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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찾은 평촌의 이산가족②

  • 입력 2018.09.17 11:44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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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이 이샌이 마을에서 학래 형제들과 유일한 친척인 것은 사실이지만 학래가 순천으로 간 뒤부터는 거의 남처럼 살아오다가 입산을 하고부터는 완전히 멀리 한 것을 마을사람들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에 대한 예로서 그들이 입산을 하고 나서 마을을 제집처럼 드나들 때 동네회관에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학래가 몇 차례 강연을 하였으나 그때도 정환이 이샌은 일부러 한 번도 참석을 하지 않았다.

사실은 학래 형제간들이 마을에 왔을 때 특별히 적대행위만 않으면 누구도 괴롭히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다고 친척이라고 하여 눈에 띄게 아는 체를 하지도 않고 평범하게 대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일부러 그랬을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정환이 이샌은 배운 것도 없는 촌부였지만 흙을 파먹고 사는 백성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일에 허황되게 끼어들어 휘둘리면 패가망신 밖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살아온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조카뻘 되는 학래 형제들에게 깨우쳐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이미 그들과의 관계가 인력으로서는 어찌해볼 수가 없는 팔자소관으로나 돌려야 하는 상황으로 얽혀들고 말았으니, 오직 지서주임의 손에 목숨이 좌우되는 가엾은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만약 그때 동네사람들이 하나 같이 나서서 진정을 해주지 않았다면 풀려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재력 있고 발이 넓은 김 회장의 적극적인 대변의 덕에 겨우 풀려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영배 아버지는 그때의 후유증으로 인해 힘든 일도 못하고 고생을 하다가 오래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뿐만 아니라 한동네에서 삼형제와 조금 가깝다는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차례차례 불려가 취조당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중에는 막내 형기의 친구였던 김동철 총각은 그들의 입산에 휘말려 시달리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자, 고대마을 조개둠벙 강변에서 낫으로 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하는 일도 있었고 하물며 학래 어머니가 김 회장에게 계가를 해가서 낳은 아들 은행이 총각도 잡혀가 취조를 당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한 마을에서 자란 증언자들 거의 모두가 그처럼 여러 사람들이 그들과 연루되어 고난을 당했음에도 정작 이학래 개인에 대해서는 반란군들로부터는 피해를 막아주고 도와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평촌마을 노인들을 대상으로 학래 형제들에 관한 증언을 듣는 자리마다 누군가는 “그 사람들 덕을 많이 보았지”라는 말을 했고 그때마다 누구도 이의가 없는 분위기임을 역력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학래 형제들로부터 보호를 받았다고 표현하는 내용들을 모아보면

『-학래가 대장이면서도 우리 동네서 반란군으로 끌어 들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우리 동네는 반란군들이 잡혀가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입산 몇 달 전부터 동네 친구들하고 통 안 어울린 것은 생각고 일부러 그런 것 같다.

-학래 형제가 있을 때에는 동네에 반란군들이 얼씬도 안했다.

-동네 사람들한테는 참 순하게 대해 주었다.

-얼판에는 정옥이 짐샌 소도 몰아가고 잘 산집 제삿날 같은 것을 귀신 같이 알고 내려왔는데 학래가 없을 때고 즈그도 살아야 헌께 별 수 없었을 것이여.

-지서에서 사람들 잡아다 패고 족친 것에 비하면 그 사람들은 양반이었지 뭐. 등』

이 있다.

그러나 평촌도 반란군들 총 맞아 죽은 사람이 있고 빨갱이들로부터 수난과 피해를 받은 곳이라는 사람들도 있으므로 인식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평촌마을 민간인 사망자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평촌의 사망자는 이금열(23) 이용재(20) 오창섭(24) 3명이다.(기록 확인)

그중 이금열은 진압군으로 여수에서 사망하였고 이용재는 토벌대에 참여하여 모후산으로 건너가는 도롱마을 앞 강변에서 사망했으며 오창섭은 송광사입구 외송 마을(현재상가)에서 반란군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러므로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창섭 한 사람이다. 그래서 오창섭의 죽음에 대하여 물었더니 무고하게 총살을 당한 것은 사실이나 송광사는 밤과 낮으로 주인이 바뀌지만 낮에도 그들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그러한 위험지역에서 오해 받을 만한 상황이 있었을 것이라며 고대의 임시 절로 피신해 있던 스님이 절을 살펴보러 갔다가 반란군이 나타나자 도망을 가다 비전 길 입구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고 예를 들었다.

 

그러니까 반란군들에게 잡혀가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평촌에도 그들이 처형대상자라고 말하는 지주 관료 경찰의 집안이 있었으나 가족 중 어느 한사람도 잡혀가 죽은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학래 형제간들이 부대를 이끌고 수차례 마을을 다녀갔으나 피해를 주지 않았고 그들의 작전 도중에 마주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특별히 적대행위를 한 사람이 아니면 모두에게 인정으로 대해주었다고 증언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세월이 많이 흐른 탓도 있지만 작전이었는지는 몰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선심을 베풀었으나 반면 무자비하고 가혹했던 경찰의 관련자 색출이 반작용으로 낳응 결과인지도 모른다.

끝으로 1949년 조계산에서 학래 삼형제가 활동을 하는 동안에 있었던 직접 경험했던 분이 증언하는 작전사례 하나를 실어본다.

 

『 6.25가 나기 전해의 여름으로 기억이 된다.

해방 전부터 면소재지였던 큰 동네 낙수에는 군인 일개 소대가 와서 주둔을 하고 있는 날 밤이었다. 

학래 형재의 입산활동의 증언자 평촌 김응태 노인

평촌의 40을 막 바라보는 봉수 짐샌과 18세의 응태 총각은 한조가 되어 낙수에서 다리를 건너와 고대와 송광사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저녁부터 보초를 서고 있었다.

열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몸이 얼마나 피곤했던지 두 사람이 모두 앉아서 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발로 응태 총각의 등을 툭 건드렸다.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시커먼 남자 5~6명이 둘러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막내 형기가 데리고 온 반란군 들이었다.

보초를 서다 잡혔으니 이제는 죽었구나 싶어 머릿속이 깜깜해 오는데 형기가 두 사람에게 원굴재로 가자고 했다.

나이 많은 봉수 짐샌은 반항을 해봐야 어떤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순순히 일어서는데 응태 총각은 지금 산으로 잡혀가면 끝이다. 라는 생각과 한 마을의 형이니까 어린냥(앙탈)이라도 부려보자는 생각에서 나이 먹은 아버지를 두고 어떻게 가느냐고 늘어지자 옆에 서있던 놈이 다짜고짜 몇 대를 갈겨댔다.

더 이상 말도 못하고 평촌으로 넘어가는 원굴재를 향해 따라 올라가보니 족히 오십 여명은 되어 보이는 반란군들이 고개아래 욈실로 가는 샛길 사이의 동산 아래쪽 끝에 있는 밭에 시커멓게 집결해 있고 대장은 삼형제 중 제일 큰형 학래였다.

그들의 가까이 가니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모두 끌고 가자는 소리가 들렸다.

속으로는 이제 정말 죽었구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 두 사람을 대장 앞에 세웠다.

응태 총각이 대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니 학래 대장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아버지랑 잘 있냐?” 하면서 언제부터 보초를 섰느냐고 물었다.

어떻든 대장 학래의 웃음과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응태 총각은 마음이 어느 정도 풀렸다. 초저녁부터 섰다고 사실대로 말을 하자 곁에 서있는 간부처럼 보이는 놈이 두 사람을 향해 지금 낙수의 경비사정을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도 봉수 짐샌은 응태 총각에게 말하라는 뜻인지 말을 하다가 잘못하면 얻어맞는다는 속셈에서 인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어제 군인 일개 소대가 들어와서는 오늘 저녁에 습격이 있을 것이라면서 경찰과 보초들을 총동원해서 한 이십 미터 간격으로 마을을 빙 둘러 지키고 있다"

고 조금 과장을 하여 말했다.

군인들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고 반란군들이 경찰관들은 우습게보지만 군인들은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군인을 말할 때는 힘을 주어 말했고 보초에 관해서는 조금 과장을 하였으나 군인들이 면사무소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만약 거짓말이면 죽을 줄 알라면서 되물었다.

그 말을 받아 응태 총각이 가보면 알 것을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할 것이냐고 했다. 응태 총각의 말을 듣고 자기네들 끼리 그대로 낙수로 치고 들어가자는 패와 가지 말자는 패로 나뉘어 서로 주장을 하였다.

그러자 듣고 있던 학래가 나서서 금평으로 가자고 결정을 내리면서 두 사람보고 가로질러 가는 길로 앞장을 서라고 했다. 이번에도 응태 총각이 나서서 평촌에서 내려가는 길은 잘 알아도 이쪽 길은 밤이라 잘 모르겠다고 하자 학래 대장이 직접 앞장서더니 낙수로 가는 길로 150m쯤 가다가 왼쪽 언덕길로 올라 밭 가운데 큰 소나무 한그루가 있는 밭들을 가로 질러서 금평으로 내려갔다.

동네 안쪽에 있는 창귀 이샌 집 앞 큰 우물에 도착하자 두 사람을 꼼짝 말고 있으라고 세워두고서는 모두 마을로 들어가서 물건들을 털어가지고 나오더니 학래가 우리에게 가서 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않느냐면서 집으로 빨리 가서 자라고 보내주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평촌으로 올라오는데 몇 발짝을 가면 보초가 새우고 또 몇 발짝을 가면 세워 그때마다 대장이 보내줬다고 하니 두말없이 가라고 했다.

평촌 다리거리가 가까운 꼬깔바구를 올라오는데 봉수 짐샌이 가서 알려야 한다고 빨리 가자고했다. 알리러 간다는 건 생각지도 않고 있던 응태 총각은 겁이 났다. 그래서 가다가 들키면 죽는데 어떻게 갈 것이냐고 말을 하니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면 알리고 죽는 것이 낳고 반란군한테는 혼자 죽지만 순사 한 테는 가족이 다 죽을지 모르니 알리러 가야 한다고 했다.

듣고 보니 나이 먹은 사람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에 과연 그렇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더니 옷을 입고 있으면 눈에 잘 띄므로 홀랑 벗고 자기를 따르라고 했다.

두 사람은 다리거리에서 옷을 벗어 둘둘 말아 묶어 허리에 차고 원굴재로 가지 않고 익표 짐샌 집 산소가 있는 산등으로 올라가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좌측골짜기를 타고 내려가서 욈실로 돌아가는 샛길을 따라서 낙수 방앗간이 건너다보이는 강가에 다다랐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뛰었는지 홀랑 벗었어도 추위는 느낄 틈이 없었는데 나무와 가시에 얼마나 글켜 놨는지 온몸이 쓰라려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을 건너 방앗간 위로 넘어 가니 희한 모습으로 오는 우리들의 꼴을 보고 보초가 암호를 대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오느냐고 물었다. 일단 일일이 대답할 시간이 없어 암호만 대주고 나서 아랫도리만 꿰고 학교 건너편 원등에 있는 면사무소로 급하게 들어갔다. 그때 평촌에서 소개를 간 사람들은 학교에서 자고 있었다.

군인들이 아랫도리만 입고 온몸에 회를 쳐가지고 들어오는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옷을 입히고 앉히더니 차도 끓여 주고 안심을 시키려고 그러는지 술도 한잔씩 주면서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였다.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보고를 하였다.

두 사람이 졸다가 잡혔다는 말만 빼고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놈들을 잡을 수 있는지 방법도 말해보라고 했다.

이제야 봉수 짐샌이 나서더니 그 사람들은 분명히 송광사 쪽으로 올라갈 것이니 여기서 세부대로 나누어 가지고 한 부대는 솟구재로 넘어가 장정지(송광사삼거리)에서 매복하고 한 부대는 빨리 원굴재를 넘어가 평촌 앞을 지키고 나머지 한 부대는 금평(고대)으로 가서 몰아붙이면 될 것이라고 작전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면사무소를 지키는 한 부대를 남겨두고 출발을 했는데 다리를 건넜을 때쯤 되었을 때 총소리가 콩 볶듯이 들려왔다.

그러면 그렇지 삼거리에서 지키고 있던 그놈들 하고 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나서 다음날 들으니 다리를 건너자마자 지키고 있던 보초들과 전투가 붙어 솟구재로는 가지도 못했고 반란군들은 한실 쪽으로 돌아서 가버렸다고 했으며 전투성과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당연히 보초를 세웠을 것인데 그 생각도 못한 것이 속으로 부끄러웠다.』

이상이 학래 삼형제가 인솔한 반란군들이 보급투쟁을 나섰다가 군경과 마주쳐 전투가 벌어지기까지의 상황을 당시 보초였던 김응태 씨로부터 녹취한 사례를 정리한 내용이다.

 

다음은 그 사건 이후에 이어진 이야기이다.

『전투가 있고 삼일 째 되던 날 밤에 평촌 마을입구인 돌팍거리 사거리에 있는 응태 총각의 집 앞에 순태와 형기가 반란군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봉수 짐샌과 응태 총각에게 보복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들에게 적대행위를 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응징을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철칙임을 두 사람도 이미 알고 있기에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응태 총각이 자기 방에서 정영철이하고 태일이 세 사람이 함께 자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만히 들으니 누군가가 “그놈 집이 어디냐?” 하자 여기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순태의 목소리였다.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곧바로 옷을 움켜쥐고 뒷문으로 나가 담을 넘어 줄행랑을 쳤다.

갬박굴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엎드려서 들으니 집 앞이 소란하였다.

응태 총각이 없자 찾느라고 떠들어 대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에도 봉수 짐샌 집은 동네 제일 위쪽에 있으니 이미 피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때 낙수 방향에서 총소리가 나더니 총알이 우리 동네 앞의 원굴재를 향해 벌겋게 날아올랐다.

다섯 발마다 한발씩 들어 있는 예광탄이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낙수지서 뒤편 M1고지에서 날아오는 위협사격이었다.

“누가 빨리도 신고를 했구나!”

안도의 중얼거림이 튀어 나왔다.

그러자 반란군들이 더 이상 찾지 않고 모두 철수하여 돌아가 버렸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순간이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 하는 평촌 마을의 김응태(80) 노인은 그때 아차 했으면 지금 살아 있지도 못할 것인디, 라는 말에 이어 그래도 학래 그 사람들 덕을 많이 보았지, 하고 험난했던 그 시절을 회고하는 백발노안에는 허탈해 보이는 웃음과 함께 세월이 담긴 눈동자가 한없이 깊어 보였다.

ㅇㅇㅇ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그날로부터 영배 이샌은 이산가족상봉의 신청을 두고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만나서 무엇해!’

하는 생각이 자꾸 어른거렸다.

영배 이샌으로서는 아버지가 그들 때문에 수난을 당했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순태와 이 길조라는 친척에 대한 거리감이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그와 더불어 이웃들도 알아서 하라는 소극적인 권유도 크게 좌우를 하였다. 사실은 이웃들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다.

만약 이산가족상봉자로 선발되어 참석을 하려면 당연히 어머니가 어른으로 나가야 하는데 중환으로 누워 계신지가 오래되어 나갈 수 있을지도 문제였지만 가족들이 참석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준비도 갖춰야 할 터인데, 당시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어머니의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어 조용히 귀에다 대고 물었다.

“학래동생 순태와 아들 길조가 이북에 살아 있다고 만나 볼라면 신청 하라 그러는디 엄니는 어쩔라요?”

하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였다.

“옛날에 다리거리에서 반란군으로 가분 학래 말이요”

그랬더니 알았다는 표정이 얼굴에 비치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머리맡에 앉아 얼굴을 바라보고 잊으니 말없이 손을 저으며 돌아누웠다. 그순간 눈동자에 배어나는 물기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영배 이샌은 이산가족의 만남을 포기하고 말았다.

칠순을 목전에 둔 영배 이샌은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도 십여 년이 지났고 이산가족상봉의 설렘도 30여년이 훌쩍 흘러버린 지금 문득문득 그 일이 목에 걸려 어께 위에 올려놓은 털어버릴 수 없는 짐처럼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끝.

<이 글은 2007~2010 평촌마을 김응태 김천식(외송) 김채선 박의영 씨 등 여러분의 수차에 걸친 증언과 순천에 이주하고 있는 장본인 이 영배씨를 2회 방문하여 채집한 증언을 2011. 6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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