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의 '안' 자는 원래 '기러기 안(雁)'자다. 안도를 굽어보는 금오도 심장리에 있는 망산(343m)은 호랑이를 닮았다. 전설에 의하면 호랑이가 기러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형상이라 안도에 불행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어 요즘은 '평안할 안(安)'자로 바꿨다.
향토사학자 박종길씨가 금오도와 안도에 얽힌 아픈 사연을 강의했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남면소재지가 있는 금오도가 작은 집이고 규모가 훨씬 작은 안도가 원래 큰집이었다는 걸 모른다.
안도의 패총에서 나온 유물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안도는 신석기시대(6천년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금오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1885년의 일이다. 사람이 처음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해서 초포라 불린 마을 중심에는 금오도 개척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기념비가 서 있다.
금오도에 사람이 늦게 들어간 이유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궁궐을 짓거나 왕족의 관을 짜기에 알맞게 자란 소나무가 가득한 금오도를 '황장봉산'으로 정해 금족령을 내렸다. 하지만 안도에 첫 번째 불행이 닥쳤다.
이른바 경신대화재(1860년)가 발생해 안도에 있던 300여 채의 모든 집이 불타버리고 외딴집 한 채만 남았다. 할 수 없었던 안도 주민들은 슬금슬금 안도로 이주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념논쟁의 물결은 섬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여순사건에 이은 6.25전쟁의 회오리가 안도를 덮쳤다. 국군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동네주민 11명을 총살했다. 인민군에 계속 밀리던 8월 3일, 부산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피난선이 난민 350명을 싣고 안도의 이야포에 정박했다. 이들 중 150여 명이 미군기의 폭격으로 죽었다.
두 번의 비극이 인재라면 세 번째는 자연재해다. 1959년 9월 추석날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피해를 준 사라호 태풍이 안도를 덮쳤다. 안도 소재지에서 85년간 살았다는 한 할머니의 얘기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무서운 태풍은 처음이여. 다 죽는 줄 알았어요."
▲ 안도동고지 마을 주민들이 외지인들을 위해 지은 현대식 식당. 할머니들은 반찬을 만들고 젊은 아주머니들은 서빙을 하며 소득은 공동분배한다. 바다에서 금방 잡은 군부, 톳, 미역과 고기들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어 깔끔하고 맛있었다
박종길씨의 안내로 안도당집이 있었던 곳으로 갔다. 10여 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까지도 옛 당집이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당집은 없어지고 비석 위에 안도 내력을 알리는 글귀만 남았다. 안타까워하던 박종길씨가 입을 열었다.
"외세와 기독교 때문에 당집이 무너졌습니다. 당집은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모든 집에서 한 상씩 차려 제사를 지낸 곳으로 경외의 대상이었고 신성시했던 곳입니다. 신을 믿었던 시절에 제사장은 일년내 몸을 정갈하게 하고 상가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마을의 구심점이었는데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빠 어디가' 촬영지로 유명한 명품마을 '안도동고지'
▲ 움푹패인 곳에 자리한 안도동고지 마을. 2013년 전국최고의 명품마을로 선정됐다. 명품마을은 경관이 수려하고 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야 한다
"저기 보이는 세 섬은 '꿈도', '사랑도' '희망도'입니다. 꿈도에서는 물이 나오고, 사랑도에는 십이선녀탕이 있으며, 희망도에는 야생염소가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초삼도, 중삼도, 외삼도로 불렸습니다."
일행에게 3번째 강의를 한 강사는 이재언 연구원이다. 25년간 우리나라 유인도 446개를 혼자서 돌았던 이재언 연구원은 "막힘없는 바다를 고속도로로 활용하자며 여객선 공용화"를 주장했다.
일행 중에는 여수석유화학고등학교 3학년 세 명이 있었다. 이들은 여수국가산업단지 대기업에 최종합격한 학생들이다. 참석한 후배학생들을 위해 경험담을 들려달라는 요청에 응한 김대경(여수석유화학고등학교 3년) 학생의 말이다.
"3학년 재학생 100명 중 70여 명이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업이 됐습니다. 기숙사 생활하고 있는 저희들은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 점호를 한 후 일과가 시작됩니다. 제가 LG화학에 최종 합격하게된 것은 교장선생님이 만들어주신 학교의 인재상이 회사가 바라는 인재상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전문인, 세계인, 창조인이 저희학교 인재상입니다."
매일 감사일기를 쓰며 3년째 계속되는 무감독시험을 학교의 자랑거리로 내세운 김대경군에게 박종길씨가 귀담아들어야 할 충고를 줬다.
▲ 여수석유화학고등학교 3학년 김대경 군이 자신의 합격비결을 설명했다. 김군은 여수산단에 있는 LG석유화학에 최종 합격했다
"전문성도 좋지만 인간관계를 잘 조정하지 않으면 절대 성공을 보장 못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주위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잘 형성해야 합니다."
입사면접 당시 면접관에게 "학생회 간부로 책임감이 강하다"고 했다는 김군은 11개의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했다. 동석했던 한 중학생이 "석유화학고등학교에 가려면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을 던졌다.
석유화학고등학교에 지원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내신 20% 정도여야 하지만 30% 정도인 학생도 인·적성 시험을 통과하면 합격이 가능하다고 한다. 김대경군과 함께 1박2일 캠프에 참가한 남형준 군의 캠프 참가소감이다.
"안도동고지 마을에서 1박2일 동안 캠프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을 경치가 정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수에도 이런 아름다운 경치가 있나 할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나중에 여자 친구가 생기면 함께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초청강사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사회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많이 들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