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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학살지 애기섬 "69년만에 '원혼비' 세웠는데...."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전국 46개의 학살지에 백비 건립 '여수는 31번째'
자식된 도리로 의무를 다 못했는데.... 비석 세워줘 '감개무량'

  • 입력 2019.07.26 18:03
  • 수정 2019.08.06 17:08
  • 기자명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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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들이 '과거사 기본법 즉각제정하라'는 띠를 두르고 출항채비중인 모습

26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와 여순사건유족여수유족회가 전남 여수에 위치한 애기섬에 원혼비(冤魂碑)를 세웠다.

안개가 끼고 날씨가 흐린 가운데 신월동 금성휴먼아파트앞 부두에서 21명이 모였다. 백비위령순례단 회원들은 '가야할 땅 되찾아야 할 이름들 백비'라고 쓴 티를 입었다. 국회를 향해 어깨에는 '과거사 기본법 즉각제정하라'는 띠를 두르고 출항채비를 했다. 회원들은 낚시어선을 타고 애기섬을 찾아 원혼비를 세웠다. 이후 희생자에 대해 간단히 음식을 차린뒤 제사를 모셨다. 유족들은 수장된 현장에서 69년만에 첫 제사를 모시며 오열했다.

120여명이 수장된 보도연맹 학살지 '애기섬'

회원들이 입은 티에 '가야할 땅 되찾아야 할 이름들 백비'라고 쓰여있다.
26일 애기섬에 세워진 원혼비인 백비
69년만에 애기섬에 원혼비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
백비위령순례단 회원들이 애기섬 행사를 마치고 펼침막을 펴고 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는 보도연맹사건을 비롯해 민간인이 희생된 전국의 46개의 학살지를 돌아다니며 백비를 세우고 있다. 이날 남해 애기섬에 31번째 원혼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애기섬을 돌아본지 아홉 번째 만에 세워진 셈이다. 이 단체는 휴전선을 비롯해 학살지마다 계속 백비를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비석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달랑 세글자 ’원혼비(冤魂碑)‘라고만 쓰여 있다. 이 단체 관계지는 “돌아가신 분들이 얼마나 한이 맺혔겠나”라며 “진실규명이 되지 않아 비석에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백비인데 원혼비라고 썼다. 나중에 진실규명이 되면 그 안의 내용은 국가가 적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백비를 세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해학살자 전국유족회' 김선희(73세) 사무국장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김선희(73세) 사무국장의 말이다.

“저희가 작년 7월부터 여수를 기점으로 오늘이 9차 백비위령순례다. 작년에도 맨 먼저 여수부터 시작했는데 전국의 학살지를 찾아다니며 학살지 표지석을 세우고 다닌다. 저희 세대가 지나면 학살지가 어디인지 후세들이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 유해발굴을 하더라고 저희들이 세운 표지석을 중심으로 유해발굴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수 애기섬은 보도연맹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을 싣고 가 수장한 장소다. 그분들이 얼마나 원통하겠나. 오늘 배를 불러 학살지 표지석인 원혼비를 세우러 간다.”

여순사건여수유족회 장두웅 부회장의 모습

현장에서 만난 애기섬에서 희생된 유가족 장두웅씨의 아버지 장영석(당시33세)씨의 사연은 기구하다. 장씨는 삼일면 적량리에 살았다. 여순사건 발발당시 부산에 피신가 있었는데 이후 자수기간에 자수를 했다. 아들 장두웅씨의 말이다.

“아버지는 논 서마지기를 팔고 소 큰놈하나 잡아서 지서에 가서 대접하고 자수를 했다.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는 이유였다.  이후 6.25가 난 줄을 몰랐는데 인편으로 지서에 오라고 연락을 받고 갔다. 갔더니 지서 유치장에 넣어놓고 안보내줬다. 이후 사식을 사서 지서에서 이틀을 넣었는데 사흘째 여수경찰서로 넘어갔다. 아버님은 1950년 7월 16일 밤 여수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가 승선해 애기섬 부근에서 수장되어 시신도 찾지 못했는데 학살한 사람과 말이 일치한다. 같은날 제사 모시는 사람이 유족회만에만  13명이다. 애기섬에 수장된 분들은 1차에서 3차까지 150명~200명으로 알고 있다.

여순사건여수유족회 장두웅 부회장은 “우리가 비석을 세워야 하는데 능력이 없어 아직까지 세우지를 못했다. 전국유족회가 우리를 대신해 세워줘서 감개무량하다”면서 “자식된 도리로 의무를 다 못했는데 살아 생전에 이런 비석을 세워줘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애기섬 도착 모습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가 애기섬에 원혼비를 세운 모습

한편 1949년 6월 5일부터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성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여수의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여순사건관련자들로 좌익활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이 중심이 된 조직이다.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으나 통상 보도연맹이라 불렸다. 1949년 말까지 가입자는 전국적으로 30만 명에 달했다. 좌익세력을 통제, 회유하려는 목적이었다.

여수의 경우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을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 오동도 맞은편 무인도인 경남 남해 남단에 있는 애기섬으로 끌고 가 총살뒤 수장했으며 남면, 화정면, 삼산면의 섬지역은 주변의 무인도나 바다에서 처형뒤 수장시켰다. 당시 특무대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애기섬 희생자는 약 120명 이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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