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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항일운동 유적지는

여수시립도서관 주관 ‘길 위의 인문학, 대한민국 오디세이, 100년’
31명의 시민들이 일제강점기 여수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 입력 2019.09.29 23:55
  • 수정 2019.10.15 16:49
  • 기자명 전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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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 항일운동 기념탑에서 찍은 단체사진

여수시립도서관 주관 ‘길 위의 인문학, 대한민국 오디세이, 100년’ 2차 탐방 ‘우리 지역의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아서’가 28일 실시됐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김병호 이사장이 강사로 나선 탐방은 화양면 창무리 윤형숙 열사 묘소와 소라면 고뢰농장 답사, 웅천 이순신공원 항일운동기념탑, 관문동 여수청년회관, 오동도 입구 등대산, 만성리 김홍식 아뜰리에 순으로 답사했다.

총 31명의 답사 참가자들은 ‘대한민국 오디세이 100년’ 강연을 들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중 14명의 학생들은 안산중학생, 청소년자원봉사사이트 ‘두볼‘을 통해 정보를 접한 학생 등 다양했다. 여수시청문화예술과 소속 직원들도 함께 했다.

'곡화목장분계성'이 있던 터에서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이 길을 따라 성벽이 있었다

첫 탐방 장소는 곡화목장분계성이다.

곡화목장은 말을 기르던 목장으로 조선 태종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화양면 화동리는 감목관의 수탈이 심해 관리들에 대한 주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종 6품 감목관(현감) ‘조정’ 이 화동리에 면사무소를 설치하려 했으나 마을사람들이 반대하여 나진으로 면사무소를 옮겨야 했다.

이후 감목관 조정은 이곳의 목자들을 의병으로 구성해서 부산포 싸움에서 맹활약을 한다. 그때 화양반도를 백야곶이라 불러, 이곳이 백야곶목장이 되었다.

광해군 시기에야 비로소 곡화목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종종 어르신들은 화양면을 ‘코퀘’라 부르는 경우도 있었는데 바로 코퀘가 곡화에서 나온 말이다. 백야곶 목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장 중 하나로 이곳부터 화양면 전체가 말을 키우는 목장이었다.

그러다보니 감목관도 현령과 같은 종6품 벼슬을 지닌 사람이 할 수 있었다. 섬에 말을 키우다보니 당연히 사람은 살 수 없었고 이러한 정책을 공도(섬을 비우는)정책이라 한다. 울릉도도 이에 해당하며 나중에 조선의 이 공도정책은 일본인들이 섬을 지배하는 꼬투리가 된다. ‘실효적 지배가 없으니 조선의 땅이 아니다’는 논리다. 일본의 이 지배는 ‘수토정책’(땅을 수탈하는 정책)이다. 이후 이곳은 기능이 약해지며 ‘고돌산진’, 줄여서 ‘고진’이 된다. 고진 성 밖을 고외, 안을 고내라고 부르게 됐다.

윤형숙 열사의 묘소에는 여수시에서 만든 비석과 어제 추모제가 끝나고 두고 간 헌화가 놓여 있었다

분계성을 따라 쭉 넘어가면 윤형숙 열사 묘소가 나온다. 답사날인 28일은 윤형숙 열사의 기일이기도 하다. 만세운동을 하다 팔이 잘린 윤형숙 열사의 고향이 화양면 창무마을이다.

윤형숙 열사의 본명은 ‘윤혈녀’이고 재판기록에 적힌 이름도 바로 이 본명이 적혀 있다. 그러다보니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두 이름이 동일인임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아 그를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런 이유로 윤형숙 열사는 다른 독립유공자들보다 늦게 추서됐다.

비가 오는 탓에 참가자들은 버스 안에서 김병호 이사장의 설명을 들었다. 유관순 열사가 병천장에서 만세를 부른 것처럼 윤형숙 열사도 장날 만세를 불렀다.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만세운동을 하던 윤형숙 열사는 헌병에 의해 일본도로 왼팔이 잘렸다.

그럼에도 윤 열사는 끝까지 만세를 부르다 결국 혼절하고 말았다. 여수에서는 윤형숙 열사를 ‘팔 없는 전도사’라 부르며 그녀도 사진을 찍을 때 한쪽 팔을 가리고 찍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는 그녀의 사진도 전부 오른쪽에서 일행 사이에 왼팔을 가리고 찍은 사진이라 한다. 윤 열사는 만세운동 외에도 계몽운동과 전도사 역할, 등 많은 일을 했다.

이후 윤 열사는 금오도 남면의 한 마을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피난을 와 손양원 목사와 같은 날 지금의 미평 새중앙교회 옆에서 돌아가셨다고 전한다. 참가자들은 김병호 이사장의 설명이 끝나고 차에서 내려 윤형숙 열사의 묘소에서 묵념을 했다.

버스에서 잠시 내려서 찍은 고뢰농장 터에 남은 붉은 건물

비로 인해 다음 장소인 화양면 용주리 고뢰농장도 차 안에서 설명을 들었다. ‘고뢰’ 는 일본어로 ‘다카세’로 읽는데 이는 농장 주인의 이름이다. 즉 ‘다카세’의 농장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1910년대 헌병경찰의 무단통치에 이어 192,30년대 식량증식사업 그리고 1931년 민족말살정책 순으로 한국에 식민지정책을 폈다. 이 일제강점기 설립된 일본인 회사 ‘고뢰농장(다카세농장)’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1922년 만들어졌다.

이들은 현재 소라면 관기마을과 대포마을, 봉산동 지역을 매립하고 그곳에 간척지를 지어 수확한 쌀 등을 수탈했다. 구시가지 중앙동 일대도 과거 모두 바다였으나 이 시기에 매립된 것이다. 고뢰농장(다카세농장) 자리에는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붉은 건물이 남아있다. 

물자수탈과 전쟁 수행을 위한 산미증식계획은 정해진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공출'이라며 모두 뺏어가 목표량을 채우는 식으로 진행됐다. 당연히 한국인 소작민에게는 아주 적은 양만 남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일본이 말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이며, 그 증거가 이러한 농장이다.

고뢰농장(다카세농장)이 지어졌던 이 자리는 아직도 짠기가 남아있어 벼에 하얀 소금기가 보일 정도다. 붉은 건물도 당시 지어진 그대로다.

웅천 이순신공원 항일운동기념탑에 새겨진 항일운동역사

점심식사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웅천으로 이동했다.

웅천 이순신공원 항일운동기념탑에는 잘 정리된 여수지역 항일운동사가 돌에 새겨져 있다. 유탁 장군이 장성포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연산군 이량 장군이 장군도와 돌산 사이를 막는 ‘장군성’을 만들어 왜구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유일한 수중성이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5년 전 손죽도에도 왜구가 쳐들어와 이대원 장군이 물리쳤다. 그때 한 좌수사가 이대원 장군의 공을 가로채려다 실패하자 결국 다음해 왜구가 쳐들어와도 병력을 지원하지 았다. 이대원 장군은 이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현재 이대원 장군 사당은 손죽도에 있다. 송강 정철의 큰아들 정기명은 이대원 장군의 죽음을 기리며 ‘녹도가’를 쓰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보통 7년 전쟁이라 말하지만, 여수에서는 8년 전쟁이라 부른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 1년 전 여수에 와서 거북선을 만드는 등 준비를 하는 기간까지 포함했기 떄문이다. 지난달 열린 문화재 야행 주제가 ‘임진왜란, 8년 전쟁’ 인 이유다.

여수에서는 1909년 어민들이 중심이 된 섬지역 의병활동 또한 활발했는데 이는 그간 일본 어민들과 잦은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합방 되면서 비밀결사 형태로 항일 운동이 전개되는데 그중 하나가 고종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은 대한독립의군부다. 임병찬은 대한독립의군부 전남 순무대 장(巡撫大將)으로 활동하다 거문도로 유배를 가고 결국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웅천 이순신공원에는 왼팔이 잘린 윤형숙 묘사의 모습도 돌에 조각되어 있다. 태극기를 든 팔이 떨어져 있는 사진

임병찬 선생은 이때 유배생활을  ‘거문도 일기’라는 책으로 남겼고 그 책에는 당시의 생활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밑에서 의병활동을 한 학생인 원정상과 원종상 형제는 이후 1929년 대표적 노동운동인 ‘원산항만노조운동’ 집행위원장을 맡아 이끌어가기도 했다. 김병호 이사장은 “이들 두 형제를 하루 빨리 독립운동가로 추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이순신공원 항일운동기념탑에는 여수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 41명의 이름과 설명을 돌에 새겨놓았다. 최근 이봉금, 정영한, 박창래, 최풍룡, 김귀문, 김민석 6명이 추서됐는데 이들의 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편 임병찬은 최익현과 의병을 일으킨 사람으로 대마도에 함께 끌려가 최익현 선생이 사망하자 모든 뒷일을 도맡기도 했다.

웅천 항일운동 기념탑 전체 사진 - 승리의 모양 V자를 형상했다

다음 장소는 관문동 항일운동 근거지 여수청년회관이다. 골목에서 현재 관문서1길 용은상회까지 쭉 이어진 길이 전라좌수영 동문터로 오는 길이다. 용은상회 옆 골목이 좌수영의 가장 큰 길이라 줄다리기 같은 행사들이 이 골목에서 다 이뤄졌다. 김병호 이사장은 “후에 성을 재현한다면 이 골목길을 따라 성벽을 만들면 될 정도로 잘 남아있는 터이다“고 말했다.

현재 동헌 복원을 위한 발굴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황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국가사적으로 지적되고 동헌 복원이 완료되면 이 거리를 전라좌수영 옛 거리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여수청년회관

김병호 이사장은 ”2022년 진남관이 복원 완료되면 거문도뱃노래나 현천소동패전수관 같은 전통문화전수관을 이곳 시내에 만들어 활성화시킬 계획“이라 말했다. 이런 도시복원사업은 역사적의미와 도시재생의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좌수영성벽은 골목을 따라 고소대까지 이어지는데 골목이 완벽하게 남아 있어 성벽 복원은 이 청년회관 앞이 최적의 장소라 한다.

구 청년회관 앞에는 이름표가 사라진 형상이 남아 있는데 이는 이 건물이 도서관, 이순신전수관 등 다양한 장소로 쓰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리모델링하면서 건물이 비워진 상태다

다음으로 여수 구 청년회관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1호’로 과거 이 자리는 ‘덕지’라는 연못이 있던 자리였다. 김영수(김등) 수사가 전라좌수영 방화수를 만들기 위해서 물이 나올만한 곳을 골라 집을 헐고 인공 연못을 만들었다 한다.

그러다 서울 파고다공원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진행되면서 이형령, 김홍식 등이 여수로 내려와 ‘맞돕회’(맞잡고 돕는 모임)를 조직했다. 이곳이 덕지를 메우고 만든 맞돕회 회관이다.  구 청년회관 맞은편에는 경찰서가 있었는데 이 점에서 여수 청년들의 기개를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이 구 청년회관 건물은 1960년 세워진 여수 최초 도서관 건물이다. 이후 현암도서관이 생기며 도서관 자료들은 모두 그곳으로 옮겨졌다.

오동도를 향하는 길에서 마주한 터널

오동도 입구에 위치한 등대산을 가는 길에 버스는 종포를 지나쳤다. 일제시대에 이곳 종포는 ‘일출정’이라 불렸다. 따라서 '종포'라는 명칭은 새벽계 새복계, 새복종 등을 거쳐 탄생한 이름라 추정된다. 

난중일기에는 이 종포를 ‘소포’라고 부르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 이순신 장군이 여기서 거북선을 시범운행했기 때문이다. 물살이 센 곳을 ‘쏘’라고 부른 데서 따온 명칭이다.

독립운동사를 보면 12월에 이곳 종포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3.1운동이 끝나고) 늦었지만 여수의 기개를 보여주기 위함이다”고 나온다.

오동도를 향하는 터널 안

한편 '등대산'이란 명칭은 오동도 등대가 세워지기 전에 이 산에 등대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산학교학생들이 독립운동 모의를 이곳 등대산에서 했다고 한다. 일행은 등대산을 곧바로 지나쳐 만성리로 향했다.

만성리에 있는 김홍식 화가의 아뜰리에

만성리에는 여수출신 화가이자 독립유공자인 김홍식 화가의 아뜰리에가 남아 있다. 아뜰리에 근처에는 '만흥가'가 있었고, 그 자재를 갖다가 아뜰리에를 만들었다.

1921년 조직된 맞돕회 주멤버인 김홍식 화가는 호남 최초의 서양화가이기도 하다. 만세운동을 하다 퇴학당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김홍식 화가는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김홍식 화가는 이곳에 살면서 작품활동과 맞돕회 등에서 여수청년운동도 활발히 참여했다.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김홍식 화가는 해방 후 고생을 하기도 했다. 부잣집인 김홍식 화가의 집안에 맞게 아뜰리에 주변 나무들도 모두 조경한 나무들이다. 집 뒤에 쓰러진 벽오동나무 열매는 봉황이 먹는다고 한다.

김홍식 아뜰리에 앞에서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이 벽오동 나무는 중국에서 오동나무라고 불린다. 동양화에도 벽오동 나무를 닦는 그림이 자주 나올 정도로 귀한 나무다.

김홍식 화가는 이 아뜰리에게서 바라본 풍경 (현재 북초등학교 방향) 등 많은 그림을 그렸다. 김 이사장은 이 아뜰리에를 잘 복원하기 바라지만 이곳은 개인사유지로 아직도 후손들이 복원을 반대하여 그대로 두고 있는 상황이다.

정남미, 박상원 부부와 딸 박소윤(14)

이날 탐방에 참여한 안산동에 거주하는 정남미, 박상원 부부는 14살 박소윤 양과 함께 왔다. 공단 안에 있는 동서화력에 근무하는 박 씨는 1년 전 여수로 발령을 받았다. 이들은 여수를 더 잘 알기 위해 신청했다고 한다. 정 씨는 “독립운동유적지가 여수에도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았다. 여수가 단순 관광지가 아님을 알았다”고 말했다.

덕충동에서 온 주연정 씨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과 함께 왔다. 그전부터 꾸준히 쌍봉도서관 인문학 강연을 들어왔다는 주 씨는 “그동안 강연은 우리나라 전체 독립운동가를 설명했는데, 오늘은 여수 지역의 독립운동가와 유적지를 위주로 설명해서 도움이 많이 됐다”고 말했다.

신월동에서 온 이정옥(74) 씨는 “여수에 계속 살았지만 오늘 처음 온 곳이 많다”고 말했다. 직장동료와 함께 온 이 씨는 “그동안 ‘길 위의 인문학’ 강의를 꾸준히 들어왔고 오늘 탐방을 통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을 세세히 알게 되어 뿌듯하다. 여수에 살면서도 관련 역사를 잘 알지 못했는데 이 기회로 다시 한번 학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문화체육부 공모사업 ‘2019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은 1차 광양 정병욱 가옥 탐방에 이어 이날 2차로 여수지역 내 독립운동 관련 장소를 답사했다. 이는 올해가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이다.

오는 10월 3차 강연이 두 번 예정돼 있으며 10월 26일에는 안중근 의사와 이희영을 주제로 탐방에 나선다. 11월 박시백 선생 특강을 끝으로 ‘대한민국 오디세이 100년’ 프로그램은 막을 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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