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넷통뉴스와 여수뉴스타임즈가 주최하는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답사가 24일 개최됐다.
20여명의 시민들은 1948년 국군 14연대 군인들이 봉기하며 시내로 진출한 길을 되밟았다.
오전 8시반 웅천 이순신공원에 모인 참가자들은 주철희 역사학자의 안내에 따라 신월동과 연등동, 중앙동을 차례로 방문했다.
여순항쟁 이해하려면 일제강점기 여수의 모습부터 알아야
답사 첫 번째 장소는 일제강점기 시설이 남아 있는 신월동이다. 1943년에 만들어진 콘크리트 수상활주로가 있는 이곳은 썰물에만 시설을 볼 수 있다. 밀물을 이용해 수상활주로를 철저히 숨기려 한 일제의 계략이다.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콘크리트 수상활주로이지만 관리를 하지 않아 계속 훼손되고 있다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수상활주로 반대편에 보이는 구봉산 산능성이에는 일제강점기 해군 202부대가 주둔했는데 이 시설을 이용해 14연대가 자리하게 되었다. 우뚝 솟은 콘크리트 굴뚝 역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제주 서귀포 알뜨르 비행장 같은 여타 군 시설과 달리 신월동 군부대에 높은 굴뚝이 자리해 위치를 숨기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사용할 식료품을 만드는 공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 시설과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을 병참기지라 하며 여수에는 비교적 많다. 그러나 대부분 지하에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주 박사의 말에 따르면 반대편 구봉산 산능선이에 남아있는 격납고만 5개며 4개는 현재도 사용한다.
군 시설인 제주 알뜨르 비행장 밑에는 방어진지인 지하벙커가 많다. 여수 돌산에도 많은 지하벙커가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 박사는 “제주도 송악산 군 시설은 1945년 일본이 필리핀에 패하면서 본토가 공격받을 것을 우려해 만들었고 여수 군 시설은 1942년 군사요새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서쪽 끄트머리인 신월동에 위치한 14연대는 여수역으로 가기 위해 위에서 말한 구봉산 산능성이를 넘어야 했다. 주 박사는 “여수역으로 가려다보니 부득이하게 시내를 관통해야 했을 뿐 여수를 장악하려던 것이 아니다. 북상하는 데 굳이 먼 여수역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즉 14연대는 원래 가려던 길을 합해 총 세 갈래로 나뉘어 북상했던 것이다.
주 박사는 “여순사건을 설명하는 많은 전문가들의 글에 오류가 있다”며 이는 여수 출신인 연구가가 부족해 당시 사건 발생 시기의 공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주 박사는 “현재의 공간과 1948년의 공간은 같지 않음에도 많은 전문가들이 지금의 공간에 과거의 일을 대입해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14연대는 일본 해군출신인 이영순이 창설했다. 당시 욱일기는 일본 해군기였고 이영순은 갖고 있던 욱일기 위에 그림을 그려 깃발로 사용했다. 이 사진에서 군 역시 친일파가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미군이 사진에 찍힌 것으로 보아 여순 토벌에 미군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답사지는 14연대가 무기고로 사용한 지하벙커다. 주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여수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과 관련된 시설이 많고 지하벙커도 그중 하나다. 주 박사는 여수에는 근대문화유산이 굉장히 많지만 무관심속에 방치되어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주 박사는 “최근 여수에서 일제강점기 땅굴이 발견되었다고 뉴스에 나왔다. 직접 가보니 해당 벙커의 규모는 매우 컸다. 하지만 여수시는 이를 콘크리트로 막고 흙을 덮을 정도로 무지하다”고 비판했다.
참가자들은 첫 번째 지하벙커 입구로 들어갔다. 이곳은 강제동원된 전남의 중학생들이 만든 것이다. 전남의 모든 중학교는 두 달씩 번갈아가며 벙커를 만들었다. 이렇게 강제동원되어 군사시설을 만든 학생을 근로보국대라 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연합군의 공격을 받을 당시, 한반도 역시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특히 여수가 큰 피해를 입었고 불발탄을 해체하던 시민 30여명이 큰 피해를 입었다. 주 박사는 한반도가 미군 연합군에게서 받은 공격에 관해 가르치지 않는 현실도 지적했다.
1917년 개설한 여수 최초의 초등학교인 서초등학교는 1948년 10월 26일 여수로 들어온 토벌군의 본부로 사용된다. 토벌군은 포탄을 쏘아 여수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여수의 일제강점기 시설은 모두 불에 타 사라진다. 또한 여수 시민들은 반란에 가담했거나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교 뒤편에서 처형당했다. 즉 이곳은 토벌군 부대와 반란군 색출 장소로 사용됐다.
칼 마이더스는 민간인학살이 발생한 이곳 서초등학교에서 손가락총에 지목받아 끌려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주 박사는 “손가락총에는 개인적 감정으로 인해 지목하는 이유도 많았고 당시 우익청년들이 가장 많이 이를 행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주 박사는 “14연대는 헌법에 명시된대로 자국민을 자국의 군인이 해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일 뿐 반란을 한 것은 아니”라며 이는 5.18 신군부의 비상계엄조치가 부당한 조치이므로국민의 권리를 행한 광주 시민들의 항쟁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인구부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시민들.. 그러나 곧 비극으로 바뀌어
여순항쟁이 일어난 그 당시 충무동 로터리 부근에는 서정지서라는 파출소가 있었다. 제주도 출동 명령을 받고 신무기인 M1을 장착한 14연대는 가뿐히 교전에 승리한다. 이것이 군과 경찰의 첫 번째 교전이고 14연대는 현재 삼성당 사이로 보이는 작은 길을 따라 북상한다. 참가자들은 14연대가 북상한 길을 따라 버스를 타고 인구부로 향했다.
충무동 로터리와 연결된 인구부 전투지는 유일하게 북상할 수 있는 길이다. 미군 종군기자와 정기덕이 사망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왼쪽으로 구부러져 왼구부라는 이름에서 인구부로 변했다는 설도 있지만, 주 박사는 인구부라는 명칭이 ‘목구멍 인’, ‘입 구’를 사용했다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당시 곳곳에서 군경 간의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를 두고 정부는 반란인지 군경의 갈등인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정일곤과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이 상황을 확인하러 광주로 내려오고 여순항쟁이 군경의 충돌을 넘어선 시민들의 봉기임을 확인한다. 이후 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가 설치되고 이들은 첫 번째 점령지로 순천을 택해 쉽게 점령한다.
그러나 여수는 점령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주 박사는 그 이유로 사통팔달인 순천과 달리 여수는 진입로가 잉구부 한 곳밖에 없기 때문이라 말했다.
유목윤이 이끈 시민군은 잉구부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지만 그 과정에서 미군 종군기자가 사망했다. 이는 여수 시내가 불바다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명 중요한 사망자는 시민군을 도와 실탄을 나르던 여학생 정기덕이다. 시민들은 정기덕의 장례를 성대히 치렀고 당시 정기덕의 어머니를 인터뷰한 자료도 남아있다.
주 박사는 잉구부 전투가 중요한 이유로 여순이 항쟁임을 증명한 전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 박사는 “내가 사는 곳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총을 든 여수 시민들의 마음은 광주5.18에서 군에 맞선 광주 시민들의 마음과 같다”고 말했다.
시민이 승리한 잉구부전투는 종군기자 사망에 분노한 미군이 국내 15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여수에 보내 초토화 시키는 원인이 된다.
참가자들은 이어서 진남관으로 향했다. 국보 제304호 진남관 건너편에는 통증의학과가 있다. 이 건물은 당시 2층 목조건물 소산상회였다. 인민대회 의장은 소산상회 베란다에 나와 시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연설을 했다.
인민대회 의장으로 여수인민보를 발행한 박채영, 이용기, 문성휘 그리고 인구부 전투를 이끈 유목윤, 김귀영 총 5명이 선발됐다. 인민대회에서 이들은 동포를 죽일 수 없다며 제주 출병을 거부한다.
인민위원회는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시민들의 바람을 실현시키며 함께 결집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주 박사는 "인민대회 이후 이들이 정책을 실현하지 않았다면 잉구부 전투는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인민대회에서 제14연대 특무상사 지창수가 인민해방군 연대장으로 연설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10월 23일 1차 전투가 일어난 종산초등학교는 현재 여수중앙초등학교다. 여순항쟁이 진압된 후 많은 시민들은 이곳 종산초등학교에 수용된다. 그리고 부산 제5연대 대대장 백두산 호랑이라 불린 김종원 대위의 주도 아래에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시민 참수가 자행됐다.
중앙초등학교 뒤편에는 여수여고가 있다. 여수여고는 1948년 여수여자중학교였으며 여순항쟁 주모자로 몰린 송욱 교장이 부임하던 곳이다. 김종원 대위가 이끄는 제5연대는 이 학교에 주둔했다.
송욱 교장이 반란 주모자로 지목당하자 여순사건은 느닷없이 민간인 반란의 성격을 띤다. 이는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죄를 묻지 않기 위함이다. 송욱은 대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당한다. 당시 국무회의에서 여순항쟁을 '전남반란사건'이라 기록한다.
송욱의 억울함은 부산에서 온 정영모 기자에 의해 밝혀진다. 정영모 기자는 <부산신문>에 송욱과 나눈 대화 내용을 11월 4일부터 6일까지 세 번에 걸쳐 신문에 기사화한다. 정영모 기자는 “인민위원회가 신망 높은 송욱의 이름을 연설자로 내세웠다”고 밝혔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 또다른 비극 불러와
마지막 답사 장소는 형제묘다. 죽어서도 형제처럼 함께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형제묘에는 박채영과 그의 동생이 묻혀 있다.
형제묘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은 후 다시 화형까지 당했다. 이같은 방식은 순천 매곡동과 이후 1948년 12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다. 즉 여순을 통해 자국민을 잔인하게 학살해도 된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라고 주 박사는 설명했다. 이러한 여수 토벌의 앞잡이 중에는 일제강점기 독립군을 살해한 간도특설대 출신 김백일 사령관과 송석하 사령관이 있다. 주 박사는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잔인한 학살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형제묘 비석은 두 겹으로 덧씌워졌다는 특징이 있다. 2005년 비석이 만들어진 후 2006년 덧씌워졌다. 초기에는 비석이 없고 묘만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을 한 정기만과 정기옥도 이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정기순이 박채영의 가족과 이들을 기리기 위해 형제묘를 만들어 지킨다.
이후 비석을 두 겹으로 덧씌운 사람은 인민대회 의장을 지닌 박채영의 가족이다. 박채영의 가족은 빨갱이의 자손이라는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비석을 덧씌워버렸다. 주 박사는 아직도 여순항쟁 희생자들의 후손에 영향을 끼치는 연좌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여순항쟁 명칭에 대한 논쟁은 해소될 수 없다고 말했다.
답사에 참여한 1958년생 심재희 씨는 공무원으로 생활하면서 많은 시간을 타지에서 보냈다. 그는 2018년 퇴직하고 나서 여순항쟁에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을 읽는 등 공부를 하고 있다. 심 씨는 “돌산에서 태어나 여순항쟁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여순항쟁에서 희생된 분 중에 친척이 몇 분 계시는 것을 알게 됐다.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과 답답함을 해소해드리려면 나부터 역사공부를 해야 될 것 같아 참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수넷통뉴스 심명남 이사장은 "지난해 여순항쟁 72주년 특집기사 연재에 이어 올해도 이렇게 네번째 역사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며 "여순특별법 국회 통과로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의 길이 열려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년 1월 여순특별법이 시행되면 1만1,131명의 생명을 앗아간 여순항쟁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게 되는데 지역언론으로써 희생자 명예회복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여수뉴스타임즈>와 <여수넷통뉴스>는 매년 여순항쟁 유적지 답사 프로그램을 개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