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지리산에서 온 사나이

귀농일기(15)

  • 입력 2017.04.13 23:48
  • 기자명 민웅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자가 인문학 강좌에서 강의하는 장면

- 내가 원체 말주변도 없고 숙기가 없다본께 어지간하면 하고자픈 말이 있어도 좀 참고 말것인디, 오늘은 막걸리 한잔 값은 해야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버리는구만이라이,
거두절미하고, 농사를 안지을라먼 몰라도 이왕 지을라면 잡초는 깨끗이, 개안허게 뽑아뿌러야제,

껄쩍지근허게 놔둬놓고 먼 농사랄 것이 있겄냐 이말이여, 응, 우리 집 텃밭과 마당에 있는 잔디밭에 한번 와 보시면 알겄지만, 우리는 잡초 같은 건 애초에 안 키운단 말이요, 절대로.  혹시, 여기 안기부 직원은 없겄지라우? 혹시라도 나 잡아가먼 안됭께.

너스레까지 떨어가며, 본격적인 말로 들어간 것이었다.

- 저놈들은 뽑아내지 않으면 또 어떤 짓들을 할지 모르니까,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노릇을 단단히 한 놈들, 아직까지 제거되기는커녕 우리 사회의 요처에서 우리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놈들 아니더라고이,

정치권이고 언론계고 학계고 교육계고, 구석구석에 독버섯처럼 세력을 뻗치지 않는 데가 없는 것이 저놈들이여,  

까놓고 말해서, 그런 개나발들은 남겨두면 두고두고 후회가 될 것이여, 확 뽑아버려야제이, 안 그라요, 잉?

선동이 먹혀들어갔던지, 그런 문제의식에는 마치 평생 이골이 나기라도 한 사람들처럼, 일각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그리고 잡초 청산론자의 말이 좌중의 심금을 울렸던 건, 비단 풀뿌리를 뽑아 없애는 문제나 친일파 청산에만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  김자윤

그들의 역사의식에서, 특히 티비 뉴스에 단골로 나오는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의 면면이 떠오르는 순간, 그놈의 잡초는 일각에, 한꺼번에, 이독치독(以毒治毒)의 차원에서, 제초제를 써서라도 싸그리 제거하고 싶은 충동이 지금 이들의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것이었다.

탄력을 받은 청산파가 대세를 잡기라도 한 듯 심중에 쌓아둔 말들을 아낌없이 쏟아내었다.  

- 저 잡초들은 결국, 이 역사와 미래를 옥죄어서 희망이라곤 쥐뿔도 없게 할 것이구만.
요런 놈들은 도처에서 독사 새끼들처럼 이렇게 혀를 날름거리며, 이 나라를 집어삼키고, 마침내 농민들과 서민들, 아니 이 나라 전체를 외국자본의 지배에다 송두리째 팔아넘기고 말 것이니까.

모르는 사람들 빼놓고는 다 아는 야그니께 더 이상 긴 말은 사족에 불과할 것이고, 말 나온 김에 딱 한 마디만 더 할라요, 친일파들,

이놈들 솎아내지 못하면 우리나라와 민주주의, 그라고 우리 자식새끼들의 미래가 없다는 것만 알면 된다, 이 말이요. 잡초 좋아허지덜 마쇼.

그런 놈들은 눈구녁 똑바로 뜨고 찾아내서, 단 한 뿌리라도 기어코 뽑아버려야 하는 법잉께.

ⓒ  김자윤

할 말을 다 못한 듯, 아직 분이 채 가시지 않는 모양으로, 그는 자리로 돌아가서 연거푸 동복 막걸리를 두 잔이나 마셔댔다.  

이자는 지리산 산청에서 왔다. 농대를 졸업하고 뜻이 있어서 농업과 농촌에 투신했다.

영농 후계자로서 자금 지원을 받아 동네 뒷산을 샀고, 거기에다가 두릅나무와 호두나무 등을 심고, 비닐하우스를 시설해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있고, 산 속에 조그마한 닭장을 짓고서 유정란을 생산하기도 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다니기는 하나 실속은 별로 없고, 빚만 늘어간다고 불평이다.

공사다망하게 분주한 이자는 농민운동에도 열혈 활동가로 뛰고 있으나, 불투명한 한국 농업과 농촌, 농민의 미래를 생각하면 사는 재미가 없다고 했다.    

토론의 열기는 점차 뜨거워져 갔고, 이제 불똥은 정치적 잡초론으로 튀었다. 그러나 토론은 토론일 뿐이었다.

물이 100도가 되어 끓지만, 그 물이 끓기 바로 전의 상황을 오히려 즐기기라도 하듯이, 한옥의 마루와 토방을 가득 매운 이들은 긴장과 이완 사이의 널뛰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주고받는 술잔 속에는 살풋하고 다정한 농담들이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  김자윤

이런 분위기가 낯설지 않은 좌중의 건달들은 이제, 토론의 쟁점과 요지, 그리고 그 전개 방향과 다가설 결론 따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토론이란 본시 끝도갓도없는 것이고, 이럴 때의 인생이란, 토론 그 자체도 좋지만, 토론의 분위기와 토론자들이 주고받는 정담들과 거기에 담긴 인간 군생들의 삶의 역정과 태도를 음미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속깊이 담긴 고뇌를 토로하고 발설하며, 동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공유하고 공명하는데, 그것의 진정한 묘미가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라도 하는 듯.

이렇게 삶이라는 파도를 타고서 희노애락의 물결 위에 출렁거리는 외로운 돛단배 하나 두둥실 띄우고,

산과 들,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며 노래하는 이들 논두렁 밭두렁 건달들의 고독함이란,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짐작하기가 쉽지 않는 것이더니.    

하여, 이들에게 토론이란, 간만에 마주한 같은 처지의 동지들과 마음을 열고 따뜻한 우정을 나누는 마치 오래된 종교적 의식 같은, 그런 것이리라.

그리고 그 토론의 내용과 쟁점이란 다만, 생김새만큼 다채로운 삶의 이력과 신념들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생들 간에 마주치는 술잔 같은 것이리라.

술잔을 부딪치며 서로의 속내를 떠보고, 이에 편승해서 종내 자신의 속사정도 드러내고 마는 고도의 문답법에 다름 아닐 터이니. (계속)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