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가 귀환해 불법 수사와 처벌을 받은 건설호, 풍성호 선원 9명에 대해 최근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해 피고인들이 무죄를 선고받아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일명 건설호와 풍성호 선원들은 1968년 11월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가 이듬해에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선원 모두가 간첩으로 몰려 반공법 위반 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검찰은 지난 3월에도 창동호 귀환어부 1명에 대해 직권으로 재심을 신청했고, 법원은 8월에 무죄를 선고했다. 보수정권에서 인권 탄압과 천대받던 납북어부들에게 과거와 달라진 이례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달라진 윤석열 정부의 납북귀환 어부 해법
검찰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윤석열 정부들어 평생을 간첩으로 몰린 납북 관련 소송은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 요즘 검찰이 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을 추적에 나섰다는 재심 행보는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민생 행보다. 이목이 쏠린다. 평생을 억눌려 살았던 납북어부들에게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다. 법조계에선 한동훈 장관의 입심이 작용한게 아니냐는 후문이 무성하다.
여수 화정면 적금리에 사는 신평옥(83) 씨는 50년 전 조업중 납북된 뒤 귀환해 간첩죄로 처벌받았다. 1971년 5월 15일, 전북 군산항을 떠난 유자망 어선 동림호 선장으로 조기조업을 벌이다 북한 경비정에 납치된다. 대법원은 “자의로 들어간 이상 북괴집단의 구성원과 회합이 있을 것이라는 미필적 예측이라도 하였다고 인정함이 타당하다”며 간첩죄 등을 무죄로 판단한 하급심을 유죄 취지로 파기해 징역 1년 6월이 확정됐다.
납북어부 재심을 돕고 있는 변상철 성공회대 민주 자료관 연구원은 <오마이뉴스>에 <납북귀환어부 이야기>를 연재해 다양한 납북어부 사건을 다루고 있다. 변상철 연구원은 ”현재 우리나라에 납북귀환 어부는 납북지점 기준 동해안에서 1500여명, 서해에서 2500여명으로 총4000여건으로 한동훈 장관 시절 법무부가 납북귀한 어부 사건을 풀려는 적극적인 행보는 매우 환영할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오는 12일 전라남도의회 주종섭 의원과 여수시의회 이찬기, 김채경 의원이 주최하고 <여수MBC>와 <여수넷통뉴스>가 후원하는 '전남지역 납북귀환어부 실태와 지원 방안 정책토론회'와 기자회견을 앞두고 있다. 이번 토론회는 납북귀환어부 피해자 증언을 통해 간첩사건 등으로 고통을 겪었던 국가폭력피해자와 유족의 명예회복과 지원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다.
필자는 2017년 <여수넷통뉴스> 출판사인 미디어넷통에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납북어부의 아들>을 펴낸 바 있다. 20여년전 작고하신 아버지는 아직도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수산업법 위반으로 빨간줄 멍에가 덧씌워져 있다. 당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탁성호 사건의 일부다.
나의 아버지는 '납북어부'다. 정확히 말하면 오징어잡이를 나갔다가 북한 경비정에 '납치'당했다. 아버지가 납치된 것은 1971년 8월 30일 오후다. 아버지가 탄 탁성호'는 30명의 선원과 함께 오징어잡이에 나섰다. ‘탁성호 사건’은 당시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30일 <동아일보>는 '동해 분계선 우리함 북괴정과 대치', 31일 <경향신문> '동해 표류 중 북괴무장선에 30명 탄 오징어 배 납북', <매일경제> '오징어잡이 배 납북', <동아일보> '탁성호 끝내 납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며 여론을 달궜다.
그후 아버지와 9월 7일 납북된 어선 7척과 납북어부 160명은 1년 만에 속초항에 송환되어 강도 높은 조사와 함께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아버지의 일상은 '감시'의 연속이었다. 섬에서 납북자라는 꼬리표를 단 아버지와 주민들을 경찰은 매일같이 3급 비밀문서로 동향을 파악한 사실이 확인됐다.
초동수사와 다른 이념 덧씌운 탁성호 선원 판결문
눈여겨 볼점은 아버지가 탔던 탁성호 사건은 다른 사건과는 확연히 다른 사건이다. 필자는 지난 10월 아버지의 억울한 사건을 풀기 위해 국가기록원에 탁성호 사건 조서와 판결문, 수용자신분장, 피해자 신문조서(수사기록)를 요청했다. 이후 받은 수사기록을 살펴보니 강릉경찰서 공문에서 탁성호는 적색과 백색기를 단 200톤급 함정에게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며 교신하는 내용을 확보했다.
당시 탁성호는 끌려가며 무전을 친 SOS 내용(아침 8시 41분~ 오후 14시 17분)은 6시간동안 시간대별로 기록된 사실을 확인했다. 필자가 2017년 쓴 <납부어부의 아들>에 동아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가 시간대별로 나눈 무전 상황이 뒤늦게 확인된 셈이다. 한마디로 탁성호가 납치당해 구조를 요청했으나 우리 군이 지켜주지 못한 명백한 증거자료였다.
교신 내용에는 '1971년 8월 30일 오전 8시 41분에 발생한 이 사건은 북한 경비정이 배를 끌고 가니 도와달라', 2시간 후엔 북한 경비정이 발포 위협을 하며 항해를 지시하고 있다며 해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우리 해군 함정인 갈매기호와 거북선호가 출동해 대치했으나 오후 2시 40분쯤, 탁성호는 북한군 예인선에 끌려가 그대로 교신이 끊긴 기록이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사건인가? 진실은 이러한데 납북되었다고 평생을 감시한 국가기관이 과연 제정신인가 묻고 싶다.
당시 탁성호를 탄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석봉 씨는 “이까(오징어) 줄 준비하고 출항해 이까를 많이 잡아서 항구로 귀항하는데 갑자기 깨워서 일어나보니 북한 인공기가 보였다”면서 “그때 우리 배가 밧줄에 묶여 끌려가는데 이제 죽었다 생각했다”라며 자신의 증언을 들려줬다.
- 북한에 1년 동안 납치되어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남은 게 뭐 있습니까. 다 잊어버리지. 백두산은 두 번 올라가 봤어요."
- 납치 당한지 몇 년이나 됐나요?
“그때가 71년이니까 약 50년이 넘었네요.”
- 왜 오징어잡이를 탔어요?
"처자식 먹여 살린다고 놀고 있으니까 그냥 돈 벌러 갔지요."
- 고문도 당하셨어요?
"속초에서 고문당해 많이 맞아 한쪽 귀가 안 들려요. 근데 암만 맞아 아파도 없는 것은 없다 해야지. 고문당한 것도 당한 거지만 나중에 돈을 벌어야 하는데 배 선장이라고 다 잘 잡는 거 아니잖아요? 잘 잡는 배 타려면 거기에 지장이 많았어요."
- 어떤 지장이 있었어요?
"저 사람은 이북 갔다 왔다고 경찰서에서 나와 선주 찾아가서 말하지, 선장 찾아가서 말하지 이 사람 태우지 마라. 그렇게 압박해 지장이 많았어요. 저 같은 납북자를 배에 태우면 그 배가 찍혀 불법단속 등 입출항 때 불이익을 많이 줬어요."
-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어떤 거예요?
"딴 건 없고 이 일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구순이 다 돼가도 내 집이 없어요. 그러니까 명예회복도 하고 합당한 피해 보상도 받고 싶어요. 송환돼서 속초에서 많이 맞았어요. 그때 안기부에서 나왔어요. 조사관들이 주로 '왜 납북을 했냐? 북한에서 무슨 지령 받았냐'고 우기는 거예요."
하지만 법원은 ”탁성호 선원들이 자의적으로 북한으로 탈출했다“라고 판단해 북한에서 귀환한 안도 동고지마을 선원들은 모두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수산업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아버지의 사건기록 조서내용과 판결문을 봤더니 초동조사때 수사기록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송환된 어선에서 선원들의 압수물품 목록을 보면 신사복, 와이셔츠, 양말, 돼지고기, 간장 등을 가지고도 판결문에는 북괴제 신사복, 북괴제 와이셔츠, 북괴제 양말, 북괴제 돼지고기, 북괴재 간장 응 온통 섬짓한 내용으로 덧씌웠다.
구해달라는 6시간 교신에도... 간첩마을 낙인찍어
여수MBC 강서영 기자가 보도한 탁성호사건 영상 ⓒ 여수MBC 강서영 제공
발포 위협 속에서 북한 경비정의 강제 항해 지시를 받으며 6시간 동안 이어진 탁성호의 절실한 구조 요청은 무시되었음에도 간첩으로 낙인찍혀 수십년을 고통받아온 여수 동고지마을 5명의 선원과 유족들은 뒤늦게 진실 규명을 위한 재심 신청을 준비중이다.
지난 10월 <여수MBC> 강서영 기자가 보도한 탁성호 사건(구해달라'는 6시간 교신에도..'간첩 마을'의 한 맺힌 사연)의 유죄 선고는 다섯명의 선원뿐만 아니라 동고지마을 주민 모두를 옭아맸다. 이날 부산, 양산, 여수 등에서 모인 생존자 김석봉씨와 피해자 아내 지양님씨 등 5명의 유가족을 만났다. 유가족들은 아버지가 저마다 빨갱이로 낙인찍혀 감시당했던 사연들을 털어놨다.
우리 아버지가 1993년부터 30년간 배를 운영하면서 계속 불이익을 받았어요. 바다에서는 작업하다 선원이 없어지면 아버지가 그 사람을 북한으로 보내지 않았나 의심 받았어요. 경찰은 배를 산 자금이 북한 공작금이 아니냐며 자금을 추적하고 그런 기억이 선합니다. 아버지가 블랙리스트 1순위였던 게 가장 마음 아프고, 항상 감시당한 기분이 들어 너무 무서웠어요 (도암씨의 딸 54세 김정난 씨)
저희 작은아버지가 밤에 주무시다 없어져 물에 빠져 돌아가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가 탐문 우선순위였어요. 북한으로 보내지 않았나?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가족과 친척들이 경찰서 끌려가서 많은 고문을 당했어요. 결국 우리 집에서 굿을 하고 바닷속에 잠수부를 투입해 찾아서 모든 것이 해결됐지, 안 그랬으면 간첩으로 몰릴 뻔했습니다 (서미남의 아들 57세 서명철 씨)
어릴 때 보면 우리 집에 한 달에 한 번씩 형사들이 집에 찾아왔거든요. 아버지는 배 타러 바다에 가고 없는데도 우리 집 안방까지도 들어와 인권침해를 많이 당했어요. 저는 취직때 피해를 당했어요. 부산 국가정보보존소에 취직했는데 취직하고 한 달 만에 저를 잘랐어요. 아버지가 이북에 갔다 왔다는 게 이유였어요 (김석봉의 아들 53세 김진성 씨)
저희 아버님은 얼마나 고초가 컸으면 북한에 관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어요. 어머니만 가끔 가다가 얘기했는데 아버지는 아예 말조차도 안 꺼내고 그런 걸로 봐서는 엄청나게 아픔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피부병, 허리, 신경통으로 고생을 진짜 많이 하고 돌아가셨어요. 고문의 후유증인 것 같아요 (심일수의 아들 57세 심태형 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