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배바위 밑의 영안소②
  • 2018.07.23 16:22
배바의 밑 영안소 길의 입구 선암사 서부도전

김종렬이 입산한 날은 1948년 초겨울, 여순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낙안 석흥리에서 살았던 그는, 옛부터 낙안에는 부호와 지식인들이 많았던 관계로 일찍이 유학을 다녀온 그 자녀들의 영향을 받아, 일정시대부터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해 왔다.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그는 형과 사회주의 사상에 빠진 동생 종산 이렇게 셋이 조계산으로 입산하여, 최고 책임자는 아니지만 낙안면에서 입산한 금산리의 정성환, 이수만, 이길수 등 많을 때는 사십 명 이상을 이끌었다.

그 시기 북한노동당과 연계된 사회주의사상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사람들은 머지않아 북한이 자본지주들의 세상인 남한을 해방시켜 인민의 세상으로 만든다는 공산주의교육을 굳게 믿고 선전을 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교육에 현혹된 사람들은 자진 입산을 하거나 반신반의 혼란에 빠진 젊은이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입산을 시키던 때였다.

그러나 김종렬 일행은 조계산이 아니라 낙안에서 가까운 조계산의 남쪽줄기인 고동산에서 주로 은신하며 활동을 하였다.

낙안과 외서, 그리고 송광면 장안에서 입산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름대로의 지휘체계와 연락망을 유지하면서도 활동은 소단위부대로 하면서, 때에 따라서는 합동으로 마을이나 지서를 공격하는 작전을 하기도 하고, 벌교토벌대와 교전을 하면서, 우측(서)으로는 빈계재~백이산~석거리재, 좌측(동)으로는 오금재~금전산~불재~제석산으로 낙안을 감싸고 있는 줄기를 따라 다니면서 숨어살다가, 6.25가 나자 산에서 내려가 자기들 세상이 왔다고 잠시 활개를 치고 다녔으나, 북한군이 퇴각을 해버리자 다시 고동산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북한군이 이북으로 후퇴하고 난 이후, 벌교경찰서와 군경합동의 토벌작전이 점차 본격화 되자, 낙안 쪽으로는 산세가 온화한 고동산을 더이상 은신처로 삼기에는 마땅치 않아, 조계산으로 깊숙이 자리를 옮겨 들어온 것이다.

증언 수집 중 낙안 흥림 할머니들

그때가 1951년 봄으로 이때는 많은 입산자들이 죽거나 자수를 하여 그 수가 많이 줄어 있을 때였다.

첫번째로 자리를 옮겨간 곳은 낙안의 가장 깊은 산골짜기마을 화목(흥림)에서 선암사 방향의 영감터재를 넘어 선암사골짜기와 낙안골짜기 사이에 있는 모시동 마을뒤편의 산막골이었다. 그들이 주 은신처로 삼았던 산막골의 중앙에는 완만하게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 산비탈이 있어 오랜 옛날부터 계단식 농지로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왔으나 공비들이 입산을 하자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곳이 있는데, 이 골짜기를 산(농)막이 있는 곳이라 하여 옛 부터 산막골이라 불러 왔었다. 이곳에서 보급투쟁을 하기 위해 마을까지 가려면 약30분 거리에 있는 이십여 가구가 사는 모시동(楮洞)이 제일 가깝지만, 마을이 소개를 한 뒤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를 않아, 야간에는 사람들이 살지를 않아 비어 있는 마을이나 다름이 없었고, 다른 마을들은 비교적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20여분 거리에 선암사로 넘어가는 남암재가 있고 뒤편의 산막등 몬당으로 오르면 선암사의 백호줄기를 따라 위로는 굴목재 몬당과 아래로는 남암재까지 그들의 걸음으로 30~40분이 걸리지 않으며 한계골이나 백련암골로 넘어 선암사로 갈수도 있고 흥림의 영감터재로 돌아가는 중허리 길이 있어 자기마을인 석흥까지도 하루저녁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다.

배바위 밑 은신처 우물터

그렇다고 그들이 산막골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계산이 지리산처럼 크지가 않아 어느 한곳에 본부를 두고 지휘 하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입산자들의 마을과 가까운 곳 여기저기에 아지트를 두고 살았다. 그 이유는 지리에 밝고 마을사람들 특히 부모형제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보급투쟁이라고 하는 식량조달의 용이함이 절대적인 이유였다.

그렇게 주간에는 은신을 하고 야간으로만 활동을 하게 되는데, 만약 토벌대가 주간에 그 골짜기를 토벌하게 되면 다른 골짜기로 달아나 숨어 있다가 야간에 다시 돌아와 다 태워버린 막사를 나무로 다시 얽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골짜기마다 물이 있고 은신조건이 되는 곳은 아지트로 삼았다.

그래서 산막골로 옮긴 이후에는 상사와 쌍암의 입산자들도 동료로 거느리고 차차 선암사 쪽의 골짜기를 활동무대로 삼게 되어 남암골과 냉골을 거쳐 장군봉으로 돌아오는 조계산 동남편의 모든 골짜기와 능선들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바로 이때, 쌍암일대에서 입산한 동무들이 만든 배바위 밑 은신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종렬도 이곳에 와서는 길과 직선거리로 백 미터도 될까 말까한 곳에 이렇게 큰 규모의 아지트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등하불명(燈下不明)의 허점을 잘 이용한 곳이구나, 하고 감탄을 했으며, 지금은 동지들의 수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 막사의 규모가 3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라는 데서 더욱 놀랐다.

그해 여름은 녹음기라서 토벌이 조금 잠잠하는가 하더니 추수가 끝난 늦가을로 접어들자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밤낮으로 쫓겨 다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욱더 험난한 보급투쟁을 해야만 했다.

이때 고동산 방향으로 돌아 보급투쟁을 나갔던 동생 종산과 같이 갔던 한마을의 한영철, 이만호와 상사의 박창근 4명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아침이 되어도 한사람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직감으로 왔다.

누군가의 배신으로 잠복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럴 수가 없다.

여기서 배신이라 함은 함께 갔던 동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인민해방의 배신자로 규정하여 하는 말이다.

김종렬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날로 보복을 하기 위하여 밤까지 기다리지를 못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낮에 석흥으로 내려갔다.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당장 내려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같은 사살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보복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경계를 강화하고 조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이 당했으니 그런 것이 머리에 떠오를 리가 없었다.

마을로 내려가 일단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동네일을 보는 친구 집으로 숨어들어가 좀 보자고 했다. 지금은 산사람이 되었지만 오래토록 한마을에서 친구로 자라왔던 터라, 어찌 왔냐고 반갑게 맞으며 들어오라고 하자, 손가락으로 입을 가려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물어볼 것이 있어 왔으니 잠깐 나오라,고 하는데 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고 무엇 때문에 왔는지 짐작이 갔다.

 

마을의 사정을 손금 보듯이 알고 있기에 안전한 산 쪽 언덕 밑으로 데리고 가더니, 어제 장안재 부근에서 누가 반란군들 잡았냐,고 묻었다.

사실은 내용을 모르면서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친구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어제는 그일 밖에 없었으므로 굳이 모른다고 할 필요가 없어 신촌 건너편에서 경찰들이 반란군들 죽였다고 들은 대로 말을 해줬다.

그러자 다짜고짜 누가 신고를 했냐고 물었다.

화목 사람 누가 신고를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만약 알아도 말을 해줬다가는 반드시 보복을 할 것이고 뒤에 그것이 탄로 나면 마을에서는 살 수가 없게 될 것이 빤하므로, 어찌 그런 것을 나한테 묻느냐,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러자, 어제 자기 동생 종산이가 죽었다며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기어이 말을 해주지 않으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더라도 반드시 보복을 할 것,이라고 다짐을 하며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몰아 붙였다.

더 이상 어물거렸다가는 그 자리에서 당장 자기는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다 죽일 것처럼 살기가 등등하여 정신이 아득해 왔다.

순간 엉겁결에, 화목의 최영금이 한테 가서 물어 보라,는 말이 튀어 나오고 말았다.

최 영금은 화목에서 경찰과 잘 통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름이었다.

그러자 내가 산으로 돌아갈 시간까지는 신고를 하지 말라고 다짐을 주며 곧장 화목으로 달려가 마을 위쪽에 있는 집으로 숨어 들어가 살펴보았으나 최영금은 집에 없었다.

자정이 넘도록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그날은 아지트로 돌아갔다.

다음날도 다시 화목으로 내려가서 최 영금을 찾았으나 집에 나타나지 않으니 의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찾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보복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날 최영금이 장안재 부근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신고를 하여 경찰들이 잠복사살을 하자 보복이 두려워 잠시 피해 사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확신을 한 종렬은 절대로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며칠을 숨어서 감시를 하다 밤에 집으로 들어가는 영금을 발견하여 총을 들이대고 끌고 나왔다. 이미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최영금은 그래도 산으로 끌려가면서 애원을 해보았지만 이미 종렬에게서는 살기만 밀려올 뿐이었다.

잠시 후 산속에 몇 발의 성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 일이 있은 이후에 산막골도 대대적인 토벌을 당하게 되어, 김종렬은 십여 명 밖에 남지 않은 부하들을 데리고, 거의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배바위 밑 은신처로 옮겨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니면서 살다가 남암 옆에서 그와 같은 일은 당한 것이었다.

조계산에서 입산자들이 부상을 당하면 시술이나 약으로 치료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초기에는 아까징끼 같은 소독제를 민가에서 구해와 바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약이라고는 구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혹시 아편 같은 것을 몰래 숨겨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직접상처치료와는 무관하였다.

총을 맞으면(환자가 발생하면) 지혈을 하고 군당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 환자 터로 옮기거나 스스로 찾아가 치료를 하게 된다.

환자들을 최선을 다해 보살펴야 된다고는 하지만 방법이 없으니 약효가 있다는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찧어 바르는 것이 고작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주간에는 수시로 옮겨 다녀야 하고 환자들의 고통소리로 위치가 탄로 날 위험이 있으니 당번들도 피해야 하므로, 야간에는 치료를 도와주기도 하고 음식을 제대로 나누어 줄 수 있지만, 주간에는 토벌대가 떴다고 하면 그곳으로 직접 오지 않더라도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주먹밥이나 고기 삶은 것 등을 미리 조금씩 나누어 주고는, 보초를 나간다고 경상자들과 그 자리를 피하니, 버려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을 참다가 결국 죽어가는 것이 그들의 사정이었다.

장종석이 총을 맞고 배바위 밑 은신처에서 사경을 해맬 때는 조계산의 공비토벌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그 역시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풀뿌리를 찧어 발라 묶어서 눕혀두고 물을 먹이며 가끔씩 억지로 음식을 떠먹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금방 죽을 것만 같으면서도 죽지는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순천과 벌교경찰서 관할이 동시에 합동으로 대대적인 조계산토벌작전이 연일 전개되어, 전에는 회피하고 잘 들어가지 않았던 골짜기 모두 빠짐없이 토벌이 실시되었다.

이로 인해 조계산의 반란군들 모두 갈팡질팡 쫓기다가 거의 다 죽거나 일부 패잔병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 전멸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김종렬 역시 쌍암의 문창수와 함께 거의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는 형편이 되어, 대토벌작전이 끝난지 십여 일이 지난 밤, 다른 골짜기에서 만난 패잔병 3명을 이끌고 배바위 밑 은신처로 찾아왔다.

도착하여 보니 장 동무는 이미 죽은 지 며칠이 지난 상태였고 그 옆에는 네 구의 시체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거의 사망 직전 동무들 3명이 누워 있었다. 이번 토벌로 심하게 부상을 당한 자들이었다.

경상자들은 동료들을 따라가거나 자포자기심정으로 최후의 목숨이 이끄는 본능에 따라 마을인근으로 숨어들어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부상이 심한 자들은 동료들이 마지막 배려로 이곳으로 옮겨주고 갔거나, 최후의 안식처로 삼고자 스스로 하나 둘 찾아든 동무들이었다. 이 광경을 눈앞에 두고 김종렬은 태산같이 굳건했던 신념은 말할 것도 없고 영혼마저도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머릿속이 공황상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이루지 못한 꿈을 안고 누워 있는 다섯 동지들을 안아, 차례로 밖으로 옮겨 가지런히 누이고 나서, 자신도 곧 뒤따라갈 터이니 편히 잠들라고 고개 숙여 눈물을 뿌렸다.

 

그날 밤은 시체나 다름없는 세 동무들 옆에서 모두 눈을 붙였다.

새벽에 잠이 깨어보니 세 동무들 역시 차가운 몸으로 이 세상을 하직한 상태였다.

그들의 얼굴을 굽어보니, 자신의 처지와 비교를 해서인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하늘을 원망하는지 눈을 뜨고 있는 동무의 얼굴을 쓸어 감겨주면서, 제발 인민들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가라,고 중얼거렸다.

날이 밝아오자 세 동무의 시체를 다섯 동무들 옆에 나란히 누이고 나서 그들은 김종렬과 함께 마지막 남은 생명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조계산에서 활동한 입산자들의 배바위 밑 아지트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여덟 구의 시체를 숲 그늘에 숨긴 채 총성의 흔적을 서서히 자연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배바위 밑 은신처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하면 작은 굴목재에서 선암사방향으로 골짜기를 따라 약 120미터 아래 지점에서 큰 굴목재와 작은 굴목재 중간을 향해 제법 가파르고 거칠게 형성된 골짜기의 약 백 미터지점 우측 산비탈로, 서부도전에서 작은 굴목재를 향해 오르다가 비로암에서 돌아오는 길과 만나기 직전의 마지막 가파른 길의 중간지점에서 남쪽으로 건너다보이는 곳이다.

아지트가 있는 골짜기의 입구에는 숯가마 터와 그 앞에 물이 나는 우물자리가 있고, 그보다 조금 위에도 물이 나는 곳이 있어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토벌대가 다니는 길과 가까이 있음에도 아지트가 생긴 이래 마지막까지 감쪽같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가, 끝내는 여덟 구의 시체를 안고 최후를 맞이하였으나, 조계산의 공비토벌이 모두 끝난지 3년이 지난 뒤에 이곳이 김 영감님과 최선용 청년의 눈에 띄어, 뒤늦게나마 허옇게 발한 백(魄)을 땅속으로 돌려보낸 후, 차마 떠나지 못하고 백의 옆을 맴돌던 혼(魂)은 하늘로 보내면서 제발 한을 풀고 가라고 기원하였다. 끝.

2010. 4.

 

<배바위 밑 아지트는 2005년부터 약 5년간에 걸쳐 선암사 입구 죽림마을의 남상윤(96) 최봉영(74) 괴목의 유천년(87) 최선용(84) 오성옥(75) 등 여러분으로부터 수집한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입산활동 자들로 거명되는 이름을 무작위로 재구성하였음.>

김배선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 저자

<저작권자 © 여수넷통,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포토뉴스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