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흔 한 살 김점심 씨가 자신의 큰며느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글이 알려져 주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여수 소라면 가사마을 노인회장 강장원 씨는 5일 기자를 만나 "마을 주민 다섯 명이 글의 사연을 듣고 다들 눈물을 쏟았다"고 하였다. 그는 "부모 자식, 형제지간에도 재물 앞에서는 다툼이 생기는 게 잦은 요즘 세태에 보기 드문 일이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글 내용이 궁금해 강 회장에게 부탁해 받았다. 해당 글은 김점심 씨의 둘째 아들이 어머니의 구술을 대필한 형태였다.
김점심 씨는 자신의 큰아들이 "기울어진 가세를 세워보겠다"고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가 한동안 명절 때조차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잘못된 삶을 살고 있으면 어쩌나" 몹시 염려하였는데, "4년 동안 한 푼 안 쓴 월급"을 털어 "부모가 진 빚인 쌀 여덟 가마를 갚았다"고 하였다. 큰 아들은 명절조차 집에 내려가지 않고 근면 성실히 일해 부모의 빚을 모두 갚았다는 거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큰 며느리의 오빠가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 큰아들은 결혼하였다. 큰아들 부부는 서울의 단칸방에 살면서 부지런히 일해 모은 돈으로 부모님이 사시는 초가집부터 뜯고 기와집으로 지어 선물하였다. 또한 큰며느리는 "지병(소화장애)으로 소다(소화제 대용)를 달고 살며 술 담배에 의지해" 몸이 편찮던 시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돌봐 더욱 건강한 딴 사람으로 바꿔 놓았다. "시아버지가 위암말기로 중환자실에 있을 때도 대소변을 받아내며 불평불만 없이 돌보았다"고도 하였다.
큰아들 부부는 여수 시내에서 큰 중국집(중화요리)을 열어 동생 세 명을 직원으로 썼다. 이 음식점의 한 달 수익이면 여천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 장사가 잘되었다. 하지만 큰아들 부부는 "우리만 잘 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사이좋게 시간을 정해 맡아서 하라"며 가게를 동생들에게 넘겼다. 김점심 씨는 "아들이야 피를 나눈 형제라 그럴 수 있다지만 며느리는 사실 남인데 그런 큰 결정을 해 주니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고 하였다.
남편을 사별한 뒤 김점심 씨는 큰 아들 내외가 모시겠다는데도 극구 혼자서 살고자 하였다. 그러자 아들 부부는 근처에 집을 지어 어머니를 계속 돌보았다. 김 씨는 "금년 여름 복통과 담석시술 등으로 병원에 살다시피 했는데 그때도 큰며느리가 정성껏 간병하였다"고 하였다. 이어 "최근 큰며느리는 내가 사는 집으로 살림살이를 옮겨 밤낮으로 지키며 돌봐 주는 중"이라 덧붙였다. 김점심 씨에 따르면 큰며느리(주공순)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자랐다. 그는 "시집올 때 시부모님을 자신의 부모님으로 생각하겠다고 작심"하였고 실제 그렇게 하였다.
지난 11월 어느 날 며느리가 "엄마 오늘은 날씨가 참 따습네~요. 오늘 목욕합시다~"라고 말하자, 김점심 씨는 "난 니 마음이 더 따습다. 좋다~. 늙은이의 입가에 이런 미소가 드리워지는 게 참 좋고 감사하다"며 글을 맺었다.
이 글에 대해 큰아들 문영식 씨는 7일 기자를 만나 "그 당시만도 다들 힘들 때인데 우리만 아니라 그런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며 "별 것도 아닌데 알려져 민망하다"고 하였다. 부모님이 어찌 큰 빚을 지게 됐는지 묻자, "아버지가 유산도 없이 많은 자녀를 키우다 진 빚이다"고 하였다. 이어 "(글에서는) 쌀 여덟 가마라 하였지만 어머니가 잘못 아신 거다. 반 가마 빌린 게 열여섯 가마 반으로 빚이 늘었다. 내 나이 스물네 살 때인데 2년 간 일해 한 푼도 안 쓴 돈으로 그걸 갚았다. 40년 전 이야기다"고 말했다.
그는 "열여섯 살 때 서울에 올라가 일하기 시작했고 나름 계획이 있어 삼 년 동안 고향 집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집에 연락도 안 했는지 묻자, "그 당시는 전화도 없어서 가끔 편지를 하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문 씨는 당시 "서울 명동의 중화요리집에서 부지런히 일했고 나중에는 주방장이 됐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가게를 차려 답십리와 장안동 등지에서 잘 운영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또 "여수 시청 옆에 중화요리집을 열었을 무렵 그곳은 허허벌판이었다. 다들 이런 곳에서 장사가 되겠냐고 그랬다. 하지만 곧 장사가 무척 잘됐다. 복이 터진 거다"라고 하였다. 동생들에게 가게를 넘긴 계기에 대해선 "나는 종교가 없지만, 어느 모임에서 삼랑진을 다녀올 때였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떤 법사의 테이프를 틀어놨더라. 그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아 결심하게 됐다. 물론 그 전에도 그런 마음은 품고 있었다"고 하였다. "나만 잘 살면 안 된다. 동생들도 함께 잘 살아야 한다"고 평소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어 "그 때가 마흔 두 살이었는데 동생들에게 1년 씩 가게 운영을 맡겼고 지금은 동생들도 다들 기반을 잡고 잘 산다"고 하였다.
김점심(91세) 씨가 큰며느리에 대해 쓴 글 전문 |
우리 집 큰며느리는 내 나이 49살에 시집을 왔습니다. 초가집 두 칸방 허름하기 짝이없는 그런 집에 도시 여자가 시집온다는 건 나조차도 상상이 어려운 일이였지요.
결혼 반지 하나 끼워주지 못한 가난을 원망하기보단 그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큰 아들 내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그동안 한푼한푼 모아온 돈을 자기들 지하 단칸방 모면을 위해 쓰기 보단 쓰러져가는 초가집부터 뜯기 시작했습니다. 기와 집을 짓어 부모님께 선물했던겁니다. 우리 사는 형편으론 도저히 할수도 없고 상상도못할 그런 일이였죠. 어미인 나는 너무 미안한 마음과 너무 고마운 마음에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즈그 아부지는 예전보다 더 건강한모습이 되었고 큰며느리의 상냥한 말투와 태도에 언제 그랬냐는 듯 딴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우리 삶은 이렇게 서서히 변하고 있었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져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우리 삶이 그 한사람으로 인해 변하기 시작했으닌까요. 한달 수익이면 그때 돈으로 여천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를 살정도 였으닌까요. 근데 큰아들 내외는 우리만 잘살면 안 된다고 그 잘되던 가계를 동생들에게 주면서 사이 좋게 시간을 정해 너희들이 맡아서 하라고 쥤답니다. 얼마나 큰 결정입니까? 밤이면 배가실실아파 화장실 가길 서너 번... 기력이 너무 없어 눈만껌뻑껌뻑 아 이렇게 가는구나라고 생각 할 정도였으닌까요. 그런데 또 감사하게도 큰며느리의 지극 정성의 병수발로 호전되어 6개월 만에 죽에서 밥으로 식단이 바뀌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