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주 월요일 2시 국동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이날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분들이 모여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날이다. 한 달 정도 여름 방학 후 첫 수업 날, 내용은 글을 쓰기에 ‘내 경우 생각이 잘 나는 상황과 환경은 이렇다’로 시작하였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이나 상황에서 글이 잘 써지는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산책할 때, 낙서할 때, 잠들기 전, 시를 읽을 때 등 다양한 선택들이 있었고 선택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에너지들이 발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주위의 소음들이 사라져 가고 눈꺼풀이 고정되더니 시야의 초점이 사라졌다. 난 과거의 기억을 검색 중이었다. 볏짚, 가마솥, 장작, 소, 여물, 새참 등의 검색어들에 따라 그때의 내 모습이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때다 싶었는지, 어린 시절 시골 가서 경험했던 일들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 대는 수다쟁이가 되고 있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 명절 때마다 찾아갔던 시골집,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 아빠 식구들이 함께 살던 시골 묘도는 날씨가 궂으면 월래 선착장에서 배가 뜨지 못했다.그럴 때면 묘도 큰집에서 배를 띄워 가족들이 조상을 찾아뵐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
추석 때 성묘할 때면 이산 저산 다니며 20곳은 족히 절을 했던 것 같다. 가끔 바짝 마른 풀에 손이 찔려 피를 보기도 했기에 절하는 것이 싫어 고개만 숙이기도 했었다.
성묘를 마치고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가면 식사 때 큰 방에서는 어른과 아이 가리지 않고 남자들만 넓은 상에서 식사하셨고 여자들은 작은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식사했다.
한번은 아빠 옆에서 밥을 먹겠다고 했는데 할머니께서 작은 방으로 가라고 하여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어릴 적, 묘도 집은 부엌이 앞과 뒤로 나무문이 있었고 뒷문으로 나가면 장독대가 즐비해 있었다. 장작을 피워 가마솥에 밥을 했고 부엌 안에 소가 있었다. 장작불 앞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던 나는 뒤에 있던 소가 울면 놀라서 도망갔던 기억이 있다. 그을음으로 인해 부엌 안은 벽과 천장이 늘 검정이었다.
묘도 집 앞이 바로 바다라 배들 사이를 오빠들 따라 왔다 갔다 하며 줄 낚시로 고기 잡았던 일이 새삼 새롭다.
작은 아빠 둘째 딸과 새참을 들고 낮은 산을 넘어 배달 가다가 엎어져 엉망 된 새참 때문에 사촌과 심하게 싸웠던 일, 겨울에 장독대 뚜껑에 얼음이 생기면 볏짚을 입에 물고 ‘후후’ 불어 얼음에 구멍을 내어 줄로 묶어 얼음 치기를 하는데 얼음 깨질까 걱정되어 도망 다녔다.
나이 어린 학생이 아빠한테 형님! 하면서 나에게 ‘삼촌’이라 불러라 했을 때 이해되지 않았던 촌수 문제. 지금은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지만, 그때 시골은 상여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산으로 향하였는데 따라가면서 힘들었다.
묘도 집 안방 문 위에 걸려 있던 아빠의 흑백 사진이 너무 멋있어서 내가 갖겠다고 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신 후 사라져서 창고를 뒤지며 소란을 피웠던 일 등 잊혀진 기억들이 날 흥분 시키며 자랑하듯 말하고 있는 나를 느끼게 했다.
과거로의 여행이 이렇게까지 날 수다쟁이로 만들어 버릴 줄을 생각하지 못했다.
몇 달 전 친정 부모님과 함께 간 여수민속전시관에서 안에 전시되어있는 큰 가마를 보시며 아빠는 “큰 누나가 가마 타고 시집을 갔었는데...”라고 말씀을 하셨고, 2살 차이 나는 언니는 막내 고모가 꽃가마 타고 시집간 걸 기억 한다고 했다.
지금은 빠르게 흐르는 시대에 발맞춰 이순신 대교가 생겼고 차로 편하게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잊힌 줄 알았던 과거의 환경이 이제는 찾기 힘든 추억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도시 친구들은 시골 생활에 대한 경험에 대해 이해와 공감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글을 쓰며 조용히 어려웠던 시절을 되새겨 본다. 그때 그날의 나는 미래의 전원생활을 꿈꾸며 행복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