“저 녀석이 몇 살까지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되물어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나에게서 말한다.

“요사이는 또 달라진 것 보이지 않나요?” 하고 내게 묻는다.

“글쎄…”

“목에 달려 늘 맑은 소리를 들려주던 풍경(워낭)이 사라지고 없지 않아요?”

“참 그걸 미처 생각 못했구나!”

“아저씨는 우리들의 행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우순이는 계속 말한다.

   ⓒ 김배선

“코뚜레가 우리들에게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면 풍경은 우리들의 생명의 소리를 내는 목 방울이랍니다. 코뚜레를 두고 사람들이 소들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 자유를 빼앗으려고 고통의 수단으로 만들어낸 잔인한 도구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코뚜레는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통을 주는 도구가 아니랍니다. 단지 맨 처음 불 꼬챙이로 코를 뚫을 때 잠시 사람들이 귀걸이를 달기 위해 귀 볼에 구멍을 뚫을 때만큼 따끔한 아픔을 느낄 뿐 시간이 지나면 굳은살이 박여 고삐를 당겨도 실상은 별로 아픔이 없는데 사람들이 무지하게 아플 것이라 여길 뿐 이지요.

다만 우리들이 가끔씩 딴 짓을 할 때 주인이 바로잡기 위해 끌어당기면 아픔보다는 힘을 못 써 끌려가게 되는데 그때마저 억지를 부리려고 하면 조금은 아프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코뚜레와 함께 사라져 버린 워낭은 우리들이 움직일 때마다 살아 있다는 알림소리를 내라는 종지기 풍경입니다. 새벽에 주인이 여물을 주려고 소죽부엌에서 부스럭거리면 어느새 알아차리고 고개를 휘저어 딸랑거리고 저녁에 치깐을 가려고 댓돌을 내려서면 네 다리를 펴고 앉아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소리를 내죠.

일을 하다 잠시 쉬라고 풀어 놓으면 시야를 놓칠까봐 위치를 알리려고 끊임없이 딸랑대고 혼자서 길을 잃어도 걱정할까봐 어김없이 잰 걸음으로 찾아 들죠. 골목길에서부터 안심하라고 힘차게 흔들어주는 생명의 소리개인 것이죠. 

그러므로 코뚜레와 워낭을 떼어낸 것은 억압의 고통을 없앤 대신 생명을 빼앗아 버린 거나 마찬가지랍니다. 코뚜레를 벗은 대신 우리들이 치른 대가는 최소한 우리들 생명의 3/4과 바꾼 것이라 보면 됩니다.

우리들에게 코뚜레를 벗기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조상 할머니들은 대대로 장수집안으로 이십년 이상의 천수를 누리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의 평균수명을 십오 년이라고 말들 하지만 청정한 곳에서 자연식을 하며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조상들은 대부분 20년은 사셨으며 30을 넘기신 분도 계셨으니까요. 아마도 주인님들의 사랑 때문이었을 겁니다.

멍에 매단 쟁기나 수레를 끌며 가끔씩 힘에 부칠 때면 코를 땅에 박고 숨 가쁘게 푸~우 푸~우 침을 흘릴 때도 있지만, 이랴~ 랴 랴 랴, 워~워 할 때마다 힘을 내어 워낭소리로 답을 했고, 지칠 것을 염려한 주인이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때면 멍에를 목 등에 얹은 채로 눕혀 놓은 쟁기가 다칠까봐 네다리로 가만히 서서 숨을 돌렸으며, 더 쉬고 싶어도 ‘오늘내로 이 배미까지는 마쳐야겠다’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짐작으로 알아듣고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죠.

 

쟁기질 써레질 농번기에는 해거름까지 지쳐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도 쟁기 짐을 짊어진 채로 고생했다고 쓰다듬는 손길에 피로가 다 풀려 버렸지요. 더불어 농한기에 저 우심이 같은 새끼라도 순산할라치면 온 동네를 자랑삼는 애지중지 보살핌에 세상을 독차지하는 행복을 누리기도 하였답니다.

내 자식인 저 녀셕은 대여섯 달 후면 새 주인을 찾아 팔려 갈지도 모르는데 나만큼만 좋은 주인 만나기를 바라고 간절히 기원합니다. 가난해도 좋으니 제발 농사나 새끼벌이를 하는 집으로 가기를 말입니다.

나는 지금 세 살을 막 넘었는데 저 아이가 첫딸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낳고 일곱 달이 되었을 때 주인이 나를 보고 ‘요놈 참 잘생겼으니 키워서 새끼를 내야겠다’고 팔지 않았답니다. 참말로 팔자 좋은 행운이었지요.

   ⓒ 김배선

우리 집 이웃에는 친구들 10여 두가 모여 사는 농장이 있어서 갸들은 날마다 풀밭으로 나가는 나를 보고 부러운 눈빛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언젠가 한번 그 녀석들이 사는 축사를 넘어다 봤더니 사료들이 높다랗게 쌓여 있고 우리 집에 비하면 호텔 같았지만 각자의 공간은 겨우 몸만 들어갈 정도로 칸칸이 막은 파이프 사이에 묶여 긴 구유를 향해 나란히 머리만 내밀고 몸을 돌리지도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대부분 나보다는 어린 나이인데 번들번들 살은 쪄 보이지만 머지않아 하나 둘 고깃 감으로 팔려 갈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솟으려하는 걸 참느라 애를 썼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백정이 와서 몰고 가려고 하면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렸다는데 요즈음의 소들에게야 언제 영감이 쌓일 틈새나 있겠습니까. 그저 가면 가는가보다 그러면서 실려 가겠지요.

모르기는 해도 어차피 인간들을 위해 바쳐야 할 몸. 모르고 가는 것이 행복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불현듯 열세 살 때, 50년 전에 친구 정길이네 소를 파는 광경이 따올랐다.

흥정이 끝나자 정길이 아버지가 마당 가운데 매 놓은 고삐를 풀어 소장수에 건네주고는 오래토록 정든 소가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어서인지 돌아서버렸다. 그러자 소가 애원이라도 하는 듯 크게 한 울음 하더니 당기는 고삐에 저항하며 발을 떼려 하지 않다가 고삐 당기는 힘에 하는 수없이 끌려 나오는 소를 바라봤다. 누군가 ‘저 소 우는 거 봐라’ 하고 소리를 쳐서 모두가 비켜서면서도 소의 눈으로 시선이 모였는데 정말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짠하고 콧날이 찡 했다.

우순이의 얘기가 계속 이어진다.

“우리들의 상징이던 코뚜레를 꿰고 사셨던 우리 조상들은 정말 귀한 대우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한 행복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요. 요즘으로 치자면 경운기와 로터리를 합친 것보다 나은 재산이었지 않아요. 그런데 고기 값이 폭락하면 손수레 값만도 못한 처지가 아닙니까?

우리 소들의 가치를 살집의 질량이 최상인 시기를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어 목숨을 빼앗겨야 하는 우리들로서 어떻게 코뚜레의 작은 고통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때때로 비뚤어진 길로 들어서지 못 하게 하는 코뚜레가 참기 어려운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 일의 값에 대한 무한의 애정과 함께 행복을 누리며 살만큼 사는 시대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두말없이 받아들이겠습니다.

   ⓒ 김자윤

자유에 대한 억압과 고통의 상징을 행복으로 그리워한다 하여 영혼을 파는 배반자라 여기지 마십시오. 이 우순이가 그리워하는 코뚜레의 행복은 단순한 몸값의 물질적 가치가 아니라 우리 종들의 생명의 가치로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2009) <워낭소리>라는 영화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지요. 우리 선조 특히 할머니들 대부분이 그렇게 사셨던 그 이야기는 사람과 우리사이에 엮어 낼 수 있는 감동의 휴먼스토리였지요. 앙상하게 뼈만 남은 워낭소리의 주인공 그 소가 주인을 위해 최후를 다하고 행복하게 눈을 감는 모습이 나의 영혼을 사로잡아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군요“

그렇게 한여름을 필자와 함께 보낸 우순이가 겨울이 지난 뒤에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구봉산에서 소를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필자에게는 우순이가 구봉산 마지막 소가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구봉산에 소가 아른거린다. 먼먼 후일 언제 소가 구봉산에서 풀 뜯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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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범 2018-01-18 09:43:06
김배선 작가의 새해 첫 작품을 축하합니다......

세상살이가 자기 뜻대로 욕심대로 되는건 아니지만,
한편으론 자기뜻대로 모든것이 해결된다면, 사는 재미도......
인생을 살아가는 목표도 없으리라.....

미소가 모여 웃음이 되고,
기쁨이 모여 행복이 된다는 말처럼 ......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님들이,건강과행복,그리고,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한해가 되길 바라며,
2018년에도 좋은 작품 기대해 본다....^^-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