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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은 사라져가는 장묘전시장

  • 입력 2018.03.26 17:43
  • 수정 2018.03.26 18:05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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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구봉산은 여수의 핵심적인 산 중 하나다. 

본지는 구봉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구봉산 이야기’를 연재할 김배선(66)씨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의 저자이며 다음카페 '조계산 연구소' 운영자이다. 해양경찰 공무원으로 오랜 기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향토사에 관심이 많고, 조계산 주변의 '여수사건'관련 이야기 수집을 오랫동안 해오기도 했다. 

현재 여수문화원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순신광장에서 진행해 온 여수문화원의 '수군출정식' 감독을 맡은 바 있다. 

구봉산 동북쪽에는 어림잡아 400여기의 분묘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천여 기가 넘는 묘지가 있었다.

이렇게 묘지가 많은 이유는 구봉산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상들의 영혼을 모셔온 여수인들의 장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년대에 한국화약이 들어서고 이후 아파트를 개발하며 봉산동과 국동의 분묘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결국 90년대 후반에는 여수 최대 공동묘지와 구봉산 서남방의 묘지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구봉산에는 아직 다양한 형태의 묘지가 남아 있어, 근세 이후의 장묘 변천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주인 없는 묘, 무구장과 아장

이곳에는 특히 주인 없이 남겨진 묘가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주인이 없는 묘는 무구장과 아장으로 나뉜다. 버려진 묘인 무구장은 근래 후손의 무관심으로 인해 급격히 증가했다. '어린아이의 묘'를 뜻하는 아장은 시신을 옹기에 묻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조성한 묘이다.

아장

특히 아장터였던 구봉산 여서수원지 일대에는 과거 수많은 돌무더기들이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둘레길 아래 몇 기만 눈에 띌 뿐이다.

 

묘역에 따라 나뉘는 묘지

묘지는 묘역에 따라 개인묘, 부부묘, 가족묘, 문중 세장산 묘역으로 나뉘며 이 역시 형태에 따라 봉분묘, 납골당묘, 무 봉분(평장) 판석비명 묘, 수목장묘로 나뉜다.

개인묘는 대부분의 단기 개인 봉분 묘를 말하며 부부 묘는 부부의 봉분을 나란히 하거나 합장한 묘이다. 또한 가족 묘는 친족의 묘역으로 구성되며, 분파의 시조를 상위로 후손집단 묘역으로 구성된 묘는 문중 세장산 묘역이라 칭한다.

다른 분류방법으로 형태별 분류가 있다.  이는 봉분묘와 납골당 묘, 무봉분 판석비명 묘, 수목장 묘로 나뉜다. 대부분의 전통 양식의 원형과 직사각 봉분 묘와 새로운 형태의 문중 또는 가족공동 묘를 말하는 납골당묘를 말한다. 특히 무봉분 판석비명 묘와 수목장 묘(소형판석묘명 표기 또는 무 표기)는 최근에 성행하는 분묘의 형태이다.

문중 세장산 묘역

묘역과 석물의 명칭

묘역은 형태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르다.

봉분은 집의 지붕을 본뜬 무덤을 일컫는 말로, 사람의 무덤을 망자의 혼이 거주하는 집의 지붕과 같다고 여기는 데서 비롯했다.

아미는 봉분의 뒤편을 낮게 감싸 두른 가림 형태의 둑으로서 묘역을 눈으로 흘러드는 물을 가려주는 눈썹에 비유해 붙인 이름이다.

명줄은 봉분의 정 후면과 일직선상인 아미의 중앙에서 뒤를 향해 역으로 조성한 산의 줄기모양의 묘역을 말한다. 이는 혈맥을 상징하며 흘러 내려오는 물을 좌우로 분산하여 묘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묘를 말한다.

이외에도 우측아미 인근에 작은 판석이나 평석을 놓아 산신에게 제수를 드리는 상인 산선과,아미의 중앙 안쪽과 좌우양끝 단 그리고 봉분 앞에 심어 세우는 면이 반듯한 반달모양의 돌이나 판석을 놓은 반달이 있다.

석물 역시 형태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무덤의 상석(床石) 우측전면에 세우는 비석을 말하는 묘비의 비신에는 사자(死者)의 관직 본관 성명 행적 자손 생몰연월일 장지 등을 기록(조각)한다.

상석(床石)은 무덤의 봉분 앞에 놓인, 직사각형의 돌로 다듬은 제물을 차리는 상이다.

상석(床石)과 봉분 사이에 놓은 직사각형의 소형판석인 혼유석(魂遊石)은 한자로는 영혼이 노는 곳이지만 상석에 차려 놓은 제수를 먹기 위해 앉는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상석(床石) 앞(밑)에 설치한 묘제(墓祭) 때 향로를 올리는 곳을 향로석(香爐石)이라 한다.

묘역(봉분 앞)에 불을 밝히는 석등인 장명등(長明燈)은 요사스런 귀신을 막는 벽사(辟邪)의 기능을 한다고 여겨진다.

문인석(文人石)은  문관석 또는 문석인(文石人)이라고도 하며 망자를 지키기 위해 능 앞에 세우는 문관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도포를 입고 머리에 복두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을 든 공복 차림의 석상이며, 이와 반대로 무관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석상은 무관석(武官石) 또는 무석인(武石人)이라고도 한다.

망두석이라고도 하는 망주석(望柱石)은 무덤 앞 혼유석의 좌우에 벌려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으로 윗부분은 보주(寶珠)를 조각한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무봉분 비석식 묘역

구봉산 묘비와 명문의 변천사

구봉산에는 다양한 묘비와 명문이 있어 그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다.

묘비의 종류에는 전통 대형묘비와 소형묘비, 상석의 전 측면을 묘비로 대신 판석묘가 있다.

묘비에 적힌 명문 역시 전통 대형묘비비문,부부쌍봉, 소형묘비,부부합장묘비,한글비문 등 다양하다.

구봉산 묘비명에 나오는 한자의 뜻을 살펴보자.

먼저 학생(學生)은 생전에 관작이 없는 남자의 명정이나 비문의 앞머리에 쓰는 존칭이며 증(贈)은 후손이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했을 때 그의 돌아가신 부나 조부에게 내리던 벼슬(官位追賜)을 알리는 머리글을 말한다.

행(行)은 생전에 실제로 지낸 벼슬을 알리는 머리글이고 휘(諱)는 왕이 작위가 없는 고승이나 나라의 큰 스승에게 사후에 하사했던 이름을 말한다.

공(公)은 남자의 성씨(氏)를 높이는 말이다.

합장(合葬)의 경우, 묘비에 적힌 ‘배(配)’라는 용어는 합장에서 부인을 가리키는 말(짝지어주다)이며 부우(祔右)는 우측에 합장한 경우를, 합폄(合窆)은 함께 관을 내림을 의미한다.

쌍조(雙兆)와 쌍분(雙墳)은 합장이 아닌 부부를 쌍봉으로 나란히 쓴 묘이다. 여기서 유인(孺人)이란 관작이 없는 부인을 높이는 말이다.

 

장묘문화 변화로 새롭게 바뀌고 있는 구봉산의 묘

조선시대부터 주위에 마을이 생겨나 형성된 분묘들인 구봉산 묘들은 대부분 봉분묘의 형태였으나 최근 들어 새로운 형태로 바뀌고 있다.

필자는 수백 년에 걸쳐 그 주변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조상의 영혼을 모셔 왔기에 구봉산을 장묘의 전시장이라 표현했다. 조선시대부터 생겨난 구봉산의 묘는 대부분 봉분묘였으나 최근 장묘문화의 변화로 새로운 형태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 시대의 변화로 새로운 묘지가 거의 조성되지 않고 본래 있던 묘지도 관리가 편리한 새로운 묘역의 형태로 단순화 될 뿐이라, 다양한 장묘의 자취가 사라질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시대의 변화로 구봉산에는 옮겨간 묘인 파묘가 부지기수로 많고 기물들도 버려져 있다.

봉분 앞 기물

“요새는 젊은 사람들이 벌초 허간디, 우리 대에서 다 옮겨 놓고 가야할 거야……”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시던 팔순노인의 한숨 섞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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