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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에 관하여 (시민기자 칼럼)

  • 입력 2016.04.03 12:15
  • 수정 2016.04.06 14:25
  • 기자명 박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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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우린 가족이니까’하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자주 듣는다. 성인이고 결혼을 한 부부사이라면 이 말이 왜 우스갯 소리인지 잘 아실것이다.

언제 부터인지 이런 농담이 유행처럼 번지고 우리 주위엔 재혼가정이 많이 늘어가는 추세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8살 되었을 때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아버지는 43살

젊었을 때 독사에 물려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이 괴사되셔서 1급 지체 장애를 가지고 계신분. 내가 봐도 얼굴은 미남이셨지만 장애인 총각한테 쉬이 시집 올 처녀가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고 전 남편이 일찍 돌아가시자 주위 분들이 불쌍하다고 여겨 아버지와 중매를 하였고 그 사이에 내가 생겼다고 한다.

전 시댁 쪽에 아이 둘을 두고 시집오신 어머니의 삶이나 결혼도 하시기전 장애인이 되신 아버지의 삶이나 무남독녀로 태어나 8살 때 어머니를 잃은 내 삶이나 ~(하지만 지금은 이 시절의 아픔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내 기억으로 1년 정도 아버지와 둘이 살았는데 어느 날 새 어머니라고 하는 분이 우리 집에 오신거다. 그때부터 지금 까지 내 가슴에 대못자국으로 남은 불효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내 가슴엔 슬픔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너무나 빠른 아버지의 재혼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마저 남기며 내 가슴에 큰 상처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내가 철이 들어 생각했을 땐 왜 그리 어리석은 행동을 했었을까 가슴을 쳤지만 그땐 그런 나의 행동이 돌아가신 엄마를 위해서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새엄마를 아버지한테서 떼어 놓는 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식음을 전폐하고 말을 안 듣는 것이었다. 얼마나 그런 행동을 일삼았는지 내 계획대로 새엄마라는 분은 어느 날 가시고 없었다.

그 후로도 세번째 맞은 엄마까지 나의 통쾌한 승리로 끝났다 ( 하지만 세번째 오셨던 그 새엄마는 아직 나의 기억 속에 슬픈 얼굴로 계신다ㅡ 가지고 오셨던 옷 보따리를 가슴에 안은 채 떠나시며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시던 모습 ㅡ그땐 그 모든 것이 내 아버지께 잘 보이려는 가식으로 보여 속으론 비웃고 있었다)

그런 나의 못된 행동에도 아버진 한 번도 날 때리거나 야단치신 적이 없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께서 날 야단치시고 하셨더라면 지금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건 확실하다.

세번째 새 엄마가 가시고 난 후부터 아버진 새 엄마를 들이지 않으셨고 그 대신 술과 담배로 세월을 이겨 나가셨고 그런 아버지만 무능하다고 느끼며 나는 어린 날을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살았었다.

그런 나의 행동이 잘못됐었다는 걸 느낀 나이는 내가 검정고시를 거쳐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아버지와 내가 끼니 챙기기도 힘들어지고 생활도 어려워졌고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 독립을 위해 여수를 떠날 때 난 혼자 계신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도 없었을 때 그때서야 새엄마라도 계셨으면 내가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건데 하고 후회해 보았지만 때는 늦은 일.

지금 생각하건데 아버지는 몸도 불편하시고 해서 어린 딸을 혼자 키우시기가 힘드셨을 것이다.(나를 목욕시키고 머리감기는 일들을 아버진 몸이 불편하여 하실 수가 없으셔서)

그래서 더 일찍 새엄마를 원하셨을 건데 난 그런 마음도 모르고 내 잣대로만 아버지를 평가해 원망만 했었으니~

내가 새 엄마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을 땐 이미 알콜성 치매가 생기기 시작했고 나이까지 들어버린 아버지께 새 엄마가 생긴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아버지와 둘이 힘들게 살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고 내가 엄마가 되고

아버진 큰아이가 고3이었던 2006년 78세의 연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알콜성치매 때문에 모시고 사는 동안 무척 힘들었었기에 돌아가시면 내 맘이 후련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 아버지가 가신지 십년

그리고 내 남편을 암으로 떠나 보낸게 5년.

나도 혼자가 되어보니 35년을 딸 하나만을 위해 당신의 행복을 포기하셨던 아버지께 난 세상에 둘도 없는 불효녀인데 지인들은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산 내가 심청이라 하셨다.(35년동안 아버진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요즘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사는 부부가 많다고 한다.

부부라는 게 함께 살면서 불행하다면 쿨(?)하게 헤어지고 사랑하는 사람만나 다시 새 삶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은 한다.

세태가 또 그런 걸 인정 하니까. 하지만 부모라면 나로 인하여 자식이 아프다면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말고 조금씩 기다려주고 받아들일 시간을 충분히 준 후 결정하여 서로가 행복해 진다면 그 보다 축복받는 재혼이 어디 있겠는가 싶다.

부모도 자식의 행복을 기도 하듯 자식도 부모가 행복하다면 더 할 나위가 없이 좋은 일 아닐까? 그래서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며 대화의 시간을 늘려 진정한 가족으로 살아간다면 사회 또한 밝은 가정으로 인하여 더 밝아지지 않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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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수 2016-04-06 13:30:05
깊은 삶의 이야기에서
소중한 뜻을 읽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보임으로써
우리를 공감 위로하여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면,
오랜세월 흐른 후에도 과거의 사건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경우가 허다한데,
선생님은 꽃으로 피워내어
올 봄,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봄꽃을 선물하시는군요.

특히
여러 가면 쓰고, 감언이설 난무하는 요즈음,
선생님의 글은 힘있는 언어로 와닿습니다.

더욱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