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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포·두룩여 특집] 피난선은 재가 되어 이야포 바다에

②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라는 소문... 정부는 왜 피난민들을 태운 배를 빨갱이에게 맡겼나

  • 입력 2023.08.21 06:35
  • 수정 2023.08.21 07:22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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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군폭격 사건이 발생한 남면 안도 이야포 포구(여수넷통뉴스 자료사진
 ▲ 미군폭격 사건이 발생한 남면 안도 이야포 포구(여수넷통뉴스 자료사진

피만 흘렀다. 더운 여름날 썩은 피만 흘렀다. 쇠파리들이 미군기 기관포에 맞아 죽은 피난민 시신들에 달라붙어 피를 쪽쪽 빨고 있었다.

1950년 8월 3일부터 이8월 9일 두룩여 조기잡이 어선 학살이 까지 안도 이야포 피난선에는 쇠파리 때만 들끓고 있었다. 정적, 경찰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고 이야포 주민들도 문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안도 이야포 곶머리 초소에서 피난선 검문을 한다며 정박 시킨 경찰은 왜 피난선에 올라와 검문을 하지 않았을까. 그 해질녘 무렵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왜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을까.

나타난 것은 미군 전폭기 F-80 슈팅스타기 4대였다. 연도를 넘어 이야포로 곧장 날아왔다. 조종사는 피난선을 육안으로 확인한 후 무자비하게 기총을 발사해서 피난민 150여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미군기가 돌아가고 시신들이 바다에 떠다니며 총상 당한 부상자들이 호박잎을 바르고 있는 동안에도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라는 소문만 나돌고 있었다. 선장이 빨갱이라면 정부는 왜 피난민들을 태운 배를 맡겼을까.

경찰이 이야포에 나타난 것은 1950년 8월 9일 미군기들이 두룩여 해상에서 조기잡이를 하던 어선들을 폭격한 날이었다.

여수반도 끝 섬 연도까지 후퇴해서 진을 치고 있던 영암경찰이었다. 발동기를 단 배를 타고 나타났다. 피난선에서 살아남은 선장과 기관장을 태우고 이야포 해상에 나타났다. 경찰은 떠오른 피난민 시신들을 피난선에 집어 던질 것을 선장과 기관장한테 시켰다. 그리고 피난선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시신과 함께 불이 붙은 피난선은 활활 타올랐다. 불새처럼 타올랐다. 삼일 동안 타 올랐다. 피난선은 재가 되어 이야포 바다에 가라앉았다.

경찰은 살아남은 이백 여 피난민들을 안도 서고지에서 작은 배 여러 척에 나눠 싣고 연도로 옮겼다. 1950년 8월9일 미군기에 의한 두룩여 학살이 일어난 날 어스름 시간이었다. 연도에는 인민군에 쫓겨 후퇴해 온 영암경찰과 나주경찰 등 이백 여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연도는 여수반도 끝 섬이다. 더 이상 후퇴할 수 마지막 섬이다. 만약에 인민군들이 연도에 경찰병력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경찰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다. 그래서 안도에 전초 초소를 세우고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경찰들이 지나가는 피난선을 검문한다며 이야포에 정박시킨 것이다. 

▲ 안도 주민 목격자 이사연 어른신이 당시 경찰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안도 주민 목격자 이사연 어른신이 당시 경찰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안도 인근 섬 주민들 중 미군정찰기를 본 사람은 없다. 그럼 어떻게 미군 폭격기 편대가 곧바로 이야포로 날아와서 피난선에 폭격을 가한 것일까? 누가 미군폭격기를 불러들인 것일까? 당시 오키나와 미 제 5공군 기지에 있는 전폭기에 폭격요청을 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모스키토라는 프로펠러 정찰기가 날아다니면서 미공군 전술통제소에 목표물 좌표를 불러 주는 것과 다른 한 가지는 지상군이 좌표를 불러 주는 것이다. 당시 안도에는 미군이 없었다. 지상군이라곤 한국경찰병력 밖에 없었다.

이야포에 정박해 있는 피난선에 누가 폭격요청을 했을까. 혹자는 미군 전폭기가 돌아다니다 피난선을 발견하고 오폭했다고 하지만 가능성은 아주 낮다. 왜냐면 폭격기 F-80이 오키나와 기지에서 발진하여 한반도에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일십 분밖에 되지 않는다. 정찰기나 지상군이 좌표를 불러주지 않는 이상 목표물을 찾아 날아다닐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이야포에 피난선이 정박한 것도 오후 어스름 때이고 폭격을 맞은 시간은 다음날 아침 아홉시 경이다. 해질녘과 새벽, 그 사이 정찰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대체 누가 미군폭격기를 불렀을까?

그래서 이 사건이 전쟁범죄뿐만 아니라 국가범죄까지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 의심하는 까닭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 한미당국은 대전에서 피난선 대책을 수립했다. 피난민 소개명령은 미8군이 하고 피난민 검문은 한국경찰이 맡았다. 그래서 한국경찰이 피난선을 검문한다고 이야포에 정박명령을 내린 것이다. 또 한국경찰에게는 피난민 중에 불순분자가 숨어 있을 경우 자치적으로 처리할 권한이 부여됐다.

내 의심을 자꾸 불러일으키는 것은 또 있다. 두룩여 학살이 일어난 8월9일 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영암경찰은 9일 해가 넘어갈 쯤 살아남은 피난민 생존자들을 연도까지 이송시켰다. 연도에는 영암경찰 200여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경찰은 피난민들을 해군 함정을 불러와 거제도로 이송시켰다. 이렇게 조직적 힘을 가진 것은 당시 무전기를 지닌 한국경찰밖에 없다. 이것이 불합리적인 의심일까?

▲  모스키토라는 미군정찰기는 안도 상공을 날지 않았다.
▲ 모스키토라는 미군정찰기는 안도 상공을 날지 않았다.

여하튼 이야포. 두룩여 미군폭격기 학살 여수 MBC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청 (NARA)에서 임무 보고서를 찾아 온 덕분에 전쟁범죄가 사실로 분명히 드러났다. 나는 여기에 더해 국가범죄가 연루되어 있지 않나 계속 의심한다. 만약에 국가범죄에 의해 전쟁범죄가 일어났다면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피난민 학살 대표사건이 노근리와 또 다른 성질을 가진다. 그래서 미군기에 의한 이야포· 두룩여 사건이 중요한 것이다.

명백히 드러난 미군의 전쟁범죄와 국가범죄 의심이 풀리지 않는 피난선 잔해로 추정되는 엔진이 지금 이야포 수면 아래에 인양을 기다리고 있다. 여수해양인명구조단이 천신만고 끝에 발견 한 이후 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있다. 여수시는 올 11월까지 연관성 타당조사를 하여 관련성이 있다면 인양한다고 했다.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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