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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로 몰린 박찬길 검사의 억울한 죽음

유족들, 여순사건 관련 자료 법무부에 정보공개 청구
'정보 부존재' 회신에 분통

  • 입력 2021.09.02 10:05
  • 수정 2021.09.07 14:59
  • 기자명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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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찬길 검사 사건에 대해 대화하는 주철희 박사와 박경진 목사 부부  ⓒ정병진
▲고 박찬길 검사 사건에 대해 대화하는 주철희 박사와 박경진 목사 부부  ⓒ정병진

여순사건 당시 '빨갱이 검사'로 몰려 즉결처형당한 박찬길 검사(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당시 38세) 사건 관련, 정부가 1949년 6월 군·검·경 합동수사반이 행한 진상 조사 자료조차 '부존재' 처리한 사실이 확인됐다.

박 검사의 아들 박경진 씨(75)는 "부친 박찬길 검사의 순천지청 근무 관련 정보공개 청구를 법무부에 했지만, 최근 '부존재 통지'를 받았다"며 정부의 무책임한 처사에 분통을 터뜨렸다.

박찬길 검사의 죽음, 검경 갈등의 뿌리

현직 박찬길 검사 즉결처형 사건은 이른바 '검경 갈등'의 뿌리와도 같은 대표적 사건으로 알려졌다. 여순사건이 발생할 당시 박 검사는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차석 검사로 2년째 재직 중이었다. 그는 여순사건으로 봉기군이 순천을 장악하자 지인의 집 장작더미 등에 숨어 지내다가 진압군이 순천을 탈환한 뒤 검사 관사에 있다가 1948년 10월 23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이 박 검사를 체포한 죄목은 "반란군에 뽑혀 인민재판 재판장을 했다"는 거였다.

진압군은 1948년 10월 23일~25일 사이 박찬길 검사 등 21명을 순천농림중학교에서 재판도 없이 총살했다. 박 검사가 반란군의 인민재판 재판장을 했다는 혐의는 '사실 무근'이었음은 곧 드러났다. 당시 신문 <남조선민보>는 1948년 11월 12일자에서 보도에서 "또한 교인 박춘식씨 말에 의하면 순천에는 소위 인민재판은 없었고 다만 치안대가 있어 재판하였는데 황의원과 친우인 박찬길 검사가 판사가 된 일도 전연 없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경찰이 '적구(赤狗) 검사'로 지목해 재빨리 처형한 '현직 검사 총살사건'은 그 무렵 대대적인 '빨갱이 색출과 처형'이라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언론의 관심을 그리 끌지 못하였다. 이듬해 유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한 뒤에야 당국은 1949년 6월 '군·검·경 합동수사반'을 조직해 현지에 파견하는 등의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법무부 장관 권승렬이 국회에서 보고한 내용(제5회 국회임시회의 제14호 속기록)을 살펴보면 조사 결과 박찬길 검사는 반란군에 뽑혀 재판장을 한 사실이 전혀 없었다. 그럼 어찌된 일일까?
  
박 검사가 처형당하기 며칠 전, 어떤 경찰관이 산으로 도망치는 좌익을 추격하다 총을 쏴 나무꾼의 다리를 맞춰 쓰러뜨렸고 한발을 더 쏘아 그를 죽였다. 경찰의 과실치사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사건을 맡은 박찬길 검사는 해당 경찰관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하였다. 이때부터 순천지역 경찰에서는 박 검사를 '적구(赤狗) 검사' 또는 '빨갱이 검사'라 칭하며 그를 좌익으로 몰았다. 그러다가 여순사건이 터지자 그 혼란을 틈타 박 검사를 체포해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해 버린 것이다. 

광주지검에서도 박 검사 총살사건에 대한 별도의 진상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박 검사는 인민재판 재판장을 한 사실이 없었고, 경찰이 박 검사에 대해 앙심을 품고 여순사건의 와중에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그를 서둘러 처형하였음이 밝혀졌다.

박 검사 총살은 전남경찰청 부청장 최천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당시 진압군 제5여단장 김백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다. 법무부는 이 같은 진상조사 결과를 토대로 박 검사 총살에 관여한 최천과 경찰관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하였다. 하지만 전남경찰의 극렬한 반발, 자유당 정권의 경찰 비호 등으로 이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러 박 검사의 억울한 죽음은 사람들 기억에서 흐릿해졌다.

법무부의 무책임한 처사

▲부친인 고 박찬길 검사에 대해 증언하는 박경진 목사 ⓒ정병진
▲부친인 고 박찬길 검사에 대해 증언하는 박경진 목사 ⓒ정병진

그런데 8월 31일 오후, 박찬길 검사의 둘째 아들 박경진 목사 부부가 주철희 박사(역사학, 여순항쟁 연구자)를 만나고자 창원에서 여수로 찾아왔다. 그는 주 박사의 여순사건 관련 저서 <불량국민들>에서 부친 관련 내용을 읽고서 그 억울함을 풀 길을 찾고자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박 목사는 부친의 인적사항이 적힌 제적부를 가져왔다. 제적부에 의하면 박찬길 검사는 1910년 4월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황해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법대에서 공부하였으며, 해방 이후 가족을 이끌고 월남해 검사로 임관해 순천지원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의 죽음과 관련해 박경진 목사는 "당시 나는 생후 10개월 아기 때라 기억이 전혀 없다. 다만 모친과 누님, 형님 등으로부터 여순사건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하였다. 이어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함께 끌려 가셔서 함께 처형당하셨다"고 말했다.

박찬길 검사만 아니라 그의 부친(박인서)도 함께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알려진바 없다. 박 검사와 함께 근무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서기 방기환씨(당시 30세)가 함께 처형당하였다는 사실 정도만 언론 보도로 남아 있다.

박 목사의 부인은 "'황성수 국회의원, 길전식 사무총장 등이 집에 찾아온 적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 결혼 초기에 시어머님께 들은 적 있다"고 증언하였다. 실제로 고 황성수 전 국회의원은 황두연 전 국회의원의 조카로 박찬길 검사와 '결의형제'를 맺을 정도 친분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박 목사는 부친 사건 관련 진상 조사 기록을 받아보고자 지난 7월 법무부에 정보공개청구를 하였다. 하지만 법무부는 지난 7월 6일 '정보 부존재' 회신을 통지하였다. 기자가 지난 2018년 11월 법무부에 박찬길 검사 사망 사건 관련 정부의 "합동조사단(대검찰청 정창운 검사, 검찰과장 선우종원 검사, 국방부 정훈감 김종문 중령, 내무부 치안국 수사지도과 김남경 총경 등으로 구성)의 조사 결과 보고서와 국가가 유족들에게 취한 조치한 서류"를 정보공개 청구를 하였을 때도 법무부 순천지청은 "보존 서류가 아니라서 공개가 불가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박경진 목사는 "그동안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변호사 상담도 받아봤지만, '특별법이 통과돼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려왔다"면서 "그런데 특별법이 통과되어 관련 자료를 청구했더니 법무부가 '정보 부존재' 통지했다"고 아쉬움과 답답함을 토로하였다.

이에 대해 주철희 박사는 "지난 6월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토록 유명한 사건 기록조차 '부존재하다'고 답변한다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면서 "적어도 정부가 1949년에 박 검사가 무고히 총살당했음을 밝힌 바 있기 때문에 유족이 요구하기 전에 정부 스스로가 관련 자료를 찾아 내놓고 이제라도 순직 처리 등 합당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박경진 목사는 부친이 다닌 학교의 '학적부' 등 관련 자료를 더 모아 정부를 상대로 탄원하고 부친의 명예회복과 배·보상을 요구할 계획이다. 정부가 합동 조사단을 꾸려 진상 조사를 벌인 박찬길 검사 총살 사건 기록마저 법무부가 '정보 부존재' 처리를 한 사실은 여순사건특별법 국회 통과로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진상 규명에 대한 부푼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란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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