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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섬 생활이 싫어 간호사 된 장미연 씨

[인터뷰]며느리, 아내, 엄마, 간호사의 1인 4역하면서도 문예창작 교실 다니는 장미연
창작에 대한 열망으로 시 쓰기 시작해

  • 입력 2021.12.27 13:37
  • 수정 2021.12.27 14:00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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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아내, 엄마, 간호사의 1인 4역을 하면서도 문예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장미연씨 모습 ⓒ 오문수
▲며느리, 아내, 엄마, 간호사의 1인 4역을 하면서도 문예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장미연씨 모습 ⓒ 오문수

21일(화), 여수시립환경도서관에서 이민숙 선생님이 강의하는 자연사랑 문예창작 교실에서 장미연씨를 만났다. 수업 시작 시간에 약간 늦어 바쁜 걸음으로 들어온 그녀는 강의 내용을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이민숙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각자가 지어온 습작을 발표하는 시간이 됐다. 장미연씨가 자신이 지은 시를 발표했다. 다음은 그녀가 발표한 <나는 누구인가?> 싯귀이다.

여수시립 환경도서관에서 이민숙 선생님으로부터 자연사랑 문예창작 강의를 받는 장미연씨 모습 ⓒ 오문수
여수시립 환경도서관에서 이민숙 선생님으로부터 자연사랑 문예창작 강의를 받는 장미연씨 모습 ⓒ 오문수

"베풀 장, 아름다울 미, 연꽃 연/ 이 세문장이 모여 만들어진 내 이름/ 나는 누구인가?

우리 부모님 농사짓고 소팔아서 나를 키우셨고/ 세월의 한 땀 한 땀 바느질 기울여 색동옷 입혀주셨으니/ 부모님 이름 드높일 수 있게 잘 살고 싶은데 하루하루 무겁고 끝을 모르는 터널 같지만/ 내 이름 석자는 아직 살아있다.

나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생명을 키우는 어미도 되고
시부모를 공경하는 며느리도 되고 / 남편을 지지하는 아내도 되고
죽어가는 불꽃을 지켜봐주는 간호사이기도 하다/ 고맙고 희망을 되새기고 싶다

받은 만큼 베푸리라/ 지금껏 걸어왔던 길을 부끄럽지 않게/
앞으로, 앞으로, 힘차게 걸어나가보리라"


듣고보니 늦은 이유가 있었다. 며느리, 아내, 엄마, 간호사의 1인 4역을 하며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바쁜 시간에 짬을 내 문예창작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다. 그녀 고향은 비렁길로 유명해진 아름다운 섬 금오도로 여수에서 가깝다.

금오도 끝자락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난한 섬 살이가 싫어, 중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취업해야만 하는 현실이 싫어 선생님을 따라 순천으로 나와 간호사가 됐다.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도 문예창작 공부에 열심인 그녀의 삶이 궁금해져 대화를 시작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선생님을 따라 순천으로 나가 학교다녔다는 데 이유는 무엇이며 왜 하필 선생님을 따라갔나요?

▲금오도 심장리 미포 모습으로 장미연씨의 고향 마을이 보인다. ⓒ장미연
▲금오도 심장리 미포 모습으로 장미연씨의 고향 마을이 보인다. ⓒ장미연

음...중학생시절로 회상해보니 벌써 26년전쯤 일이네요. 여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남중학교까지 별탈없이 마쳤을 때, 우연한 기회에 이장우 은사님의 권유로 순천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금오도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그당시 여남초등학교 6년, 여남중학교 3년을 보냈고 이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한참 고민할 때였죠. 아시다시피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의 전환은 몸과 정신이 질풍노도의 시기죠. 그당시 16살의 저는 외부 세계는 전혀 몰랐고 도시에 나가려면 배를 타고 2-3시간 나가야하니 두렵기도 했어요.

솔직히 우리집 사정에 유학은 가당치도 않아보였어요. 왜냐하면 주말마다 농사짓는 부모님을 도와 보리타작부터 고구마수확까지 5형제가 도맡아하고 있었으니 말이죠. 한참 더운 8월쯤에 고구마를 수확하고나면 등에 땀이 비오듯합니다. 엄마의 몸빼는 더없이 정다운 저의 작업복이구요.

저를 포함한 언니 오빠들은 모두 방목형 자식들로 어릴때 장난감은 마당에 기어다니는 지렁이나, 뒷산에서 자라던 대숲의 대나무, 또는 집에서 키우던 닭장의 닭들, 돼지우리의 돼지5-6마리들, 외양간의 소 몇마리 등이었죠. 금오도 심장리 미포태생인 아버지를 따라 심포에 사시던 엄마가 시집오셨어요.

어릴 때 저는 "왜 나는 농사많은 집에서 태어났을까? 왜 도시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에 대한 질문을 하며 계속 중얼거렸지요. 또한 저희 언니오빠들을 포함하여 당시에 많은 학생들은 중,고를 졸업후 바로 수도권 공단지역으로 취업을 하는 터여서 저는 소위 공순이가 되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때 저의 담임선생님이자 수학선생님인 이장우 은사님을 만났고,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시골에서 배를 타고 순천에 있는 순천여자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여 학교 근처에 전세방을 얻어 할머니와 1년을 지냈습니다.

-순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간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시절 얘기를 해주세요.

나를 돌좌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저는 더이상 누군가의 품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밥을 먹고 다닐 처지가 아님을 직시하게 되었는데 순천간호전문대학 입학 쯤이었을것입니다. 솔직히 고등학교 입학때부터 대학교 진학후 3년간 총 6년은 제게 치열한 삶이었어요. 드라마나 여느 평범한 집에서 보여주는 느긋한 학창생활은 꿈도 못꾸었죠.

▲ 딸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장미연씨 엄마는 딸의 대학 학비를 위해 마지막 남은 소까지 팔았다. ⓒ 장미연
▲ 딸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장미연씨 엄마는 딸의 대학 학비를 위해 마지막 남은 소까지 팔았다. ⓒ 장미연

취업을 늘 염두에 두고 여상을 다니면서도 방학때는 어김없이 집에 내려가서 농사일을 도와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뼛속까지 농사꾼이셨고 제 어릴적부터 보아왔던 그많은 가축들은 전혀 낯설지 않았지요. 염소 2-3마리, 닭 몇마리 , 돼지 몇 마리와 소도 2-3마리키우셨었는데요, 이상하게 어느순간 가축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더라구요. 그땐 전혀 몰랐습니다. 저를 위해 부모님은 염소도 팔고, 돼지도 그리고 소도 마지막 한 마리까지 팔았다는 사실을요.

전 학교다니면서 돈이 그리 많이 드는지 늦게서야 안거죠. 돈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저를 위해 매년 천만원이 넘는 학비를 대시느라 부모님의 등골은 휘어지고 있다는걸요. 대학 1년때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커피숍, 호프집 서빙을 다녔습니다. 그것도 틈틈이 하다가 대학교 2학년 쯤에는 간호학과 실습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못할 때라 어쨌든 3학년까지 우여곡절 끝에 마쳤어요.

-간호사가 되어 환자를 돌보며 가장 기억나는 사건은?

15년 가까이 일하면서 20대 때는 급성기병원에서 활기차게 일했고요, 30대 ~30대후반 까지 여러 요양병원에 근무해봤고 현재는 여수시립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중 늘 겪으면서도 아팠던 부분은 죽음을 직접 목격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동네어르신이었을텐데 오늘은 병상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 여성이든 남성이든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죽음이 찾아오지요.

저는 고등학생때 친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어렴풋이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었는데요, 그때는 학교를 다니고 단순히 살아가고 있음에만 집중하였던 나로서는, 죽음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대학졸업후 병원에 취업하여 경증에서부터 중증 환자들을 케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는 동안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것 같습니다.

1년 전쯤에 모 환자분이 요양병원에서 말기암으로 투병중이셨어요. 마침 제가 근무하던 병동에 계셨었고 그때 코로나여파로 가족들도 방문이 뜸해졌고요. 그 환자분은 젊을때 자수성가한 분이고 장사에 도가 튼 분이셔서 상당한 토지와 통장을 갖고 계셨는데, 제대로 유언을 하지 못하고 쓰러지셨었나봐요.

장례식 당일, 고인이 누운 침상옆에서 자식들이 서로 주먹다짐하며 유산에 대해 티격태격 다투던 모습은 지금까지 잊지 못합니다. 인간의 물질적 욕심과 이기심으로 이렇게까지 재산다툼이 심해질 수 있나싶었고요, 고인이 된 그 할머님은 과연 맘편히 저승길에 가셨을까 마음이 짠합니다.

두 번째는 20대 위암투병 중이던 환자분이 미취학 아동 아기들을 두고 힘겹게 눈을 감던 일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같은 엄마로써 엄마를 잃은 아이의 슬픔이나 남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 같았고요. 곱디 고왔던 환자의 얼굴이 위암투병 중에 변해가는 모습또한 충격이었어요. 보기좋던 얼굴살은 쏙 빠지고 앙상한 마른가지처럼 뼈만 남게 되었지요.

환자 중에는 자해를 하거나 자살시도 실패로 입원한 경우도 있었어요. 어느날 젊은 남자가 농약을 마시고 음독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한참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나중에 깨어났을 때는 드라마틱한 감동이었어요. 마지막까지 죽을 힘을 다해 살라는 말이 있듯이 간곡히 살아달라고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직장생활 10년쯤 되면 초창기에 다짐했던 각오가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져들게 되는데 어떻게 극복했어요?

환자분들과 매일매일 지내는 동안 생을 포기했던 환자들이 건강을 회복해 퇴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힘듦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일어서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에서 저자 나폴레온힐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에 따라 미래를 바꿀 수 있다. 타오르는 소망을 지닌 한 누구나 새롭게 자기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볼 수 있다. 성공을 눈앞에 두고 중도에서 포기한다면 이름도 모르는 다른이에게 승리를 넘겨주고 마는 것이다.

저는 일하는 엄마이고 늘 시간에 쫒깁니다. 원하든 원치않든 말이죠! 엄마가 되고보니 지금까지 살아왔던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정말 어떤말로도 표현하기가 힘들정도로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오르락내리락 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깊은곳에서는 내 감정, 인생의 희로애락을 글로써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피어오르고 있었지요

초등학교 때 책 읽는것 자체를 좋아하였고 간간이 친구들에게 습작하여 나눠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만생각해보면 그땐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그저 좋아서 그랬던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을 낳고 키울때는 책을 너무 멀리 했었고 제 꿈도 잃었었는데요, 2019년부터 책을 다시 들면서 어느 순간 저도 명인들처럼 좋은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해풍맞고 자란 방풍밭 너머에는 남해바다의 파도가 넘실댄다. 장미연씨는 이 언덕을 넘나들며 문학인의 꿈을 키웠다. ⓒ장미연
▲ 해풍맞고 자란 방풍밭 너머에는 남해바다의 파도가 넘실댄다. 장미연씨는 이 언덕을 넘나들며 문학인의 꿈을 키웠다. ⓒ장미연

이민숙 선생님은 샘뿔인문학연구소를 운영하시면서 환경도서관에서 강의도 해주시고 정말 열정적인 분이셔서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10년 후, 또는 20년 후에 나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것은 저의 몫이자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하나의 사명인것 같습니다. 문예창작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을 채워나가게 되어 한없이 즐겁습니다. 물론 단기간에 시를 뽑아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평생의 숙제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창작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태초부터 창작을 해왔기에 지구상의 인류가 존재하고 우주에 대한 섭리를 깨닫는 것처럼요. 어렵겠지만 욕심을 더 내본다면 30년 후에는 제 이름을 건 문예재단을 세우고 싶어요.

그녀와 대담을 마치고 헤어지며 그녀의 꿈이 이루어지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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