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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혐의자 색출

여순항쟁, 그 역사 바로 알기(2)

  • 입력 2017.08.13 15:13
  • 수정 2017.09.23 05:56
  • 기자명 주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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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여순항쟁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문학․예술작품이 있다. 문학과 영화․연극은 정부와 국방부가 깊이 개입되어 그 순수성을 의지할 여지가 있다. 반면에 사진과 음악은 당시 현지 상황과 시민의 애달픈 삶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오늘 사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사진은 글로 표현할 수 없었던 당시의 참혹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순항쟁 당시 사진을 남긴 사람은 광양출신 이경모와 미국인 기자 칼 마이던스(Carl Mydans)이다. 그 이외에도 일부 신문에 현지의 참혹한 광경을 촬영한 사진이 있다.

1948년 11월 14일자 경향신문 <폐허에 우는 여성들>이란 제목으로 5컷의 사진과 <장! 국군의 위용>이란 제목으로 2컷의 사진이 대표적이다(사진-1과 사진-2 참조). <폐허에 우는 여성들>은 남인수가 부른 <여수야화>란 노래의 모티브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 - 2


이경모는 당시 호남신문 사진기자였다. 여수․순천․광양 등에서 이경모가 촬영한 사진은 눈빛출판사에서 <격동기 현장>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아마도 여순항쟁의 사진첩으로는 유일한 기록이다. 아쉬운 것은 이경모의 사진이 전부 공개되었느냐이다. 그가 현지에 있었던 것에 비하며 그 사진의 양이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의심해본 것이다. 이경모의 사진 저작권은 그의 아들이 갖고 있다. 사진을 통해 다양한 해석으로 여순항쟁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작권료로 인하여 그 작업은 쉽지 않다.

미군인 기자 마이던스은 상당한 양의 사진을 남겼다. 그의 사진은 <라이프지>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마이던스 사진의 특징은 연속 촬영이 많다는 것이다. 하나의 실물을 다양한 각도나 시간의 흐름의 변화에 따라 연속 촬영하였다. 이는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추정할 수 있는 값진 사료이다.

오늘 소개하고자 한 사진도 마이던스이 여수서국민학교에서 찍은 연속 사진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서 당시를 재현해보고자 한다.

사진 - 3

<사진-3>은 한 남자가 혐의자 심사를 받기 위해 건물로 들어서고 있으며, 다른 남자는 나가고 있다. 당시가 10월 말에서 11월 초순이다. 상당히 추웠을 것이다. 심사를 받기 위해 건물로 들어선 남자는 팬티만 입고 있다. 신발은 고무신이다. 밖으로 끌려 나온 남자의 검정 러닝셔츠에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이 남자를 주목하여 하여 보자.

심사를 받기 위한 건물로 들어서는 남자를 대동하고 있는 군인은 철모를 썼다. 아주 앳된 얼굴이다. 철모에는 ②란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아마도 대전에 주둔했던 제2연대를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건물 밖으로 끌고 나오고 있는 사람은 정모를 썼다. 그러나 복장은 철모를 쓴 군인과 다르지 않다. 총은 당시 최신 기종이었던 M1 소총이다. 당시 경찰은 검정 제복이었다.

사진 -4


<사진-4>는 밖으로 끌려 나온 남자가 여전히 손을 들고 있다. 러닝셔츠에 팬티만 입었다. 맨발이다. 서국민학교의 본관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뒤편으로 구봉산(왼쪽) 정상과 장군산이 보인다. 골짜기가 오늘날 한재터널이다.

그 주변에는 3명의 군인이 남자를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 모자에 흰 띠를 두르고 왼손에도 하얀 띠를 둘렀다. 토벌군을 의미한 표시이다.

사진 -5

<사진-5>는 멀리 보였던 학교 건물이 크게 보인다. 남자가 버티고 있다.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위협하면서 남자를 빨리 가라고 재촉하고 있다. 남자는 왜 버틴 것일까?

땅에는 수많은 발자국이 있다. 비가 온 다음 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10월 28일 여수는 비가 내렸다고 한다. 아마도 그 언저리의 어느 날일 가능성이 있다.
길게 늘어선 발자국이 남자는 몹시 두려웠을 것이다. 아니 눈앞에 다가온 건물 뒤의 밭이 무서웠을 것이다. 학교 뒤 밭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문이었다. 남자는 직감적으로 총살 장으로 끌려간 것을 알았다. 남자는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그것이 부질없는 짓인 줄 알았지만 안간힘을 썼다.

단 한 번의 혐의자 심사로 남자는 이승을 떠났다. 그렇게 학교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총살되었다.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종산국민학교에 말이다. 순천 북국민학교에서 순천농업학교에서 죽어간 이들은 훗날 빨갱이로 손가락질 당했다. 그들은 언제쯤 해원(解寃)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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