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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만, 여순항쟁 71주기 그림으로 역사를 돌아본다

노마드갤러리 박금만 초대전 ‘되찾은 기억’전 이달 30일까지
그림과 함께하는 뮤직 토크, 19일 오후 3시에

  • 입력 2019.10.15 11:24
  • 수정 2019.10.15 11:49
  • 기자명 곽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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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금만이 그림으로 ‘여순항쟁정명’활동을 펼치고 있다.

여수 출신으로 지역의 아픈 현대사인 여순사건을 놓고 그림으로 ‘여순항쟁정명’활동을 펴고 있는 박금만 작가가 지난 12일 신기동에 위치한 노마드 갤러리서 오프닝을 갖고 오는 30일까지 초대전을 연다.

‘되찾은 기억’이라는 주제로 열고 있는 박금만 작가의 이번 초대전에서는 그가 그동안 여순항쟁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당시의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이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는 자신이 여순항쟁 유족인 때문이다. 여순항쟁 당시 작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남동생이 좌익으로 몰려 희생당한 유족이다.

앞서 박금만 작가는 여순항쟁 70주기를 맞은 지난해에도 이를 주제로 한 6점의 작품을 선보이며 여수, 순천, 서울 국회의사당앞에서 길거리 전시를 가진 바 있다.

박 작가는 “고향 여수에 내려온 지 어느덧 5년의 세월이 흘렀다”며, “그동안 여순항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만 몰입해 왔다”고 전한다.

박 작가가 고향 여수에 왔을 때 느꼈었던 것은 1948년 10월 여수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두고 “어떤 이들은 ‘반란’이다. 또는 ‘사건’이다, 다른 이들은 ‘항쟁’이다를 놓고 지루한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내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왔다”고 씁쓸해했다.

그러면서 여순항쟁을 놓고 작업을 하려고 하는 작가 자신을 향해서도 “뭣 하러 그런 그림을 그리려 하느냐”면서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었다고 말한다.

박 작가는 그럴수록 여순에 대한 그림을 그리려고 공부하고 찾다 보니 이는 결국 여순은 ‘항쟁’이라고 규정할 수 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여순을 바라보는 시각을 분명히 피력했다.

무엇보다 그는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며 제주 츨병 거부를 한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봉기를 한데 이어 이를 진압하고자 여수에 들어오고 있는 토벌군에 맞서 당시 1천명이나 되는 시민, 학생들이 다섯 차례나 방어에 성공하면서 여수를 지켜 낸 것만 봐도 이것은 항쟁이 아니겠냐”며, “이것을 감추려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일 열릴 뮤직토크 안내 포스터

한편 전시가 열리는 노마드갤러리 현장에서 여순항쟁 당일인 19일 오후 3시 ‘그림과 함께하는 뮤직토크’가 열린다.

여수항쟁 71주기를 맞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언론인 김유화씨의 사회로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와 박금만 작가의 ‘여순항쟁’ 역사토크가 당시의 여순을 노래한 대중가요와 함께 관객들을 만난다.

초청 음악인 ‘해상화 밴드’와 ‘상록수밴드'가 여수야화','여수블루수','산동애가'등을 연주한다. 

덕충동 전투 : 여순항쟁 토벌 작전 막바지 당시 여수 중학생과 수산학교 학생과 지역의 청년들이 현 석천사와 중앙여고 인근에서 시내로 진격하는 토벌군에 맞서고 있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잉구부 전투에서 패배한 토벌군들이 26일 재 반격에 나선데 이어 토벌군의 수와 무기의 우세함에 밀린 청년, 학생들이 덕충동 마을로 후퇴한다. 토벌군들은 이날 지난 전투에서의 패배와 저항에 대해 복수로 하는 듯 덕충동 마을로 진입 집마다 사람들을 몰아넣고 화염 방사기로불태워 죽이고 100가구 가 넘는 집이 거의 불탔고 4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10살 이하의 어린아이도 있었다. 40여 명의 시신 중 온전한 시신은 4구에 불과했다.박금만 작가는 지난해 길거리 전시전을 하는 자신의 작품이 바닥에 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로 있었고 심지어 작품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교통사고도 있었다고 담담히 전했다. 그러면서 심지어 작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인 작품을 놓고 이발소 그림이라는 이라는 소리도 감내했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무엇보다 아내와 아들에게도 많은 신경을 써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도 함께 전하며 주변에 감동을 줬다

 

종포전투 : 박금만 – 1948년 10월 19일 여순항쟁이 일어난 후 여수를 진압하고자 동년 23일 부산에 주둔한 5연대(대대장 김종원 대위)와 해군부대(이상규 소령)가 여수 상륙작전을 펴면서 박격포 공격을 가해왔지만 여수의 시민, 학생, 일부 봉기군이 저항군의 숫자가 많은 것으로 보이기 위해 허수아비를 세워내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전법은 이순신 장군이 펼쳤던 전술을 착안 한 것이다. 이후에도 5연대와 해군은 두 차례 더 상륙작전을 펴지만 실패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수를 진압하고자 나선 군함이 충무공호와 천안함호 이다. 여수를 진압코자 충무공의 혼이 깃든 여수를 충무공함을 내세운 것이다. 는 게 박금만 작가의 설명이다.

 

잉구부 전투 :  1948년 당시까지 여수에서 북쪽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로 왼쪽으로 구부러진 지형 때문에 왼구부라 불리지만 여수사람들이 왼구부라는 발음을 잘 못해 잉구부라 불리게 된 곳이다. 1948년 10월 24일 토벌사령부의 송호성 사령관의 지휘 아래 여수로 진입하려는 진압군들에 맞서 여수시민군들이 이 협곡 일대에 매복해 2번째 전투를 치르면서 송호성 사령관이 큰 부상을 입는 등 여순 항쟁기간 동안 시민군들이 가장 큰 승리를 했다.다만 전투 과정에서 당시 순천사범에 재학 중인 여학생 정기덕이 토벌군의 총탄에 맞고 죽게 된다 25일 정기덕의 잘례를 여수군 인민장으로 치른다

 

이제는 해원으로 = 박금만 작가의 주된 작품 중에 하나가 철갑옷을 입은 사람들이다. 그가 이번에 여순 항쟁 당시의 모습에 철갑옷을 입은 이들의 작품을 함께 곁들여 넣은 데는 죽음의 공포가 여순의 대기를 누르고 소름끼치는 적막한 운동장에 생을 포기한 사람들 앞에 갑옷을 입은 사람이 그곳에 나타나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하고자 했다면서여순에 희생된 모든 분들을 생각하며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특히 진압군에 나선 이들 또한 명령을 따랐다고는 하지만 그 잘못된 명령이 인간을 이 토록 잔인하게 만드는 역사를 볼 때 그들 또한 불쌍하다면서 다시는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죽여야 하는 그런 현장을 만들지 말자는 의미를 담았다. 이번 박금만 자가 초대전 되찾은 기억을 열고 있는 대안 예술공간 김상현 관장은 지난해에도 여순항쟁 70주기를 맞아 여순항쟁 기록전을 열면서 1,500여명이 관람해 많은 언론과 관람객으로부터 주목받은 바 있다. 김 관장은 지난해 전시는 여순항쟁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제별 담았다면 이번 전시는 여러해 동안 여순 항쟁에 관한 많은 작업을 해 온 박금만 화가의 작품을 통해 당시 상황에 관한 기록들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의 관점으로 재 지평 하면서 여순항쟁이라는 정의를 내리는 토대로 마련코자 했다고 전했다.한편 박금만 작가의 이번 되찾은 기억전을 맞아 오는 19일 오후 3시에는 노마드갤러리에서여수뉴스타임즈(여수 까치 정보 자매지 대표 김경만), 여수넷통뉴스(대표 엄길수 이사장)의 공동주관으로 ‘되찾은 기억, 되찾은 노래'라는 주제로 전시장에서 '그림과 함께 하는 뮤직토크’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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