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들이 벌교역에서 내려 소록도까지 걸어갔던 '눈물의 길'을 따라 걷는 둘째 날 목적지는 고흥 남양면까지다. 보성군에 속한 벌교읍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전선철도를 건너면 고흥군이 시작된다.
전남 동남단에 위치한 고흥군은 해안선이 744.66㎞나 되는 반도로 많은 섬들을 보유하고 있다. 유인도 23개, 무인도 207개로 도서 면적만 해도 133.24㎞에 달해 대한민국 군단위 면적 중 세 번째로 크다. 동쪽은 순천만과 여자만을 사이에 두고 여수시와 인접하고, 서쪽은 보성만과 득량만을 사이로 보성군, 장흥군, 완도군과 접경을 이룬다.
고흥반도의 생김새는 북부 남양면의 지협을 정점으로 동서간의 폭이 좁아지다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형태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아기공룡 한 마리가 앉아있는 형세와 비슷하다.
'네이버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흥 쪽으로 걷는데 길 옆에 뱀처럼 구불구불한 옛 도로가 보인다. '동강역사문화관'에서 안내를 맡은 분이 그 골짜기에 대해 설명했다.
"벌교읍에서 고개를 넘어오면 '고흥 만남의 광장'이 보였죠? 그 고갯길 옆에는 구불구불한 구도로가 남아있을 겁니다. 그 길이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 동강에 사는 옛 사람들이 벌교까지 오가던 뱀골재입니다. 내 어릴적 명절에는 친구들 10여 명이 함께 모여 벌교극장에 영화 보러 갔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막차도 없기 때문에 뱀골재를 통과해야 했어요. 어른들 말씀이 '뱀골재에 사는 한센인들이 아이들 잡아간다'며 겁을 줬습니다. 못 가게 하려는 것이겠죠."
'고흥 만남의 광장' 인근에는 끝이 뾰쪽한 산 하나가 있다. 해설사에게 물어보니 그 산이 바로 뾰쪽하다는 의미의 '첨산'이란다. 정유재란 당시 벌어졌던 '첨산전투'는 고흥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한 전투로 고흥에 상륙한 왜군이 내륙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으려는 데서 발생했다.
동강면 소재지에 있는 '동강역사문화관'에는 '첨산전투' 당시 전투를 지휘한 송대립 장군에 대한 기록이 있다. 1598년 4월 8일, 첨산에서 고흥 의병과 왜군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송대립 장군은 왜군이 고흥 망제포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진을 옮겨 첨산 밑에 목책을 쌓아 온 힘을 다해 9번이나 싸우다 전사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강 출신 송대립, 송희립, 송정립의 송씨 삼형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 <호남절의록>에는 송씨 삼형제의 활약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첫째인 송대립은 고흥 의병을 이끌고 '첨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해 경상도 수군이 거의 전멸된 실정에서 영남의 바닷길 사정에 어두운 전라 좌수군으로서는 출정이 쉽지 않았다. 당시 이순신 휘하 장수 대부분이 출정에 부정적일 때 녹도 도만호 정운과 전라좌수영 군관 송희립이 출정을 주장했다. 송씨 삼형제 중 둘째였던 송희립의 말이다.
"영남은 우리땅이 아니란 말인가. 적을 치는데 이 지역 저 지역 차이가 없으니 먼저 적의 선봉을 꺾어 놓게 되면 본도 또한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장수의 말을 들은 이순신은 영남해역에 출정하기로 결정했다. 송희립은 두 왜란 내내 이순신을 보좌하며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이순신을 대신해 북을 치며 독전을 계속했다. 전라좌수영 수군으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웠던 셋째 송정립은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 참전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했다.
서민호...어둠의 시대에 맞선 한 평생
1903년 고흥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에서 태어난 서민호는 어머니가 떨어지는 둥근 달을 치마폭으로 받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던데서 호를 월파(月坡)라 했다. 대지주 아들로 태어나 편안한 삶이 보장돼 있었으나 평생 항일, 반독재,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학생 신분으로 3.1운동에 참여했고 조선어학회를 후원해 구속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광주시장, 전라남도 지사를 지냈으며 1950년, 제2대 민의원을 시작으로 1960년 제5대 민의원, 1963년 6대 민의원에 이어 1967년에는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을 널리 알려 2004년 3월 <거창, 산청 사건 등에 관한 보상법>을 통과되게한 장본인도 서민호의원이다. 4.19혁명 이후 민의원 부의장, 1967년에는 대중당 당수로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한국 정치의 거물이었다.
시인, 노동운동가, 사진작가... 박노해
1957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태어나 보성군 벌교읍에서 자란 박노해는 어린 시절에 진보 운동에 참여했으며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1980년대에는 노동시를 썼다. 졸업 후 여러 업종에 노동자로 일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84년 그가 낸 시집<노동의 새벽>은 노동자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쓴 최초의 시집으로 당시 금서였지만 100만 부를 발행했다.
동강역사문화관을 나와 남양면으로 가는 길은 순탄한 길이다. 순천에서 벌교까지 걸을 때와는 판연히 다른 길이다. 녹동까지 가는 고속도로 주변에는 고흥에 살았던 옛주민들이 이용했던 구도로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위험하지도 않고 달랑 배낭하나 메고 갓길을 걷고 있지만 내옆을 지나가는 차들은 내옆까지 와서는 저만치 비켜서 운전했고 속도까지 줄여줬다. 먼 산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했고 길가에는 개나리와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에게 길을 묻자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이길이 남양면사무소로 가는 길이 맞습니까?"
"예? 아직도 멀었는데 걸어가려고요?"
순천역에서 벌교까지, 벌교에서 고흥 끝자락 녹동까지 가는 길에 만난 도보 여행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걷는 도중에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고흥 사람들. 그러나 나를 반기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목줄에 매여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금방이라도 달려와 물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개들.
철사줄에 묶여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개들의 신세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가족과 지인, 사회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비인간으로 살았던 한센인들은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을 저주하지는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