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1 일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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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타루비’가 여수서 네번이나 다시 태어난 사연
거북선축제 현장서 ‘타루비’ 목판탁본 3천부 무료배부
  • 2018.05.06 12:23
5일 거북선축제 현장 부스에서 타루비 탁본을 만들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박정명씨

여수거북선축제가 열리는 5일 종포해양공원의 한 천막에서는 보물인 여수 '타루비' 탁본 3천부가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배부됐다.

탁본이 담긴 봉투 안에는 여수 타루비가 그 동안 없어졌다 사라지고 보물지정도 변경되는 우여곡절의 역사가 적힌 안내문도 함께 들어있었다.

보물 제1288호 <타루비(墮淚碑)>는 한번 사라졌다 여수로 다시 온 비석이다. 눈물을 흘리며(墮淚타루) 장군을 기렸다는 '눈물비석' 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년에 세워졌다.

타루비. 보물 제1288호. 높이 94㎝, 이순신이 타계한 뒤 1603년(선조 36)에 좌수영의 군인들이 이순신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 현재 여수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보물 제571호) 바로 옆에 있다.

여수시 고소대에 위치한 타루비는 크기가 1M 약간 못 미치는 비다.

타루비는 고소대의 비각 안에 3.6M 높이의 대형 비석인 보물 제571호 ‘통제이공수군대첩비’옆에 나란히 있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는 이순신의 활약상이 적혀 있는 보물이다. 명랑대첩비와 같은 류의 이순신 장군 대첩비 중에서 가장 큰 비석이기도 하다.

기록에는 1620년에 통제이공수군대첩비가 건립됐고 8년 후 비각이 세워지면서 대첩비보다 먼저 세운 타루비도 옮겨와 나란히 비각 안에 두 개의 비석을 안치하게 됐다고 나타나 있다.

여수시 고소동에 위치한 비각.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타루비가 비각 안에 보존돼 있다. 흔히 '좌수영대첩비각' 혹은 '대첩비각'이라 부른다.

두 비석은 모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보물이다. 그런데 이 비석들이 1942년에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조선의 혼을 말살시키려는 프로젝트 속에는 이순신을 기리는 대첩비와 타루비가 말살 대상이었다.

일본인 경찰서장 마쓰키(松木)가 1942년 두 개의 비석을 서울로 빼돌렸다가 처치하지 못하고 해방이 되자, 이 비석을 당시 총독부 박물관이었던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 매장하고 철수했다. 후에 여수시민들은 이를 두고 ‘생매장’이라고 표현했다.

여수 시민들은 해방 후에 비석찾기 운동을 펼쳤다. 수소문해서 비석을 찾아내 1946년 여수로 이송했다. 시민들의 모금과 유지들의 기부로 1948년 5월 24일 현 위치에 비각을 세우고 복구했다. 이렇게 해서 묻혀 사라져버렸을 타루비(눈물비)는 여수시민들에 의해서 다시 태어났다.

두 비석은 1960년 동시에 보물 제571호로 지정된다.

여수시민들은 이순신 장군을 기린다는 공통점 외에는 건립시기와 비석의 형태가 전혀 다른 두 개의 비석을 보물 제571호로 묶어서 지정한 것은 잘못됐다는 건의를 꾸준히 해왔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1998년에 타루비는 대첩비와 분리되어 보물 제1288호로 세 번째 다시 태어났다.

타루비는 보물로 지정이 되면서 탁본이 금지됐다.

서예가인 박정명씨가 축제 현장 부스에서 관관객들에게 한문명구 '초심'을 써주고 있다.

지역의 서예가인 박정명(여수예총 회장, 여수서예인협회 고문)씨는 예전 탁본과 사진을 바탕으로 목판용 타루비를 제작했다. 순전히 탁본을 뜨기 위해 비신은 원형 그대로의 크기를 유지하고 받침대와 옥개석은 비석의 사진을 바탕으로 크기를 약간 줄여서 만들었다.

탁본용 나무로는 글자가 깨끗하게 찍히고 먹이 번지지 않는 산벗나무가 제격이라고 한다.

“매년 여수 서예인들이 거북선축제에 참가해 재능기부로 가훈도 써주고 이순신 장군의 시 문구를 써주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올해는 뭔가 색다른 준비를 하자는 50명의 회원들 뜻이 모아져 타루비 탁본을 준비했다. 먹이 잘 안 번지도록 하는 데는 산벗나무가 최고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마침 구례의 작은 제재소에서 구했다. 타루비 모형 서각을 이용해 탁본을 떴다”

거북선축제가 열리고 있는 종포해양공원 한켠의 행사참가 부스중 이순신 장군 먕구 써주기를 하고 있는 여수서예인들

여수서예인협회 회원들은 타루비 목판을 이용해 탁본 3천부를 제작해서 타루비 사진이 담긴 상세한 안내서와 함께 여수거북선축제를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배부하고 있다.

여수서예인들은 탁본 배포는 ‘타루비’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고, 거북선축제를 개최하는 본래 의미를 실천하는 작은 봉사라고 말했다.

박정명씨는 탁본을 전하면서 네 번째로 재탄생한 ‘타루비’라고 귀뜸한다.

“조선시대때 타루비를 맨 처음 세운 분들도 여수의 우리 선조들이었고. 경복궁 땅속에서 찾아내서 이걸 보물로 저정한 사람도 여수시민들이다. 또 비각을 다시 세워 보존하도록 하신 분들도 여수시민이었다. 이걸 다시 대첩비와 분리해서 별도의 보물로 지정하도록 한 것 또한 여수시민들이다. 우리 여수서예인들 역시 여수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재능기부로 타루비 탁본을 제작해서 무료배부하고 있다. 이미 세번씩이나 다시 태어났는데, 결국 타루비는 이 탁본으로 말미암아 여수시민들에 의해서 네 번째로 다시 태어난셈이다”

여수서예인들이 타루비 탁본과 함께 타루비 안내문을 관광객들에게 무료배부했다.

여수서예인협회 회원 한 분은 방금 서울의 아는 표구점에서 벌써 고객이 표구를 맡겨왔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각광을 받는만큼 축제가 끝난 후에도 탁본을 널리 보급하겠다고 말했다.

타루비 하단에는 아래 내용이 적혀있다.

‘營下水卒 爲統制使李公舜臣 立短喝 名曰墮淚 蓋取襄陽人思羊祜 而望其碑 則淚必墮者也 萬曆三十一年秋立’ (영하수졸 위통제사 이공순신 립단갈 명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호 이망기비 즉루필타자야 만력 31년 추립)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공순신을 위하여 짧은 비를 세우니 이름하여 타루라 말하니라. 대개 중국 진나라의 양양(襄陽) 사람들은 양호를 생각하며 그 비를 바라보면서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를 취한 것이니라. 만력 31년(1603) 가을에 세우다”

 

오병종  netong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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