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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덜밑 집단총살사건③

사람거름 먹고 큰 산딸기

  • 입력 2018.07.17 10:58
  • 수정 2018.07.23 16:23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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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덜밑이 바로 보이는 건너편 곡천 망향동산

덜밑은 그토록 많은 젊은 남녀가 역사의 희생물로 사라진 분노의 현장이건만 처음부터 꼭꼭 묻어두고 바라보면서 잊히기만을 기다리던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모든 기억은 시간에 묻혀 희미해져 가고 있다. 과연 누구의 바람이었을까?

그러나 겁에 질려 숨죽였던 그 세대들이 모두 죽어간다 해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목숨을 보호받아야할 국가권력으로부터 무참하게 살상된 그 많은 억울한 영혼들은 물론, 입을 꽁꽁 닫고 한을 품은 채 억울함이 풀리기만을 기다리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의 영혼들께서도 최소한 다시는 그와 같은 불의가 반복되지 않는 역사의 거울이 될 현장으로 남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덜밑에 총소리가 멎고 평화의 날이 오기까지는 어언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그러나 그곳은 총소리가 멈춘 것만으로 평화가 깃들 수 없는 땅이었다. 구천을 맴돌며 내뿜는 원혼들의 살기가 지뢰밭처럼 사람들의 근접을 차단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단순한 원혼이라면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하여도 천도를 비는 씻김굿으로 달래고 풀어 순화의 땅을 만들어 가까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칭칭 동여 씌워진 빨갱이라는 고리는 잘 못 지나치다가 걸리면 헤어 나올 수없이 옥조이는 보이지 않게 깔려 있는 홀롱개(올가미)였다.

그러니 전쟁 내내 귀신보다 무서운 빨갱이의 덫을 피하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끝없는 전쟁의 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세월에 묻혀 있는 진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총성이 멈추고도 덜밑은 격리된 땅이 된 채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땅은 잡초가 우거지고 스산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른들에게는 그토록 무서운 곳이라지만 천진한 눈으로 보는 아이들에게는 아름다운자연의 한 곳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전쟁의 총성이 완전히 멈추고 죽산마을 사람들이 대낮에도 덜밑을 지나쳐야 할 때면 멀리 돌아 시체들이 쌓였던 곳은 차마 바로 보지 못해 고개를 돌리고 다닌 지도 어느덧 수년이 지난 여름어느 날 주렁주렁 열린 산딸기에 끌려 내려간 소년들이 마을로 돌아와 어른들께 자기들이 덜밑(총살현장)에서 따먹은 엄지손가락머리만큼 굵은 딸기들에 대해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그러자 어른들이 “옛 끼! 이놈들 그 따~알(딸기) 들은 사람거름묵고 큰 것이라 귀신 붙은 것이다 이놈들아!” 하고 겁을 주는데도 소년들은 어른들은 겁쟁이라고 여기면서 뭣이 그런다요, 하더니 한 술 더 뜬 한 녀석이, 거그는 남자 신들이 많은디 사이에 여자 신도 여러 개 있어라, 하고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 으스대며 자랑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맞아 그때 거기서 살아난 여자도 있었다 그러드만, 하고 당시를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이었다. 덜밑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쯤이나 지났는지 모른 뒤에 그곳에서 살아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보통 때라면 이런 흥미로운 소문은 바람같이 빠르게 번져 나가 사랑방을 달궈 요즘 같았으면 해외토픽 깜이었으나 누가 대놓고 말리는 것도 아닌데 조용히 숨어 돌았다. 그러므로 누구하나 자세히 알려고 묻는 것도 삼갔고, 당사자를 통해 어찌 알게 된 사람도 혹여 누가 입을 가리고 묻기라도 할라치면 반 토막으로 다물어 버림으로, 터놓고 말문이 열릴 시기에는, 그때 그랬다더라, 하는 추정의 소문처럼 되어 흘렀다. 그래도 이읍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근거 있는 내용으로 자리 잡은 생존자에 대한 소문은 남녀 두 사람이다.

“맷돌 속에서도 온 콩이 나온다더니 그 통에서도 살아난 사람이 있었당마 그래. 보성여자 한사람하고 그쪽에 사는 금성 채곤이 매젠가 하고 두 사람이 살아났다 그래.

총소리를 듣자마자 항꾸네 뭉끈 둘이 자빠져부렀는디 다른 사람들한테 깔림서 피범벅이 돼갖고 죽은 데끼 있은께 건드러 보드만 그냥가불 길래 다 갈 때까지 숨도 못 쉬고 엎졌다가 덕동 뒤에 놋짐재를 넘어 도망가서 살았다고 소문이 났어.“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러나 이읍에서 말하는 그런 생존자에 대한 말에 주변마을 사람들은 부정도 수긍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존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이읍 사람들이 그러는데”라는 인용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이런 대화의 심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명확하게 목격한 사실까지도 표현을 삼가려 하는 그동안 버릇처럼 몸에 밴 방어 본능이 느껴지는가 하면 이읍이 관공서가 있는 소재지나 다름없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다른 작은 동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을 숨죽이는 사이에 오류를 품은 풍문이 정설처럼 굳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6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뒤 사건현장과 가장 가까운 죽산 마을의 춘형이 어머니(82)가 기억으로 숨겨 왔던 이야기 한 토막이다.

“사람들이 죽은 지가 몇 해나 지났는지는 잘 모르것는디 음력 8월 달이었어라. 한 남자가 동네로 와서는, 내가 그때 덜밑에서 살아난 사람이요, 그럼시로, 총소리를 듣자마자 씨러져 갖고 사람들 사이에 죽은데끼(듯이) 있은께 발로 툭툭 차보고는 가불 길래 한참이나 있다가 일어나서 죽은 사람 시계도 끌러서 차고 광주까지 걸어 감시로 고상도 많이 했단 말이요. 또 누구 산 사람도 있는가 모르겄어라, 하면서 동네서 놀다 갔어라…

그리고 또 그때 벌교경찰서에 갇혀 있었던 우리지낭 박창렬이가 그러는디 살아난 사람 중에 고흥사람도 하나 있다 그럽디다“

이와 같이 방향이 전혀 다른 이야기에는 최소한 이읍 사람들이 말하는 두 사람보다는 생존자가 몇 사람 더 있다는 말이다.

죽산의 어린이들이 산딸기를 좇아 덜밑으로 들어간 것이 사건발생 후 관련자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거의 최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가 6. 25의 총성이 완전히 멈춘 지 서너 해가 지난 오십육칠 년도로 기억했다.

그로부터 십 여 년이 더 지난 뒤에 고흥에서 왔다는 사람이 아들로 보이는 젊은이 한사람을 대동하고 마을노인들의 사랑방을 찾아 내가 그때 저~어 아래 솔밭 에다가 아버지를 묻어 놓고 갔습니다. 진즉 찾아와서 모셔가야 했지마는 차일피일 시간을 보내버리고 이제야 비로소 모시러오게 되었습니다. 하고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노인들은 앉음새를 바로잡으며

“워~메 그래 기특허네! 참 기특혀. 그때는 여러 간디다 오부작 오부작 그래 놓고 파갈 것 같이 그러드만 여적지 자네 맹키로 모시로 온 사람은 처음이구만!”

이렇게 치하를 하면서 어딘지 근본이 있는 집안이라는 표정으로, 그런디 자네 성씨가 어찌 되는가?, 하고 묻자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저~기 고흥 송산리 쪽에 사는 송가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말머리를 돌려, 거기가 참 좋은 자리였던 모양이여요. 제가 아들이 없었는데 그 뒤에 저 아들을 얻었단 말입니다, 하고 흡족한 얼굴빛으로 아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러자 노인들은 다 자란 아들의 인사를 받으며, 거그가 무슨 자리가 좋았겄는가 자네 정성이 통해서 부친이 도우셨겄제.

잠시 후 두 부자의 모습은 방금 가리켰던 소나무 비탈을 향해 이장에 필요한 물건들을 싸 걸머진 뒷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가고 나서 며칠이 지난 뒤에 궁금한 사람들이 현장에를 찾아가 보니 묘를 파가고 난 깊지도 않은 길쭉한 구덩이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 덜밀의 모습은 주암댐으로 인해 옛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호변 수계구간과 구릉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당시에는 개천가 작은 들과 이어진 나무들이 있는 산비탈이었다.

사실 고흥사람한테 당신이 처음이라고는 했지만 그 이전에도 묘를 파가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밤에 몰래 파간 사람이 있다는 말까지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이장을 해가는 사람들도 마을에 알리지 않고 살짝 해갔으므로 이번이 처음이란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부모나 형제간의 묘를 옮겨가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한 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좌익과 연계될 것을 두려워하는 아직 서슬 퍼런 시대에 주눅이 들어 있는 가엾은 사람들의 핏줄에 대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몸부림마저도 용기내지 못하거나 깊은 속 쓰림으로 불행의 씨가 조용히 묻혀 버리기를 바라는 가장들의 결심이 입을 닫아 버림으로서 대부분은 봉분의 형태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누군가가 또 와서 묘를 찾아 유골을 수습해 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덜밑이 있는 죽산마을

주암댐으로 쓸려간 마지막 흔적

그러던 중에 마지막 정리의 날이 다가왔다. 1989년도 어느 날, 초라하게 형태만 남은 덜밑 묘들의 앞에는 안내문들이 세워졌다.

1991년도 주암댐의 완공(5. 10)을 앞두고 1990년 3월부터 담수가 시작되니 묘지의 주인들은 언제까지 면사무소에 신고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묘인지도 모를 돌무더기 흔적으로 남아 있는 묘들은 누가 주인이라고 나타나서 신고를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말로는 타먹을 줄 아는 사람들이 대신 했다고들 했다.

담수가 완료되었을 때 덜밑에는 눈에 보였던 마지막 자취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은 만수위가 되면 물에 잠겼다가 나타나기를 수없이 반복하여 남아 있던 작은 흔적들까지도 알아볼 수 없도록 모두 씻어내려 가버리고 말았다.

“내가 처음 그곳에 가보았을 때는 돌흙으로 덮어놓은 무더기 같은 것이 일곱 개나 되고 그러고도 또 여러 개 있었어. 주암댐을 막기 전에는 거기가 산 밑이었는데 지금은 물에 잠겨버려 뼛다구들이 다 주암댐으로 들어가 버렸을 것이여.“

팔순 노인의 옛 기억이 허망하게 메아리 칠뿐이다. 그런데 문득 어느 날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도 못하고 가슴속에 묻어오느라 답답하게 속앓이만 했던 이야기들을 “임금님 귀는 당나귀”처럼, 어디 한번 속 시원하게 털어 놓아 보라는 기회가 이읍을 찾아왔다.

2005년 5월 출범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들이 마을을 찾아다니며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사연을 마음 놓고 말씀해 주면 정부에서 틀림없이 정리해 드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듣기에는 매우 반가운 말을 하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이, 그래봤자 뭐, 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직접 당사자 가족들은 거의 다 속내를 털지 않으려고 피했다. 거기에는 이제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공산당에 관해서는 아직도 오랜 세월 움츠렸던 마음이 풀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사는 사망 실종자들을 위주로 마을의 몇몇 사람증언을 기초로 명단과 극히 기초적인 간단한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임병순도 당시 사망자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위원들이 유일하게 생존가족 중의 동생인 병우 노인을 찾아와 증언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걸 말하면 무얼 어떻게 해주느냐,고 물었다.

사실 그 물음은 지금까지 쌓인 감정이 욱 하는 순간에 실려 나온, 약간은 결례가 되는 질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분들도 느낌으로 알아챘겠지만 성실한 위로의 말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렇지만 병우 노인은 형님의 죽음이 말 못하게 억울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뭣모르고 휩쓸렸다 한들 좌익들과 어울렸던 것은 사실이므로, 어쩐지 변명 같은 말로 들릴 것만 같아 분노가 꿈틀거리려는 것을 억누르며 입산한 날의 과정과 경찰들의 총에 죽었다고만 대략말해주고 말았다.

이제 60년이란 세월이 지나는 사이, 스물넷 청춘 임병순과 함께 백주대낮 총성으로 그 많은 젊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덜밑에 쓰러져, 하매나 하매나 좋은 세상만을 기다리며 썩어가던 마지막 뼛조각들도 주암댐 물속으로 씻겨가 잠겨버린 것처럼, 시간은 흘러가고 세상 또한 변했다.

평생 한이 맺혀 잠 못 이루던 부모님도 자식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간지 오래고, 함께 살았던 얼마 남지 않은 이웃들의 기억에서마저 병순이란 이름은 거의 잊혀 가고 있다. 그러나 오직 형님이 죽어 있는 마지막 현장을 보았던 당시 16세의 어린 동생 병우만은 팔십을 목전에 둔 백발이 되었어도, 그날 덜밑에서 보았던 처참했던 기억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또렷하다.

“덜밑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영광이나 거창 이런 데는 조사도 하고 그런다드만, 여기는 똑똑한 사람이 없은께 그런 것이여.…”(공통)

그러나 지금껏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하고 두려워 가슴에 묻어오기만 했던 그날의 사실을 형님 곁으로 갈 얼마 남지 않은 날까지 영원히 안고 가려나 했으나 이제는 말을 해도 될 만한 세상이 되었기에 털어 놓아 보지만 듣는 사람들이 오히려 눈을 의심할 만큼 긴가민가할 정도가 되어 버렸으니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지만 속 깊이 쌓아 두었던 사연을 털어 놓을 때면 나도 몰래 목청이 커지며 마음이 후련 해진다. 그러면서도 형님에 대한 생각을 할 때면 이제 모든 분노를 다 삭이고 떠나가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언제 쯤 잊혀 질런지 모르게 좀처럼 놓아지지 않는 억울함이 있다.

“그러니까 옛날이나 시방이나 세상 사는 것은 다 마찬가지지마는, 그때는 사바사바가 훨씬 잘 통하던 시절이었던가 봐. 이 종학이도 형님하고 같이 좌익으로 벌교에 잡혀 들어갔다가 빠져 나왔는데, 순천중등학교 선생이던 즈그 성님 이장수가 빼내줬고 또 다른 순천중등학교 선생 했던 사람은 제자들이 경찰서장을 찾아가 살려냈다 그러드구만!“

백발의 병우노인이 덜밑에 누워 있던 형님의 시신을 떠올리며 허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끝.

 

<이상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10여회에 걸쳐 송광면 이읍리 이읍노인당 등에서 사망자 동생 임병우(77) 최태윤(97) 임병일(88) 강병준(77) 김재진(77) 박영탁(73) 김봉남(71) 등 여러분과 죽산노인당 이춘형 모친(83)등 노인 여러분으로부터 청취한 증언을 토대로 서술한 것으로 본문 중의 날자와 시간에는 오래된 일이라 기억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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