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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산자수려한 섬진강을 가다

3개도 11개 시 군의 젖줄인 섬진강

  • 입력 2023.03.15 07:25
  • 수정 2023.03.15 07:56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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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을 방문한 등산객들이 '섬진강발원지' 표지석과 샘을 둘러보고 있다.ⓒ오문수
▲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을 방문한 등산객들이 '섬진강발원지' 표지석과 샘을 둘러보고 있다.ⓒ오문수

기후변화 때문인지 요즈음 전국이 가뭄으로 시달리고 있다. 특히 곡창지대인 호남지방 들녘 농작물이 가뭄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해서 어릴 적 수영을 배우면서부터 섬진강에서 뛰놀던 생각이 나 섬진강 일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하천은 원시시대부터 음료수원이자 교통로이며 농경지를 제공해왔다. 증발된 수증기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흐르는 순환 과정에서 가장 역동성을 띄는 공간이 하천이다. 하천은 물이 힘차게 흐르는 공간일 뿐만아니라 모든 인류 문명을 잉태하고 키워온 공간이다. 

▲  마을 및 농지를 보호할 목적으로 심은 느티나무, 팽나무, 서나무, 왕버들나무 등의 다양한 식생이 분포하고 있는 임실 방수리 장제무림 모습으로 방수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오문수
▲  마을 및 농지를 보호할 목적으로 심은 느티나무, 팽나무, 서나무, 왕버들나무 등의 다양한 식생이 분포하고 있는 임실 방수리 장제무림 모습으로 방수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오문수
▲섬진강변인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에 있는 '진구사지 석등'으로 보물 제267호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석등으로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석등이다. ⓒ오문수
▲섬진강변인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에 있는 '진구사지 석등'으로 보물 제267호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석등으로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석등이다. ⓒ오문수

하천(河川)이란 일정한 물길을 따라 흐르는 유수를 말한다. 국어사전에서는 하천을 작은 것부터 큰 순으로 시내·내·강이라고 정의한다. 시내는 골짜기나 평지를 흐르는 크지 않은 물줄기를, 내는 시내보다는 크고 강보다는 작은 물줄기를 뜻하며 강은 크고 길게 흐르는 내를 지칭한다.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

섬진강은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인 팔공산(1151m) 북쪽 1080고지인 '천상데미' 서쪽 계곡 상초막이골의 '데미샘'에서 발원한다. '천상데미'는 하늘로 오르는 봉우리라는 의미이다.

'데미'는 전라도 방언으로 '더미'를 뜻하며 '더미'는 봉우리를 의미한다. 발원샘인 '데미샘'은 이형석 박사에 의해 '천상데미'에서 따온 이름이며, '데미샘' 근방은 돌들이 무더기로 널려있는 너덜지대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런 곳을 '돌데미'라고' 했다. 데미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데미샘은 샘물 규모가 1㎡ 정도며 주변 석축과 데미샘을 알려 주는 표지석 2기를 합쳐도 3㎡ 정도의 크기다. 샘 옆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蟾津江發源地(섬진강발원지)'라고 적혀 있다.

섬진강 발원지를 데미샘으로 여기지 않았던 옛사람들은 팔공산 어디쯤인가에 발원지가 있다고 여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섬진강 발원지를 중대산 또는 마이산으로 보았고 <택리지>에도 역시 마이산으로 실려 있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환경청 답사단과 함께 12일간 섬진강 전역을 도보로 돌아보았던 임실군문화관광해설사 강명자씨와 함께 마이산 탑사에 들렀더니 우물가에 '섬진강 발원지 용궁'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  진안군 마이산 탑사 바로 아래에 있는 샘인 용궁에는 '섬진강 발원지 용궁'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섬진강 발원지는 '데미샘'이라고 공인됐으니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연간 150만명이 방문해 이 글귀를 보고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오문수
▲  진안군 마이산 탑사 바로 아래에 있는 샘인 용궁에는 '섬진강 발원지 용궁'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섬진강 발원지는 '데미샘'이라고 공인됐으니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연간 150만명이 방문해 이 글귀를 보고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오문수

그러나 하천 연구가 이형석씨가 1983년 직접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발원지를 계측한 이후 국립지리원이 데미샘을 강 하구로부터 가장 먼 최장발원지로 인증했고 데미샘에 섬진강 발원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졌다.

데미샘으로부터 흘러나온 섬진강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68개의 제1지류와 129개의 제2지류, 그리고 53개의 제3지류 및 15개의 제4지류를 받아들이면서 흐르다 광양만에 이르러 남해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지역명 따라 달리 불렸던 섬진강 이름

데미샘에서 발원한 물은 진안쪽으로 북상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임실군 관촌에 이르면 오원천, 신평에 이르러 지장천과 합류하여 비로소 섬진강이라 불린다. 신평면 원천리 강변에는 '섬진강 시점 기념비'가 서 있다.

▲임실군 신평면 원천리에 세워진 '섬진강 시점 기념비'로 발원지부터 '천'으로 불리던 명칭을 이곳에서 부터 비로소 섬진강이라 불렀다. ⓒ오문수
▲임실군 신평면 원천리에 세워진 '섬진강 시점 기념비'로 발원지부터 '천'으로 불리던 명칭을 이곳에서 부터 비로소 섬진강이라 불렀다. ⓒ오문수

섬진강은 고려 우왕 11년(1385년)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만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부터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을 쓰게 됐다. 전남 광양군 도사면에는 섬진리와 섬진나루가 있다.

데미샘에서 발원한 물은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에서 남서쪽으로 바뀌어 진안군 성수, 관촌, 신평을 거쳐 운암호에서 옥정호(섬진강다목적댐)에 이른다. 상류인 관촌에서 옥정호까지를 오원천, 순창군 적성면 부근에서는 적성강, 곡성군 고달면과 오곡면 부근을 순자강, 구례에서는 잔수강, 광양에서는 섬진강이라고 부른다.

섬진강은 3개도 11개 시·군에 걸쳐 흐르고 길이는 225㎞, 유역 면적 넓이 4489㎢로 전북 44%, 전남 47%, 경남이 9%를 점유하고 있다.

400여년 전 만든 '설보'는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 관개수로
 
섬진강 다목적댐은 우리나라 다목적댐의 효시로 높이 64m, 길이 344.2m, 체적 41만㎡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다. 댐에는 국내 최초의 수력발전소인 칠보발전소가 있으며 칠보발전소용 취수 터널과 동진강 유역의 계화도 간척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터널이 있다.  

▲ 섬진강다목적댐 모습으로 겨울 가뭄으로 인해 만수위에 이르렀던 수위와 차이가 많다  ⓒ 오문수
▲ 섬진강다목적댐 모습으로 겨울 가뭄으로 인해 만수위에 이르렀던 수위와 차이가 많다 ⓒ 오문수
▲6.25 전쟁 당시 남부군 사령부가 있어 700여명의 빨치산이 주둔해 동족상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회문산 인근 섬진강변에는 빨치산을 막기 위해 설치된 보루대가 지금도 남아있다. ⓒ 오문수
▲6.25 전쟁 당시 남부군 사령부가 있어 700여명의 빨치산이 주둔해 동족상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회문산 인근 섬진강변에는 빨치산을 막기 위해 설치된 보루대가 지금도 남아있다. ⓒ 오문수

1965년 12월에 완공된 댐은 호남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발전에 사용된 물을 동진강 유역에 방류하여 호남평야를 기름지게 하고 있다. 옥정호는 붕어, 잉어 등이 잘 잡히는 낚시터로 유명하다. 겨울 가뭄이 계속되어서인지 댐 부근에서 바라본 옥정호 수위는 만수위 때 물이 차올랐던 지점과는 한참 차이가 있었다.

섬진강 물이 흐르는 임실군에는 물과 관련된 지명이 여럿 있다.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은 방수리, 마을 앞을 흐르는 섬진강 큰물로 항상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물우리'가 있다. 400여 년 전 강진면 일부와 덕치면 회문리 일대 수십만평에 관개수로를 설치해 주민들을 먹여 살린 '설보' 이야기는 후세에도 커다란 감명을 준다.

덕치면 회문리에는 '설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설보'를 만든 조평 선생의 후손인 조병용 선생이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기 위해 세운 '설보 기념비'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보'의 위치는 강진면 용수리 가리점 마을 앞 섬진강에 있다. 섬진강의 강폭이 비교적 좁고 강에 놓여있는 큰 바위를 이용해 쌓은 '설보'로 인해 수혜를 입은 농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보는 인조 12년(1634년)에 시작하여 인조 17년(1639년)까지 5년간의 긴 세월에 걸쳐 완공되었다. 처음에 주민들이 "우리들의 살길은 오직 여기에 보를 만들어 넓은 들에 물을 끌어들여 황무지를 옥토로 만드는 데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으나 누구 한 사람 힘든 작업을 할 수도 없었고 물길이 급해 공사 착수를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 덕치면 회문리에 설치된 '설보' 기념비로 '설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조평 선생이 만든 '설보'로 인해 수많은 주민들이 혜택을 입었다. 400여년전에 만든 설보는 일종의 관개수로로 지금은 콘크리트로 보강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오문수
▲ 덕치면 회문리에 설치된 '설보' 기념비로 '설보'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조평 선생이 만든 '설보'로 인해 수많은 주민들이 혜택을 입었다. 400여년전에 만든 설보는 일종의 관개수로로 지금은 콘크리트로 보강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오문수
▲ '설보'가 세워진 현장을 안내한 좌측의 조종래(88세)씨와 최성미(76세)씨 모습. 필자에게 회문산에 얽힌 빨치산 투쟁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제공했던 조종래씨는 덕치면장을 역임했었고, 신평면과 성수면장을 역임한 후 12년 동안 임실문화원장을 역임했었던 최성미씨 두 분은 임실의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랄 수 있다. 뒤편에 보이는 섬진강에 설보가 세워졌었고 지금은 하류에 시멘트 보가 설치되어 강진면 일부와 덕치면 회문리 일대 주민들의 젖줄이 되고 있다.  ⓒ 오문수
▲ '설보'가 세워진 현장을 안내한 좌측의 조종래(88세)씨와 최성미(76세)씨 모습. 필자에게 회문산에 얽힌 빨치산 투쟁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제공했던 조종래씨는 덕치면장을 역임했었고, 신평면과 성수면장을 역임한 후 12년 동안 임실문화원장을 역임했었던 최성미씨 두 분은 임실의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랄 수 있다. 뒤편에 보이는 섬진강에 설보가 세워졌었고 지금은 하류에 시멘트 보가 설치되어 강진면 일부와 덕치면 회문리 일대 주민들의 젖줄이 되고 있다. ⓒ 오문수

조평 선생은 주민들을 설득해 농토를 만들자고 호소했으나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지금 갈천에 나가면 눈이 내린 흔적이 있을 것이다" 하며 사라졌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선생은 곧바로 갈천에 나가 노인이 말했던 눈길을 따라 말뚝을 꽂아서 정표를 해놓았다.

다음날부터 주민들과 힘을 합쳐 돌과 목나무 등을 마련하고 꽂아놓은 말뚝을 따라 보를 쌓고 수로를 팠더니 그렇게 어려웠던 보가 손쉽게 쌓아졌다. 이때 눈길을 따라 개척한 수로는 7㎞에 이르고 이 보와 수로는 지금도 그대로이다. 춘분날 눈길을 따라 수로를 내고 보를 쌓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설보(雪洑)'는 후세 사람들에게도 치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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