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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초기의 ‘날’

귀농일기 (17)

  • 입력 2017.05.01 23:27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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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윤

예초기를 아는가?

이 기계가 처음 나왔을 때의 이름은 예취기였다. 아마 ‘예리한 날로 풀을 베어 모아들이는 기가 막힌 성능의 기계’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었을 게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예초기로 이름이 바뀌었다. 어려운 ‘취’ 보단, 풀이라는 뜻으로 쉽게 이해되는 ‘초’가 더 잘 와닿았던 모양이다.

도시인들에게 예초기는, 얼핏 성묘객들이 벌초하는 광경을 떠올릴 때 익숙하게 인상지어진 불가피한 장면의 하나로서, 혹은 도로변 가로수 밑을 깔끔하고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공공근로자의 평범한 작업의 한 풍경으로 끼어든,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은, 위험스럽긴 하지만 친밀한 농민의 벗과 같은, 그런 류의 물건이 되어 21세기 농촌을 표상하는 한 상징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기계치인 나에게 낯선 신문물의 기계나 장비가 들어온들 관심을 끌 일은 그다지 없다.
시골에 갓 들어온 풋내기 ‘시골뜨기’였던 시절, 내게 경운기나 트랙터와 같은 현대적인 농기계들이 인상 지웠던 생경함과 괴기스러움이, 아직도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처럼 내 경락의 마디마디에, 그리고 신경줄기 이음새의 굽이굽이에 소스라친 뱀 그것의 또아리마냥 틀고 앉아있는 세월이 부지기한데도, 건널 수 없는 강의 언덕빼기처럼, 화해할 수 없는 문명의 이기와의 한판 씨름처럼, 물과 기름처럼, 별거한 부부의 심드렁한 눈빛처럼, ‘자연 속의 부자연’은 여전히 내게 요원한 숙제로 남아있을 법도 하다.

마당의 잔디밭 하며, 계곡 쪽의 하우스 수련관 주변과 논두렁 밭두렁 그리고 선원 진입로 주변까지 포함해서 내가 살고 누리고 관리하고 있는 터전이 대략 천여 평은 남짓 되니, 지금 그 공간의 주인으로서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나의 처지에서 보아 예의 그 보수적인 기계관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도입된 것이 나의 경우엔 대표적으로 예초기와 잔디깎이 기계가 될 것이다.

ⓒ 김자윤

변변찮은 시골 살림에 시시하게 보이는 기계들조차 막상 구입하려면 큰 결심이 필요하거늘.
월 백 만원 수입도 호강인 우리네 가정경제를 쪼개어 덜컥 오륙십 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농기계(그것도 소형) 구입에 쓴다는 것도 수월찮은 용단이 필요한 일이라 심사숙고 하지 않을 수 없거늘,
게다가 알량한 개똥철학과 삶의 방식에 대한 완고한 신념마저 잠들어 있던 또아리를 치켜들고 적당한 거리의 거부권을 행사 하는 순간, 현대적 문명의 이기와의 타협과 화해는 그 절대적 거리감으로 인해 난망하기 그지없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른 마음은 문명의 이기와의 협상을 시도하고, 기계의 효율성과 경제성, 노동력의 절감, 시공간적 제약 등을 핑계 삼아, 그 이론과 실천의 여차한 빈틈으로 ‘적정한 기술’이라는 대타협의 산물이 구매되기에 이르렀겠다.

기실 내게 있어 농기계의 비용 운운은 핑계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르니, 더 심각한 것은 내가 순전히 ‘기계치’라는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집안의 식수를 담당하는 관정 모터나 보일러 설비, 하다못해 방안의 전등이 하나 고장 나기만해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대기 일쑤인 내게, 복잡다단한 부품과 사용방법, 그리고 응급처치요령과 관리지침 같은 매뉴얼은 생각 이전의, 느낌부터 불온한 괴이쩍은 물건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전기 전자 제품 사용설명서는 개봉즉시 과감하게 바로 쓰레기통에 버린다. 안볼 게 뻔한 것을 보관해봤자 소용없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아도 모르고, 볼 생각도 없다. 설령 어디다 잘 보관한들 나중엔 그 보관 장소 찾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런 나에게 예초기나 잔디깎이 기계는 쓸 때마다 웬수다. 관리가 안 된 기계를 그 해 처음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 닥쳐오는 것은 호환마마보다 더한 무섬증을 불러일으킨다.
시동이 안 켜지면 어떡하나, 어디 고장이 나 있기라도 하면.
때가 되면 불안과 염려가 어디선가 모르게 스머스멀 기어올라오게 되니, 일은 자꾸 미루게 되고, 마누라 성화는 거칠 것이 없다.

ⓒ 김자윤

이런 주인의 심사를 기계라고 어찌 모르랴.
중무장한 작업복을 입고, 헬멧을 쓰고, 우주인처럼, 예측 가능한 위험에 사전 대비할 요량을 숙지한 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
시동줄을 잡아당겼다.
역시 안 켜진다. 두 번 세 번 연달아 시도해보지만, 아니나다를까 허사다.

시동,
그놈의 시동이 늘 문제다. 작년 이맘때도, 재작년에도 역시 그랬다.
시동만 걸리면 거칠 것 없으리.

관우나 장비가 휘둘렀을 삼지창이나 쇠몽둥이보다, 조자룡이 용맹을 떨칠 때 썼을 법한 날렵한 칼날보다, 강호 변방의 마도들이 절치부심 개발해서 무림정파를 놀라게 했을 기괴한 기계장치로 된 비기보다, 수배나 더 위력적이고 더 위협적이고 더 해괴망측한 예초기의 기이한 날을 앞세우고서, 한판 잡초와의 일전을 기세 좋게 벌일 수 있으리.

혹여 예초기와 관련한 사고를 당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또 어떨까.
유치의 김 시인은 기계치인 나의 시선으로 보면 존경과 추앙을 받아도 될 만큼 제법 기계사용에, 심지어 고장 수리에도 능하다.
예전 모후산 자락의 야동 시절엔 한겨울의 동파로 인한 모터나 보일러 등의 고장은  으레 친구인 김 시인에게 의뢰하곤 했다. 그때 이 친구 으스대는 폼은 실로 괴이쩍기 그지없었지.

플라톤에서 칸트 헤겔 심지어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온갖 밑줄 그은 문장들을 들먹이며 독서 편력을 자랑하던 이자의 인상이 무엇보다 진지함과 열정으로 도배되었던 것에 이의를 달 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인 관점과 논리 전개로 말미암아 논리의 허점이 쉬이 노출되기 일쑤니, 그걸 놓칠 리 없는 벗들의 급소 일격은 참으로 이자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고 만다.

고개를 갸웃하며 고장 난 보일러를 들여다보다 급기야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나서 씨익 이렇게, 숫기 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야릇하게 반전을 기도하는 이자의 도발적인 눈매가, 기계치라는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처분만을 기다리는 의뢰인의 입장으론 차마 감당키 힘든 오만함마저 엿보이게 되느니.

반전 김 시인의 예초기 날 사고가 내게 뜻밖인 건 바로 그런 까닭에서다.
이 친구가 어느 날 고장 난 예초기를 손보고 있을 때였다. 그의 부인이 더운 날 오후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비지땀을 닦을 새도 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될똥말똥한 소리를 연발하고 있는 남편 김 시인을 위로할 겸, 샛거리로 찬물 한잔을 올리기 위해 다가서며, 잘 되가느냐고, 인사를 건네는 순간 이었겄다.

ⓒ 김자윤


하필 그때 김 시인은 예초기 시동줄을 당기고 있었고,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그놈의 예초기 날이 순간적으로 튀어올랐으니, 오호 애재라, 안전수칙을 논할 게재가 아니라,
예리한 날의 사정권에 진입했던 부인의 애꿎은 허벅지살만 여지없이 가르고 말았던 것이었으니.

뿐만 아니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이번에도 김 시인은 그놈의 시동질을 하다 예초기 날에 튀어 오른 돌멩이에 한쪽 눈이 다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단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기에 망정이었다.
뒤늦게야 그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정을 떨치지 못했던 벗들로서는 ‘예초기’라는 이 기상천외한 물건을 다시 한 번 에둘러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게다.
    
하여간 좌충우돌 풀과 나무를 베고 척결해내는 것을 능기로 삼는 예초기와 그놈의 날의 효용성을 십분 감안하여 관대한 마음으로 이 위험천만한 문명의 이기를 수용한다하더라도, 그예 고운 정이 베어들 여지는 손톱만큼도 없게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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