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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정신은 내 이웃 아픔을 외면 않고 사는 것"

[인터뷰] 투사회보 제작 배포한 서한성씨

  • 입력 2022.07.30 18:46
  • 수정 2022.07.31 11:14
  • 기자명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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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 당시 박용준 열사와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 배포하고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서한성(66)씨가 지난 28일, 42년 만에 5.18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놨다.

그는 5.18 민중항쟁 정신은 한 마디로 "내 이웃 아픔을 모르고 살지 않는 것"이라 말하였다. "5.18은 꼭 5월이 돌아와야만 떠올려야 하는 항쟁도 아니다"고 하였다.

▲ 5.18 당시 활동을 증언 중인 서한성 씨  ⓒ정병진
▲ 5.18 당시 활동을 증언 중인 서한성 씨  ⓒ정병진

서씨는 지금껏 5.18 행사를 일부러 가지 않다가 올해 처음으로 참석해 보았다고 하였다.

오월 단체들이 여러 군데 있지만, 지금껏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국가유공자 신청도 굳이 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5.18 당시에 대학생들을 비롯한 식자층은 모두 도망였고 항쟁을 이끈 이들은 무지렁이들인데 그들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하였다. 다음은 28일 서한성씨를 나주 동강 여휴당에서 만나 나눈 일문일답이다.


- 본인 소개를 해 달라.
"56년생이고 현재 광주에서 택시 기사로 일한다. 5.18때는 들불야학 학생들 데리고 도청 앞에서 대자보 붙이고 마이크 설치하고 그때 시민 김상집씨랑 같이 버스 타고 다니면서 주먹밥 날라주고, 친구 박용준이랑 투사회보 만들고 그랬다."

- 5.18 하면 '투사회보'가 유명하다. 그 투사회보 만들다가 계엄군의 마지막 도청 진압 때 총탄에 맞아 돌아가신 박용준 열사도 많이 알려졌다. 박 열사의 글씨가 '박용준 열사체'라고 폰트 등록도 돼 보급되는 중이다. 그의 아주 가까운 친구라 들었다. 박 열사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박용준 열사라고 하면 좀 거리감이 있으니까 그냥 이름만 부르겠다. 용준이와 나는 고아들 맡아 돌보는 영아원인 광주 영신원 1기생이다. 갓난이 때부터 같이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무등육아원라는 데를 함께 갔다. 5.18 무렵엔 용준이가 광주 YWCA 신협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영철 형님도 그 시기에 YWCA 신협 상무로 일하셨다. 그 형님의 어머님은 영신원 초창기 간호사셨다. 우린 그분을 '이모'라 부르며 컸다."

- 말씀하신 김영철 열사도 5.18 항쟁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고문 당한 뒤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돌아가셨다. 김영철 열사와 어린 시절 함께 자란 건가?
"영철 형님은 그때 우리보다 한창 컸다. 우리와 나이 차이가 좀 있다. 영철 형님이 YWCA 심협에서 일할 때는 그가 결혼해 광천동 시민 아파트에 사셨다. 그 당시 용준이가 기거할 데가 없어 광주 YWCA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녔다. 그때 영철 형님이 용준이를 자신의 시민 아파트에서 데리고 들어가셨다."

- 박용준 열사와 김영철 열사는 들불야학 활동을 하셨다. 그래서 윤상원 열사랑 다 연결되던데 그 무렵 서 기사님도 거기를 드나들었나?
"가보지는 않았다. 용준이가 영철 형 집에서 산다는 얘기만 들었다. 나는 그때 이제 구두 닦고 있을 때다. 내가 이제 어렸을 때부터 책 보는 걸 좋아해서 책이 좀 있었다. 나한테 있던 그 책들을 용준이에게 다 줬다. 용준이가 그 책들을 들불야학에 기증한 걸로 돼 있을 거다."

- 그렇게 지내시다가 5. 18이 터졌다. 5월 17일 전남대생들의 횃불시위가 있었고 이튿날 18 계엄군이 들어왔다. 그때 활동을 말해 달라.
"5월 18일에 계엄군이 들어와 시민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날 저녁 용준이랑 나랑 같이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가서 수제비 끓여 먹으며 투사회보 프린트 작업을 하였다. 그때는 다른 사람은 없고 우리 둘만 있었다."

- 박용준 열사는 들불야학 회원이라 자연스럽게 5.18 항쟁에 참여를 했을 것 같다. 서 기사님은 어떻게 항쟁에 나서셨나? 박용준 열사가 도와달라고 하던가?
"도와주라고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친구니까 자연스레 같이 한 거다. 그렇게 만든 투사회보를 19일에 시내버스 타고 다니면서 뿌렸다. 그때는 버스 안내양이 있을 때인데 버스비도 안 받더라. '조심하라'고 하면서 차를 태워주고 그랬다. 그러다가 20일 날 도청 앞에서 집회를 하였다. 그때가 초파일이었고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다. 수습 대책위나 시민군도 없었을 때이고 자연스레 시민들만 참여하던 시기다.

이날 오후 1시부터 계엄군이 총을 쏘더라. 그 현장에 있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하다가 이 오후 1시부터 총 쏘았고 나도 그 현장이 있었다. 계엄군이 총을 쏘니까 다들 나 살기에 급급해서 흩어졌다. 그때 도망치다가 영준이랑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 군인들이 새벽 12시를 기점으로 도청에서 물러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자 옛날에 사회참여 했던 어른들이 수습대책위를 만들었다."

- 대책위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였나?
"우린 어른들 그룹(조아라, 홍남순 등) 사람들과 함께 활동한 건 아니다. 그 분들은 당시 군부나 관리들을 만나 수습 대책을 논의했다. 영철 형(김영철 열사), 상원 형(윤상원 열사)은 도청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YWCA에 있었다. 각 부서를 만들어 활동했다.

용준이와 나는 홍보부에 있었다. 용준이는 글씨를 잘 쓰니까 가리방에 긁어 계속 투사회보를 만들고 나는 애들 데리고 다니면서 투사회보에 쓸 종이를 구해왔다. 또 대자보 붙이고 마이크 같은 거 설치하고 그런 일을 했다. 22일 또는 23일에 YWCA에 시민항쟁 본부가 만들어졌고 홍보부 활동을 26일까지 하였다."

- 그 무렵 잠이나 제대로 주무셨나?
"잠도 잤다. 그 무렵 광주 YWCA 안집에 침대도 있고 그랬다. 조아라 장로님이 거기서 생활하셨으니 그게 있었던 거다. 조아라 장로님 사택이나 마찬가지였다. 싱크대 시설이랑 다 돼 있으니까 거기서 밥도 끓여 먹어 가며 투사회보 만드는 작업을 했다."

- 27일 새벽이 되자 계엄군들이 쳐들어 왔다. 그 전에 "계엄군이 오니까 빨리 다 나가라"며 시민군을 많이 내보냈다던데?
"어린 중학생 같은 애들이나 여자들은 대부분 귀가시켰다. 용돈까지 줘서 보내기도 하였다. 몇 명 남지 않은 상태이고 총기도 많이 반납해서 불안하니까 도청 영철 형님하고 상원 형님한테 가서 '우리도 총이라도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냐?'고 해서 총기를 받았다. 다 칼빈 소총이었다.

나야 예비군 훈련 받아봐서 총기 다룰 줄 알았지만, 많은 이가 총 쏠 줄도 몰랐다. 그 중에서 군사 교육 받은 사람에게 총 다루는 법을 배웠다. 총 다루는 법이라 해봐야 노리쇠 푸는 거랑 안전장치 정도 알려주는 게 전부였다."

- 이제 시민군들이 몇 안 남은 상태였다. YWCA에는 몇 명이나 남아 있었나?
"영철 형님과 상원 형님은 본부인 도청에 있고, 용준이와 나는 YWCA에 있었다. 용준이는 2층 본관 지키러 갔다. 본관 지키러 간 사람도 열댓 명 된다. 난 안집에 있었다. 안집에는 칼빈 소총이 두 자루 있었고 나와 병관, 동근식 그리고 전대 여학생 한 명이 더 있었는데 이름은 생각이 안 난다."

- 계엄군이 새벽에 침탈하였을 때 상황은 어땠나?
"어떻게 해서 YMCA가 뜷리냐면, YWCA와 담 하나 사이로 장산부인과라고 있었다. 그 뒤에는 한림학원이다. 나는 애들한테 총 다루는 법만 가르쳐 주고 장산부인과 담 쪽에서 총 한 자루로 지키게 했다. 그러면서 총 노리쇠를 잠가 놓고는 '죽고 사는 것은 우리 뜻대로 안 되니까 그 대신 먼저 절대 먼저 총 쏘지 마라. 조용히 해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총소리 나고 난리가 아니었다. 헬리콥터 소리 나고 일이 나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러자 보초 서던 애가 총을 쏘려고 하다 안 되니까 노리쇠를 힘껏 잡아 당겨 총이 고장 났다. 그래서 우리가 살았다. 만일 우리 쪽에서 총성이 났더라면 군인들이 대거 몰려왔을 거다. 근데 우리 쪽이 조용하니까 본관으로 가서 총을 사정없이 갈겼다."

- 그 다음에는 어떻게 피신하였나?
"총소리가 요란한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 외치는 소리가 나고 '전부 손 들고 나오라'며 번호를 맞춰 숫자 세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자 동근식과 여학생, 그리고 변관이는 그때 다른 집으로 넘어 갔고 내가 제일 마지막까지 있다가 장산부인과로 넘어갔다.

그렇게 몇 집을 넘어 다니며 겨우 몸을 피했다. 28일 아침이 되자 이제 해방 됐다며 상가 상인들이 다 와서 청소하고 그러더라. 나는 그곳 어느 식당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 주인들이 마음씨가 좋아서 밥도 챙겨주고 그러더라. 그렇게 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동창들이 살던 나주 남평 노동리까지 빠져 나가 거기서 추석 때까지 숨어 지냈다."

- 단짝 친구였던 박용준 열사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언제 들었나?
"텔레비전 보고 알았다. 엄마(영신원 원장 서경자)가 용준이 시체는 있는데 나는 없으니까 사방으로 찾으러 다녔다. 나중에 들은 얘기다. 잡혀간 줄 알고 군부대도 알아보고 그랬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사라진 내 소식을 전혀 몰랐다. 5-6월이면 농촌은 농번기라 바쁘다. 남평에서 공짜 밥은 먹지 않았고 농사를 돕다가 추석 때가 되어서야 망월동에 갔다."

- 친구 용준의 묘를 제일 먼저 찾아갔나? 그때 심경이 어땠나?
"말로 표현이 안 된다."

- 김영철 열사는 그때 감옥에 있었다.
"그땐 상원 형과 영철 형 소식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망월묘역에 갔다. 용준이 묘소에서 일신방직 다니는 전삼순이라는 아가씨를 만났다. 용준이랑 어떻게 아느냐고 묻길래 '내가 용준이 친구다'고 하니까 그 아가씨가 '노동자를 위한 교회를 시작하려고 한다면서 함께 하자'고 그러더라. 그래서 노동자를 위한 교회로 세운 게 기독교장로회 무등교회다."

- 올해로 5.18민중항쟁이 42주년을 맞았다. 그 사이에 518 특별법이 제정되고 5.18은 국가 기념일이 되었다. 국가 배상도 다 이루어졌고 5.18 관련자들도 이제 국가 유공자가 됐다. 그런데 서 기사님은 일부러 국가유공자 신청을 일부러 안하셨다던데 무슨 이유인가?
"어디 나타내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무슨 보상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 당시는 처자식이 있는 거도 아니었고 나 혼자 사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신청하지 않은 거다.

게다가 나는 자신이 뭐 했네, 뭐 했네 그러며 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 예전에는 기독교청년회(EYC), 광주전남청년연합회, 전국기독교청년연합회 활동 같은 거도 열심히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명함 내밀며 다니는 게 보기 싫어서 다 그만 뒀다. 기독교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나. 뭘 바라고 하거나 자신을 알아주라고 한 게 아니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뿐이다."

- 42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518에 관한 세상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옛날에는 '폭도들'이라고 했고 '빨갱이들' 이런 식으로 매도를 했다. 요즘에는 그것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북한군이 와서 했다"는 둥 악성 유언비어가 나돈다. 42년 동안 참석하지 않다가 올해에야 처음으로 5. 18 관련 행사에 직접 참석해 보셨다던데 지켜본 소감은 어떤가?
"북한군이 어떻고 폭도네 뭐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뭐냐면 그건 전두환 입장에서 한 얘기들이다. 자신들 관점에서 한 얘기고 사실이 아니니까 그러던가 말든가 대응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들 행위를 합리화시키려고 한 얘기에 불과하다.

5.18 단체들도 여기저기 막 찢어져 여러 단체가 있다. 자기들끼리 그것을 빙자해서 밥그릇을 챙기려고 하는 사람들 행위들이다."

- 실제로 5. 18 관련 여러 단체들이 있다. 지금 그 단체 가운데 혹시 가입이 돼 있는 단체가 있나?
"오월어머니회에는 한 2년 정도 후원금을 낸 적이 있다. 오월어머니회는 고생하는 줄 아니까. 근데 안성래 장로님이 그러시더라. '야, 네가 제일로 가난한데 네가 후원금 내면 어쩌냐? 부담스러우니까 내지 말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안 냈다. 그리고 가입한 단체는 하나도 없다."

- 해마다 5.18이 돌아오면 박용준 열사 묘소를 계속 찾아가는가?
"종종 간다. 택시 손님이 5. 18묘역 가조고 가고 그전에 5. 18 이후에는 자주 갔다. 귀신 만나러 가려면 저녁에 가야 한다고 해서 일부러 저녁에 버스 타고 거기서 내려 가곤하였다."

- 친구 용준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건가?
"용준이 뿐만이 아니라 그쪽에 식구들이 많이 있으니 그냥 자연스럽게 갔다. 용준이 말고도 함께 참여했던 시민들이 많지 않나. 시민군이건 누구건 5.18로 돌아가신 분들이 있으니 그들 귀신 만나러 갔다."

- 전에 한 번 제가 통화했을 때 5.18 행사를 한 번도 참석을 일부러 안 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왜인가?
"꼭 5. 18 기간에만 기억해야 되는 건 아니지 않나. 평상시에도 아무 때든 생각나면 찾아보면 되는 거다."

- 5.18에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표현을 좋게 하자면 위정자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광주 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거다. 그것이 아직도 용인되고 이용당하고 또 그들이 '빨갱이다, 북한군이다' 그러고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그런데 5.18 시위 일어나기 이전에 부마 사건이 먼저 있었다. 그러니까 다 같은 그 희생자들이다."

- 올해 5.18 때는 전두환과 노태우 같은 사람들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국힘당 쪽 사람들까지도 특히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국힘당 국회의원들이 다 가서 참배하였다. 그건 어찌 생각하나?
"진정성이 없는 쇼다. 그것이 뭣하고 똑같으냐면 때 되면 어디 고아원, 양로원 같은 곳에 라면 박스 몇 개 들고 가서 사진 찍는 요식 형위와 똑같다. 솔직히 그렇게 해야 하기에 마음에도 없이 하는 거고 겉 다르고 속 다른 그냥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진정성도 없고 반성도 없이 국민 속이려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 가장 가까이 지냈던 박용준 열사, 김영철 열사, 그 다음에 윤상원 열사 이런 분들 다 그 당시에 돌아가셨다. 5.18이면 그분들이 계속 떠오르고 살아남은 분으로써 무거운 책임감이 있으실 텐데?
"책임감이랄 것도 없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안타까운 건 용준이는 그나마 YWCA나 영신원, 무등육아원에서 사망보험금 받고 어쩌고 해서 장학회라도 만들어 갖고 후배들한테 지금 장학금 지급을 한다. 상원 형이나 영철 형도 들불야학이라는 데가 있어서 그들을 조명한다.

하지만 더 안타까우신 분들은 무명 열사들이다. 그들이 많다. 그분들도 주변에도 예를 들어서 교회라가 학생운동가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조명을 받을 텐데 그게 안 되고 있어 아쉽다. 박관현 열사, 윤한봉 열사, 이런 분들은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먹물계급이다. 그들은 조금만 활동해도 돌출되고 조명된다. 하지만 하층민들은 수많은 사람이 참여했는데도 별로 조명되지 않는다."

- 지금 5.18에 남은 과제가 그거라고 보는 건가?
"나는 5. 18은 그 당시 그걸로 인해서 핍박받고 억압받고 어려운 생활을 했던 모든 분들을 위한 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무개 열사니 뭐니 그렇게 할 일만은 아니다."

- 5.18 정신은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5.18 정신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다. 그냥 내 주변에서 맞고 쓰러지고 구타당하는 거 그냥 못 봐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힘을 합쳐 대응해야 했던 거다. 그렇게 같이 온 시민들이 서로 주먹 빵 만들어서 주고 그랬다. 예를 들어 술집 창녀 같은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사람들이 춥고 배고프고 억압받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다.

도청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애들이 먹물 출신(식자 계층)들이 아니다. 먹물 출신들은 때가 되니까 다 피신 갔다. 대학생들도 다 도망쳐버렸다. 솔직히 현재 5.18 관련 시민단체에서 명함 내미는 사람들 그때 당시에, 그날 저녁에 내가 봤던 사람들은 없다.

5. 18 정신은 내 이웃 아픔을 모르지 않고서 사는 거다. 그렇지 않나? 성서적으로 얘기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 범위에 포함된 것이고 불교에서 얘기하다면 '절에 가서 천 번 만 번 절하는 것보다도 네 옆에 있는 중생을 하게 하는 것이 낫다'라고 하는 거와 똑같은 거다.

내 이웃이 당하는 걸 보고 그냥 자연발생적으로 돕는 거다. 의무가 사명감이 아니다. 들불이 번지듯 자연스레 번진 거였고 그렇게 들고 일어났던 거다. 바닥 민중들이 대거 참여한 항쟁을 마치 일부 식자층이 다한 것처럼 그들 위주로 조명하는 건 이제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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