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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을 가진 사랑(교육)은 사랑(교육)이 아니다

김광호 여양고등학교 교사

  • 입력 2015.06.02 16:31
  • 기자명 여수넷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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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너희가 알 수 있는 것, 알아야만 되는 것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너희에게 있는가?’라고 말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정말 중요한 게 있는 데 그게 바로 용기이다. 이게 생겼을 때 우린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을 살펴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교육이 아닌 훈육이라는 방법을 통해 길들여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훈육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것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가래떡을 먹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가래떡을 아무 생각 없이 먹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가래떡은 모양과 색깔까지 다 똑같았다. 아니 맛도 같았다. 개성이라곤 하나 없는, 노즐(훈육)에 따라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 가래떡일 뿐이다. 가래떡이 바로 훈육의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들은 이미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노즐이라는 틀에서만 놀다가 그 노즐을 타고 나와서 정형화된 어른이 되어 삶을 살아간다. 그 과정에는 자유도 있고 훌륭한 가르침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점도 많다는 사실이다.

혹 장자가 말한 바닷새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 버리고 말았다.’

왜 바닷새는 죽었을까? 그렇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행하고 있는 교육을 세세하게 파고들어가 보면 이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정말 <체, 덕, 지>를 겸비한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길들여지는 인간을 양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즉 출세와 성공이라는 프레임을 걸어놓고 그냥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훈육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 훈육에 길 들여지다보니 생각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다보니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날아가야 할 곳은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혹여 아이들이 다른 의견을 말하려고 하면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다.‘감히 누구에게 말대꾸야, 너 싹수가 노랗다’라는 그들만의 언어로 아이들을 제압한다. 그러다보니 많은 아이들이 자신만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조차 못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그 고민의 시간까지도 정신적인 사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아이들은 장자가 말한 바닷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현실을 좀 더 살펴보자.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아니 취직해서도 곳곳에 노즐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기성세대(사회, 학교, 부모)는 그 노즐만 잘 통과하면 삶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성세대의 삶을 보면 그들이 정말 삶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출퇴근하는, 돈벌이로 전락하지 이미 오래지 않았는가? 지금 우리 사회가 행복과 자유지수가 높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지금처럼 정형화된 방법을 가진 사랑(교육)은 결코 사랑(교육)이 아니다. 10년 후, 20년 후 그리 행복하지도 자유스럽지도 않을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나만의 기우(杞憂)일까?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진짜 자유와 행복을 벗할 수 있을까? 우선 바닷새를 궁궐로 데려오지 않고 자연에 그대로 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안 데려올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방법은 교육의 패러다임을 확연하게 바꾸어야 한다.

즉 교육의 방법과 내용 그리고 질을 획기적으로 바꿔야한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각론(各論)은 기성세대가 교육이 아닌 훈육에 대하여 통렬한 반성과 자각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를 감당할 만한 용기가 기성세대의 가슴 속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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