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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돌바위 경찰차습격사건⓸

참혹했던 관련자색출

  • 입력 2018.07.02 11:26
  • 수정 2018.07.02 11:29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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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이미 ‘구봉산 이야기’를 연재했던 필자 김배선(66)씨는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의 저자이며 다음카페 '조계산 연구소' 운영자이다. 해양경찰 공무원으로 오랜 기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조계산 주변에서 6.25전쟁 직후 일어난 많은 이야가를 들었다. 산 속으로 피신한 민간인들과 이를 토벌하려는 군인들 간에 있었던 현대사의 아픈 이야기를 현장에서 직접 듣고 채록하여 메모로 남겼다. ‘빨갱이’라는 이름을 듣지 않으려는 증언자들의 기피도 있었지만 친근함과 꾸준함은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소설형태를 빌렸지만 그가 채록한 증언은 생생하고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횟돌바위 경찰차 습격 사건' 마지막 편이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뒤에야 초라한 몰골로 유주문 대장과 함께 낙수지서에 도착한 대원들은 거의 가 후미차 대원들이었다. 과연 몇 명이나 죽고 부상자는 몇이며 어디로들 갔는지 미칠 지경이었다.

밤늦게야 겨우 순천경찰서교환을 경유하여 보고하고 이를 갈며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자 유 대장은 낙수에서 지서와 면사무소 등에 분산하여 하룻밤을 보낸 대원들을 집합시켜 어제의 치욕을 상기시키며 출동을 위해 점검을 실시하였다.

다행히 뒤차의 모든 대원들이 개인병가를 모두 가지고 탈출하였고 오늘은 산지의 토벌을 위한 출동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에 관한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서에서 민간인들을 통해 제공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대원들을 인솔하여 이읍을 향해 출발하였다.

어제의 기습에 놀라서 그랬는지, 평소에는 평촌의 멧두재를 넘어서 다녔지만 오늘은 신작로를 따라 한실로 돌아서 갔다.

그들은 정상적인 경찰관이라고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가는 길에 남자들을 만나면 불러 세우고 가혹할 정도로 폭행을 하며 지나갔다.

이읍마을

토벌대가 떠나고 난 한참 뒤에 낙수지서의 주임도 부하들을 이끌고 뒤따라 이읍으로 출동하였다. 주임은 오봉사람 김삼문이었다. 도중에 걸리는 사람은 모두 작살을 내면서 지나갔다. 이때 죽산 마을의 김준영(17) 총각과 부친 및 여러 사람은 조사를 한다며 길에서 붙들려 덕동 마을을 향해 끌려갔다. 잔뜩 겁을 먹고 따라 가던 도중에 영문도 모르게 주임이 두 사람만 보내주어 무사할 수 있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주임이 고모와 한마을에 살면서 ‘해라’를 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기에 아버지를 알아보고 보내준 것인데, 당시에는 아버지도 고모도 일체 표도 내지 않았기에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덕동까지 끌려간 사람들은 구타를 당한 뒤에 마을로 돌아왔고 이야기를 들은 주민들은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이웃 마을의 수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은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김준영 76)

정오가 되기 전에 현장에 도착한 유 대장과 대원들은 선도차 옆에서 뒹구는 동료들의 시체와 다 타버린 작전차를 대하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허망한 기분마저 들어, 넋을 잃은 사람들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유 대장은 우선 현장을 수습해야 했으므로 감정을 억누르고 일부 병력은 어제 기습공격을 하였던 대내골을 수색하도록 지시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동료들의 시신부터 수습하도록 하였다. 수습한 시신들은 모두 다섯 대의 마차(구르마)에 실어 벌교로 줄지어 옮겨갔다.

어느 정도 현장의 시신수습을 마칠 무렵, 유 대장이 이장에게 젊은 사람들을 모두 마을입구 지서건물 앞 노디 건너편 신작로로 집합시킬 것을 지시했다. 현장의 다른 뒤처리와 내통자를 찾아내는 조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겁먹은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않고 우물쭈물 머뭇거리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 대장은 이 일이 이읍 젊은이들 중에 빨갱이들과 내통을 한 놈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폭발하려는 성질을 근근이 참으면서 시신수습부터 하고 있었는데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유 대장은 권총을 차고 있으면서도 카빈을 움켜쥐고 대원들을 인솔하여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가자마자 다짜고짜 공포를 쏘아대며 사람들을 향해, 이 빨갱이 놈들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을 치며 닥치는대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는 모습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벌벌 떨며 이리저리 피했다.

본래의 지시는 젊은 남자들만 모으라는 뜻이었으나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여자와 노인 어린이들도 여럿 끼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한쪽으로 비켜있게 했지만 겁이 나는지 하천을 건너가지도 못한 채 구석에 피해 있었다.

대원들을 물 건너 마을로 보내 집집마다 수색을 시키고 차례차례 불러내어 심문을 시작하였다. 심문이라기보다 마구잡이로 후려치는 보복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태까지 가깝게 지내던 유지 노인들이 보증하기 위해 나서려고 하면 안면몰수 면박을 주어 입을 막고 돌려보냈다.

그 사이 마을로 간 대원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총을 들이대고 노인과 여인들을 앞세우며 문을 열어 재끼고 다니는 것이 공포 그 자체였고 그러는 중에 조금 늦게 나온 사람에게는 닥치는대로 개머리판을 날려, 차마 눈뜨고는 보기가 민망한 지경이었다.

“어느 놈이 그랬냐? 바른대로 대라!”

구타와 다그침이 계속되었으나 처음부터 나올 것은 없었다. 내통자가 여기에 있을 리 없었고, 있다고 해도 자백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을 계속하자 그들도 지치고 성질도 누그러져 더이상 조사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조사를 끝내고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마을로 건너가기 위해 현재의 다리 밑에 있던 통샘 노디를 줄줄이 건너기 시작했다.

이때 유주문 대장이 갑자기 울분이 치솟았는지 하천 쪽 하늘을 향해 카빈총을 들어 난사를 해댔다. 이것이 뜻하지 않은 원통한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고 말았다.

노디를 건너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 동생을 등에 업은 열 살쯤 되는 이장의 딸도 끼어 있었다. 징검다리를 거의 다 건넜을 무렵 소녀는 등 뒤서 꺽 소리가 들리고 등에 바짝 붙어있던 동생이 비틀거리더니 잡고 있는 손에서 벗어나 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읍 입산가족 수용소 터 자리

유 대장이 쏜 총 오발탄에 맞아 버린 것이다.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았고 개천에는 핏물이 붉게 물들었다.

어른들이 달려와 안아들고 뛰어 갔으나 결국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꽃송이는 하늘로 날아가고 말았다. 흘러나온 붉은 피는 아기의 목숨처럼 서서히 강물로 번져 사라져갔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통한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쏴부렀어도 아무 말 못할 판에 잘못 맞아 부렀는디 무슨 말을 할 것이여.”

누구 한사람 입도 뻥긋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슴 미어지는 통곡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원들의 수색은 계속되어 그야말로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날이 저문 뒤에야 그 기나긴 하루가 끝이 났다.

물론 이후로도 핍박은 이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 지금까지 이읍리는 좌익 활동자로 인해 입산한 수가 가장 많았음에도 그동안 경찰과의 관계가 비교적 원만한 편이었다.

그 이유는 입산자가 많기는 해도 예부터 관료들이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 살아온 이지역의 중심마을로서, 유지들은 모두 좌익과는 거리가 멀고 대대로 공무원들이 많으며 관공서와 협조가 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간 이 근방에서는 없었던,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사건으로 인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고 만 것이다.

벌교경찰서의 엄청난 미움을 산 이읍마을은 다음날부터 매일 경찰토벌대가 출동하여 관련자 색출을 한다고 들쑤셨으니, 입산자가 많은 그곳은 누구 할 것 없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 아예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상수였다.

이 사건 이후 전쟁과 토벌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이읍 마을사람들은 대내골의 습격대들이 있었던 장소에 가보려 하지를 않았다.

빨갱이로 몰리게 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그곳을 수년이 지난 후에 가보니 수북이 쌓인 녹슨 탄피만이 그날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마무리

'횟돌바위 경찰차습격사건'은 모두의 증언을 풀어서 쓴 글이다.

55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야 겨우 증언을 듣다보니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한계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사망자의 수와 그들의 이름이다.

정확한 사망자의 수와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당시 사망한 동료들을 수습했던 경찰관들뿐이다. 마을 사람들은 사건현장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경찰관들이 시체를 다 치우고 난 뒤에야 마을 사람들을 불러 뒤처리를 시켰다.”(증언자들)

그러나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경찰들은 대부분 사망하였거나 행방을 찾기가 어렵다. 더불어 당시 지휘 부서였던 벌교경찰서가 폐쇄되어 사건과 사망자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증언을 수집하는 중에 당시 토벌대 1중대장이었던 강형진(경사) 씨가 벌교버스터미널 옆 마을에 생존해 있다는 제보를 듣고 수소문하여 기대를 갖고 2009년 12월 30일 등 두 차례에 걸쳐 등양마을 자택을 방문하여 고령의 노환 중인 본인을 만났으나 증언을 꺼려 결국 들을 수가 없어 정말 아쉬웠다.

습격을 받은 경찰차량의 사망자에 관한 주요증언은 다음과 같다.

『-그때 사람이 20명 가까이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이읍 최태윤, 96)

-죽은 사람들 중에 한사람은 권총을 찬 높은 사람이었다. (최태윤)

-당숙인 전동욱 소위가 당시 송광면 낙수주둔부대 파견대장으로 와 인민군들이 퇴각할 때 버리고 간포가 고장 나서 수리하러 가기 위해 토벌대차를 타고 가다가 이읍에서 습격으로 사망했다.(평촌 전창수, 74)

-총 맞은 작은아버지(전근만 씨)를 확인하러 현장에 갔다 온 작은어머니의 말이 사망자가 17명이라고 했다.(전창수, 74)

-처음 방향감각을 모르고 앞으로 뛰어나간 사람들은 다 죽었다. (김재진 75)

-당시에 여자 두 사람도 죽어 있었다. (김재진)

-여자들이 탄 것은 토벌대에 소매마을 사람이 있어서 가족들을 싣고 갔다고 들었다.(최태윤, 97)

-다음날 경찰관들이 시체를 다 치우고 난 뒤에야 마을사람들을 시켜 뒤처리를 했으니 아무도 못 봤지. 애초에 사람들은 거기 갈 엄두도 못 냈어.(공동)

이읍마을2018

2005년경 처음으로 이 사건의 발생지인 이읍마을 노인당을 찾았을 때만 해도 관련 질문에 대해 노인들은 모두 대답을 머뭇거렸다. 사상전쟁에 휘말리는 동안 각인된 생존의 보호본능이라 여기며 필자가 꾸준히 노력한 결과, 3년 뒤에는 그들이 아낌없는 증언을 들려주어 사건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증언자들께서는, 6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시절의 고통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며 마을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 묻히지 않고 후세에 알려져 이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증언을 해주신 이읍마을 등 모든 어르신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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