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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싶은 섬' 선정된 횡간도에 이런 아픈 사연이...

[이야포미군폭격사건특위] 횡간도 찾아 두룩여 사건 현장간담회 개최
조기잡이 나선 150여척 집중폭격 당한 두룩여 미군폭격사건...1기 진화위 7명 진실규명
횡간도 피해 유족 강건식, 화태도 유족 박상업씨의 생생한 증언

  • 입력 2023.03.13 00:24
  • 수정 2023.03.13 12:23
  • 기자명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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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간도 모습. 멸치로 유명한 섬 일명 빗간이라 불리는 횡간도는 나무가 없어 횡~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심명남
▲ 횡간도 모습. 멸치로 유명한 섬 일명 빗간이라 불리는 횡간도는 나무가 없어 횡~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심명남

지난 10일 횡간도를 찾았다. 일명 빗간이라 불리는 횡간도는 나무가 없어 횡~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횡간도는 현재 54호가 거주하고 있다. 큰섬 대횡간도 50가구와 작은섬 소횡간도에 4가구가 산다. 그런데 80%가 평균 70대 노인들이다. 53세가 가장 젊은 층에 속한다. 이곳은 한때 섬 주민들의 70~80%가 낭장막 어장에 종사해 멸치로 유명했다. 동네 강아지도 배추잎을 물고 다닐 정도로 부촌이었다는데 지금은 어장을 감척해 4가구가 낭장막 어장을 잇고 있다.

73년 아픔 딛고, 가고 싶은 섬 된 횡간도

▲ 작년 가고싶은 섬으로 선정된 행복의 섬 횡간도 ⓒ심명남
▲ 작년 가고싶은 섬으로 선정된 행복의 섬 횡간도 ⓒ심명남

작년 가고 싶은 섬에 선정되면서 섬에 활기를 찾고 있다. 이에 대해 횡간도 이장 서한선(72세)씨는 “가고 싶은 섬에 선정되면서 지금은 외지에서 땅과 빈집을 사려고 하는데 외지에 나가있는 얘들이 못 팔게 한다”면서 “섬은 작지만 예전부터 멸치섬으로 많이 알려졌듯이 아직도 인심이 메마르지 않는 섬”이라고 자랑했다.

이날 여수시의회와 <여수넷통뉴스>가 함께 이야포-두룩여 미군폭격사건 찾아가는 현장간담회를 가졌다. 두룩여 미군폭격사건은 1950년 8월 9일 두룩여(문여) 주변에서 조기잡이하던 어선 150여척을 미군폭격기가 기총사격을 가해 돌산도, 횡간도, 화태도, 금오도, 개도, 제리도 등 여러 섬에서 조기낚시를 하던 어부 2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1기 진화위에서 7명이 진실규명을 받았지만 아무런 보상이 없다. 횡간도 주민은 당시 두룩여 사건으로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관통상을 당해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일부 유가족은 아직도 횡간도를 지키고 산다. 

횡간도에 가려면 돌산 군내리에서 도선을 타는데 하루 4번 섬을 오간다. 이날 첫 배를 타고 섬에 도착했다. 마을회관에서 주민 10여명을 만나 횡간도 주민들의 한맺힌 이야기를 청취했다.

▲ 여수시의회 이야포미군폭격사건 특별위원회 박성미 위원장은 "조금 늦었지만 이 자리를 통해 나라가 해야할 일과 우리가 해야 할일이 뭔지를 파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꼼꼼하게 챙기겠다"고 말했다 ⓒ심명남
▲ 여수시의회 이야포미군폭격사건 특별위원회 박성미 위원장은 "조금 늦었지만 이 자리를 통해 나라가 해야할 일과 우리가 해야 할일이 뭔지를 파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꼼꼼하게 챙기겠다"고 말했다 ⓒ심명남

여수시의회 이야포미군폭격사건 특별위원회(이하 이야포 특위) 박성미 위원장은 “2기 특위가 시작된 이후 늦은 감이 있지만 바쁘신 가운데 참여해 주신 어르신들께 감사드린다”면서 “조금 늦었지만 이 자리를 통해 나라가 해야할 일과 우리가 해야할 일이 뭔지를 파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꼼꼼하게 챙기겠다”라고 운을 뗐다.

오늘은 굉장히 뜻깊은 날입니다. 생생하게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야기를 했던 어르신도 나이가 들었고 언제까지 진실규명을 못한 상태에서 생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희도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통해 그분들의 아픔을 감싸 안고 그동안 말하지 못한 것을 들어주고 아픔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날이라 생각합니다.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은 2기 진화위에서 유해발굴에 대한 기쁜 소식이 들어왔기에 두룩여 사건의 아픔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73주년을 앞두고 추진위원님들과 함께 4월에는 안도에서 학술대회겸 간담회를 통해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당시 두룩여 해상에서 조기잡이에 나선 강영현(당시 나이 39세)씨가 탄 배에는 강수만(다리 관통), 강해조, 강동준, 박중완(어깨 관통) 5명이 타고 있었다. 미군폭격으로 강영현씨는 총을 맞아 창자가 튀어나와 배가 피로 얼룩져 즉사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어깨와 다리를 관통해 고통스런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다.

두룩여 해상 150여척 기총사격 받아 '아비규환'

큰아버지의 폭격 사건을 증언한 횡간도 주민 5촌조카 강행우(88세)씨는 14살에 겪었던 이야기를 생생히 들려줬다.

당시 두룩여 주변에는 150여척의 조기잡이 배가 바다에 널렸는데 호주기가 10시경에 1차 삐라를 뿌렸어요. 이후 오후 2~3시경에 갑자기 비행기가 날아와 집중사격을 했는데 사람만 보이면 사격을 했어요. 폭격받은 배는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어요. 마을 사람들이 당산으로 피난가서 더위를 식혔는데 그날 폭격받은 밭을 갈아보니 폭탄과 총알이 땅 속에서 나왔어요.

▲ 두룩여 미군폭격사건으로 12살에 아버지를 잃은 횡간도 주민 강건식(86세)씨의 모습 ⓒ심명남
▲ 두룩여 미군폭격사건으로 12살에 아버지를 잃은 횡간도 주민 강건식(86세)씨의 모습 ⓒ심명남

횡간도 주민인 강영현씨의 아들 강건식(86세)씨는 12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뒤  14살 때부터 배를 타서 고생이 말도 못했다“면서 ”우리 아버지는 농악 상쇠를 치시던 재주꾼이었다”라며 잊혀진 기억을 소환했다.

바라는 점을 묻자 ”어머니가 42살에 과부가 되어 홀로 자녀들을 키우고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다“면서 ”한평생 부모 잃은 설움은 잊고 살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명예회복과 배보상이라도 이뤄졌으면 좋겠다“라고 말끝을 흐렸다.

화태에서 횡간도로 시집온 박상업(92세)씨는 ”화태에서는 다섯분이 돌아가셨는데 오빠는 비행기가 때려 시체도 못 찾았는데 7일만에 바다에서 오빠가 떠올랐다“면서 ”조기잡이 나간 오빠는 당시 팔에 낫으로 찍힌 흉터가 있어 오빠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라고 증언했다.

▲ 화태에서 횡간도로 시집온 박상업(92세)씨는 두룩여 미군폭격사건으로 20살에 오빠를 잃었다 ⓒ정신출
▲ 화태에서 횡간도로 시집온 박상업(92세)씨는 두룩여 미군폭격사건으로 20살에 오빠를 잃었다 ⓒ정신출

그러면서 “왜 맨날 간혹가다 이렇게 오빠를 들먹이냐? 한해 언제도 조사를 와서 죽은데가 어디냐고 해서 죽은 데를 갤차주고(가르쳐 주고) 변호사 산다고 70만원을 주었는데 맨날 오라하드만 흐지부지됐다”라며 불신을 털어놨다. 이 말을 듣고 일행은 고개가 숙연해졌다. 

일행들은 희생자가 묻힌 묘지를 찾아 헌화하려고 둘레길을 따라 묘지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산이 우거져 벌초가 어려워지자 몇년 전 자식들이 할아버지 묘를 봉두 공동묘지로 이장했단다. 그래서 일행은 두룩여가 보이는 바닷가를 찾아가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헌화했다. 주민들은 두룩여 희생자를 찾아 헌화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찾아가는 현장간담회로 특위활동 시동

▲ 여수시의회와 여수넷통뉴스가 함께 이야포-두룩여 미군폭격사건 찾아가는 현장간담회를 가졌다 ⓒ심명남
▲ 여수시의회와 여수넷통뉴스가 함께 이야포-두룩여 미군폭격사건 찾아가는 현장간담회를 가졌다 ⓒ심명남

현장 간담회에 참여한 여수시의회 이미경 의원은 “시골에 오니 옛 어르신들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다"면서 "조그마한 마을에 이런 아픈 과거가 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다"라며 "이런 좋은 섬에 평생 가슴앓이를 해오신 어르신들을 보듬고 치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특위활동을 다짐하는 날이었다”라고 말했다.

진명숙 의원은 “8기 이야포특위위원으로 들어왔지만 저는 이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다가 오늘 어르신 말씀하실 때마다 가슴으로 너무 많이 울었다”면서 “73년동안 가슴에 안고 살아오신 한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풀어드렸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왜 자꾸 아픈 과거를 들춰내느냐 했듯이 이제는 왜 죽었는지를 풀어주고 보상은 아니더라도 마음의 보상이라고 우리들이 꼭 해드렸으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김채경 의원은 “두룩여 미군폭격사건으로 횡간도에서 세분이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일주일 동안 시신을 못찾아 바다에 뜬 시신을 찾아 묘를 썼다는 말씀을 듣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면서 “열두살 때 아버지를 잃고 2남 3녀가 아버지 없는 그늘에서 힘들게 자라 가슴에 한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이분들이 두룩여 사건에 대해 무뎌졌다. 우리가 이야포와 함께 진상규명을 하고 무뎌져버린 아픈 가슴을 조금이라고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라고 다짐했다.

정신출 의원은 “근래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서 “이야포와 두룩여 사건도 마찬가지로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일은 국가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성숙된 국가의 역할이고,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라 생각한다”라며 “이 문제도 국가가 분명히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이야포미군특위가 좋은 성과를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 이야포 특위 위원들이 두룩여가 보이는 바닷가를 찾아가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헌화하고 있다. 두룩여 희생자를 찾아 헌화하기는 처음이다 ⓒ여수시의회 제공
▲ 이야포 특위 위원들이 두룩여가 보이는 바닷가를 찾아가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헌화하고 있다. 두룩여 희생자를 찾아 헌화하기는 처음이다 ⓒ여수시의회 제공

뭍이 아닌 섬에 사는 어르신들은 외로움이 더 크다. 국가폭력에 그동안 말 못하고 살아온 유가족들은 때로는 바람이 할퀴고, 때로는 높은 파도에 갇혀 평생을 살아온 탓에 박성미 의원이 들려준 말은 공감이 컸다.

어르신들은 돈없는 빈곤이 아닌 마음의 빈곤이 더 무섭다고 합니다.

섬에서 나오려고 도선을 기다리는데 횡간도 전한주(85세) 어르신이 들려주는 노래가락에 일행들은 내내 무거웠던 마음을 훌훌 털어버렸다. 우릴 반기는 횡간도 주민들의 반가운 얼굴과 일명 금강산 카수로 불리는 어르신의 노랫가락에 모두들 배꼽을 잡으며 일행들이 더 위로 받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배를 타니 횡간도는 그렇게 점점 멀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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