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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일으키면 다 품행장애일까요?

‘아이 한명을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인디언 속담.
신체를 성장시키는 것이 ‘육성’이라면 마음을 성장시키는 것은 ‘양육’
아이들의 ‘문제’보다 어른의 ‘낙인’이 더 문제

  • 입력 2022.08.26 11:50
  • 수정 2022.08.26 11:53
  • 기자명 주경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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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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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및 범죄를 저질러서 경찰서로부터 연계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매월 1회 3일에 걸친 선도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절도에서부터 추행, 사기, 공문서부정행사, 점유물이탈횡령, 감금, 특수절도 등 다양한 사유로 적게는 5명에서부터 많게는 10명까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잘 몰라서, 때로는 들키지 않을 것 같아서 저질렀던 행동으로 인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 중 태어날 때부터 범죄적 기질과 비행성향을 갖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다.

오히려 너무 착해서, 지능적인 문제로 판단능력이 떨어져서, 보호받지 못해서, 친구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고 하는 아이들이 더 많다.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규칙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말 뒤로 눈을 속이고, 타인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았고, 매스컴에서는 물질만능주의 금전만능주의를 외치며 아이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수학책 너머에서 도박 사이트를 드나들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저지른 비행과 범죄를 두둔하는건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청소년비행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몇 년 전 대중교통 안에서 어르신에게 하면 안 되는 행동으로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청소년이 있었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욕을 듣던 그 아이는 두 달 전 나와 만났었고 그때 비행보다는 오히려 순진했고 사랑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모습을 보였었기에 사건을 접하고 누구보다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그 아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런 아이들은 사회의 악이니 교도소에 넣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누군가는 나에게 "저런 아이 상담하느라 너무 무섭고 겁났겠어요"라고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폭력으로 세상을 경험했던 아이

▲ 출처:pixabay
▲ 출처:pixabay

두 살 때 아빠의 가정폭력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가고 난 뒤부터 아빠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집 나간 엄마 대신 아이를 때렸다.

아이는 살기 위해 이곳저곳에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그때뿐이었고, 살려달라는 아이의 외침이 커질수록 아버지의 폭력 또한 가혹해져갔다. 벌금이건 조사가 됐던 그 모든 과정 뒤에 아이는 다시 아빠에게로 돌아가야만 했다. 대한민국에서 그 아이가 돌아갈 곳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빠뿐이라는 잔인한 현실은 중학생이 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아이의 몸에는 행복하고 좋아서 웃었던 날들의 기억보다 더 많은 흉터가 여기저기 진하게 남아있었다.

초등학교때까지 아버지의 매질을 그냥 당하고만 있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맞지 않으려면 도망가야 한다는걸 알게 됐고, 집을 나온 뒤에는 당장에 끼니를 해결하고, 자신을 때리지 않고 받아준 친구와 형들과 어울리기 위해 비행에 빠져들었다.

자전거를 훔쳐서 팔려다 걸린 아이에게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고 전화를 했을 때 아이는

“안 갈 건데요? 못 가는데요?”라는 말로 자신이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피력했다.

이런 아이들을 다루는 게 상담사의 특기라면 웃길 수도 있지만, 어떻게든 반응을 보인다는 건 저항이면서 긍정적인 사인이었다. 밖으로 뿜어내는 에너지가 있는 아이들은 그 에너지의 방향을 1도만 바꿔줘도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다만 폭력에 장기간 노출되었거나, 부정적 정서가 강한 아이들을 대할 때는 몇 가지 규칙이 필요하다.

- 혼을 내면 안 된다.

- 가르치려 하면 안 된다.

- 비난이나 평가하면 안 된다.

- ‘니가 문제다’라는 낙인을 찍으면 안 된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신뢰는 물론이고, 존재의 이유조차 아버지의 폭력으로 스러져버린 이 아이에게는 이미 폭력과 비난, 평가와 협박은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다. 칭찬은 들어본 적도 없고, 사랑은 받아본 적도 없다. 아버지와 비슷한 방식을 사용하는 어른을 보면 아이는 감동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세상도, 나도, 어른도 다 별로다.’ 라고 확신해 버린다.

한 번도 행복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우울을 느끼지 못한다. 처음부터 우울한 사람은 우울한 기분 외에는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살아가게 되는 것과 같다. 부정적인 정서가 기본인 아이들을 부정적인 단어로 대하는 것은 언제든 울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의 뺨을 때린 격이다.

▲ 출처:pixabay
▲ 출처:pixabay

“하늘아(가명). 선생님이 너 오면 주려고 간식도 준비해놨어. 니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편의점 가서 이것저것 사왔는데 한번 구경 오지 않을래?”

이게 먹힐까 싶지만 사실 먹힌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지만, 이미 세상과 사람에게 너무 많이 맞은 아이를 누구 하나는 기다려주고, 다독여줘야 하지 않을까.

“아씨. 지금 시내라서 못 가는데..?”

“시내구나..어디? 선생님이 데리러 갈까?”

“아 됐어요. 창피하게, 그냥 제가 갈께요.”

“그럴래? 혹시 뭐 타고 올 거야? 택시 타고 오면 쌤이 택시비 들고 나가서 기다려줄게”

“됐어요. 언제 봤다고 택시비를 내줘요. 나도 그 정도는 있어요.”

기특하게도 아이는 혼자 오지 않았다. 같이 사고를 치고, 같이 교육을 받아야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던 아이들까지 전부 데리고 왔다.

“맛있는거 사놨다더니 드럽게 맛도 없는 것만 사놨네...”

그러면서 입은 웃는다.

“이거 다 니 꺼야. 어때?”

1시간은 커녕 10분도 남의 말 듣기 싫어하고, 그래서 학교도 나가지 않고 사고를 쳤던 아이가 지각없이, 사고 없이 3일간 진행된 프로그램과 개인 상담을 이수하던 날

“하늘아! 배고프면 쌤한테 전화해, 알겠지? 훔치면 안 돼!”

“이제 그런거 안 해요. 나 완전 착해졌어요.”

그 아이가 두 달 만에 뉴스의 머리기사를 장식했을 때 드는 생각은 ‘사고 안친다더니 역시 속았어..’가 아니었다.

누가 또 이 아이에게 과자를 사 줬을까?

▲ 출처:pixabay
▲ 출처:pixabay

과자 몇 개에 친구들까지 다 데리고 왔던 아이가, 칭찬 몇 마디에 금세 “선생님 제가 또 뭐 도와드릴까요?“했던, 사랑과 관심에 목말랐던 그 아이를 누가 또 거짓 칭찬과 관심으로 꼬드겼을까?

사람들은 그 아이를 품행장애라고 불렀고 온갖 뉴스와 미디어에서는 앞 다퉈 품행장애를 대서특필하면서 전문가까지 초빙해 의견을 묻곤 했다.

‘요즘 아이들은 예의가 없고, 어른을 몰라보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며, 이런 아이들이 커서 사회의 악이 된다. 그러니 애초에 싹을 잘라야 한다.‘고 했다.

그 아이의 행동은 품행장애가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품행이 뭔지. 예의며 배려가 어떤 건지를 경험해 본적 없고, 기회조차 얻지 못 한채 살아왔다..

그 아이를 이대로 두면 어른들이 염려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가 그저 힘이 없고 작은 아이였을 때, 그 작은 몸으로 아빠의 모진 매를 감당하고 있을 때, 그 아이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품행장애를 갖고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는 없다.

기질적으로 자극추구가 높게 태어날 수는 있지만 정서와 사회성뿐 아니라 성격까지도 환경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아이 때 충분히 돌봄 받지 못하고, 적절한 정서자극도 없이 방치되고, 아무리 울어도 돌아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살아왔다. 세상을 살면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해서 아이 때의 욕구와 표현방식을 그대로 어른까지 가져오는 것...그것을 우린 ‘정신병’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결국 품행장애는 어른과 세상이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경계선 성격장애, 반사회적성격장애, 자기애성 성격장애, 연극성성격장애, 의존성성격장애, 강박성 성격장애 등...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갖고 태어나기보다는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을 위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더 이상 문제가 문제로 끝나지 않도록 근본원인을 찾아서 뿌리를 뽑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어리고 힘이 없는 상대를 향한 간섭과 잔소리를 사랑으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직도 부모니까 ‘그래도 된다.’는 착각으로 손찌검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저 부모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용돈을 줄이고 핸드폰을 뺐고, 집을 나가라고 협박을 하고, 커서 뭐 되려고 그러느냐고 미래 지향적 비난을 하고,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고 존재를 부정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그렇다면 내 안의 어떤 것들이 내 아이조차 온전히 품지 못하게 하는지 그리고 내가 아이에게 퍼붓는 비난으로 내가 뭘 얻는지 봐야한다.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남들이 안 해주는 말을 부모니까 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부모가 말을 하는지, 뱉는지, 토하는지, 던지는지는 자녀 입장에서 살펴야하고, 그 말이 부모 자신을 위한 말인지. 자녀가 원하는 말인지 그리고 누구에게 전달하기 위한 말인지를 보고, 비난이나 평가인지 염려인지를 보았으면 한다.

아이들의 품행은 결국 부모를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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