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제품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사용하다 망가진 물건들이 모여들어 쌓아둔 공간이다. 오랜 세월 사용하다 보니 수명이 다해 망가진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누군가에게 나름 제 몫을 다했을 것이다.
17일 여수 도심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관문동의 승일전자. 이곳은 고장 난 전자제품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곳으로 여수 시민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전자수리점이다.
부산에서 6개월 배운 게 전부, 이후 독학으로 기술 터득
전등도 없는 허름한 가게에서 스탠드 조명 불빛에 의지한 채 한 어르신(81.이승초)이 고장 난 CD기를 수리하고 있다. 50년 세월 이곳에서 흑백TV, 축음기, 라디오, 전축 등을 수리하다 보니 지금은 못 고치는 게 없다고 한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어깨너머로 배웠다. 초창기 부산 전자학원에서 6개월 배운 게 전자 기술 교육의 전부, 이후 독학으로 기술을 터득했다.
요즘은 전자제품을 사용하다 고장 나면 각 제품회사의 서비스센터를 찾아가면 쉽게 해결되지만, 사실 80~90년대만 해도 전자제품을 고치는 전파사는 호황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전파사가 서비스센터에 밀려 하나둘 자취를 감추는가 싶더니 이제는 대부분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이런 악조건에서도 아직 건재한 전파사가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냉기가 도는 가게 안에는 그 시절의 향수가 짙게 스며있다.
“한 50년 정도 됐습니다. 이 부근에 현재는 여기뿐이 없습니다.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여기서 한 50m만 가면 전파사였는데, 대기업의 서비스센터가 들어온 뒤로부터 싹 다 없어졌어요. 50m 사이를 두고 막 줄줄 줄~ 있었단 말입니다. 그때는 전부 다 밥 먹고 살고 해서”
전파사와의 인연은 국민학교 친구(최양수)의 권유에서다. 친구가 “이걸 배워놓으면 전망 있으니 한번 해봐라”라고 권했다.
“대학교 가라고 했는데 안 가고, 친구가 서울 종로 3가에서 이걸 배웠단 말입니다. 신풍 집에서 놀고 있는 내게 ‘친구야 이걸 배워봐라.’해서 시작했습니다. 진공관 전축 조립을 배웠습니다.”
처음 조립한 전축에서 음악 빵빵...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
처음 배울 때 어려움은 말도 못 할 지경이었다. 기초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땐 참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많았죠. 전축의 전자도 모르던 사람이 친구 얘기만 듣고 노트에다 적으면서... 어려움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때가 21살이었는데 전축 하나 조립하는데 대략 20일 이상 걸렸습니다.”
자신이 조립한 전축에서 음악이 빵빵 터져 나오는 순간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당시의 희열이란 말로 형언키 어려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50년 세월을 지탱해온 지구력이 아마도 그때의 일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분이 굉장히 좋았죠. 그때는 시골이고 어디고 전축이 진짜 귀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집에 전축 하나만 있어도 부잣집이었죠.”
오랜 세월 짬짬이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기술 서적도 뒤적였다. 기술 습득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전파사와 관련된 데는 다 찾아다니면서 허드렛일까지 챙기면서 등 너머로 하나하나 기술을 습득했다.
“전자 관련 책을 사다 놓고 보고, 선배들 쫓아다니면서 채널 개조하는 것을 애원하다시피 하면서 배웠습니다.”
이론적으로 학술적으로야 학위가 없어 뒤처지지만, 기술 분야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그는 자부한다.
“학술적으로 얘기를 하면 제가 뒤떨어집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 전자제품이건 ‘이건 어디가 이상하다’ 말하면 음질 딱 듣고 화면을 보고 저는 곧바로 짚어냅니다.”
세상 어떤 제품이든 음향기는 전부 다 고칠 수 있다. 텔레비전도 자신 있다. 요즘도 종종 오래된 전축이나 일본산 소니와 파나소닉과 같은 외제품을 가지고 오는 손님들이 더러 있다.
“음향기기는 자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전자제품은 거의 다 봅니다. 소니나 파나소닉 같은 제품을 이따금 갖고 오는데 그런 거 하나씩 수리하면 국산 수리한 것보다 수입이 배나 낫죠. 여수에서 외제품 고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한 달에 7~8건 정도 수리가 들어 옵니다.”
소일거리로 일... 인생 후반에 노느니 염불한다 생각하면서
실은 전파사 일로 지금은 밥벌이가 힘들다. 월세가 없는 자신의 건물에서 그냥 소일거리로 일을 한다. 인생 후반에 노느니 염불한다 생각하면서. 나이 들어 신체활동이 줄어들면 몸과 마음이 병들지만, 어르신은 일이 있어서 즐겁다. 어쩌면 이 일이 미래를 여는 열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이는 먹고, 이제 노느니 손 운동한다면서 일해요. 누구한테 구애 안 받는 직업이라 가능해요. 이걸 세를 얻어서 사글세 내고 하면 밥도 못 먹어요.”
한때 최고의 기술이라며 잘 나가던 전파사가 이렇게 힘들어진 건 아마도 한 20년쯤 되었다.
“전파사가 시들해진 건 한 20년쯤 되었을 겁니다. 옛날에는 잘 나갔는데 지금은 밥벌이가 안 되니까 다들 이 일을 안 하려고 그래요.”
밥벌이도 안 되는데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옛 속담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지금까지 해온 일 말고는 따로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현실감에서다. 사실 일에서 손을 뗄 연세이기도 하다.
“나이는 먹고, 딴 일은 못 하고... 내가 이 일 해서 집도 사고 자식 전부(3남 1녀) 다 대학교 4년제 보냈어요. 못 먹고 안 입고 해서인지 눈도 백내장이 두 개 다 와버려서 불빛도 이렇게 일렁이고 하니 힘들어요.”
아직도 다른 곳에서 못 고친 전자제품이라며 간간이 고장 수리 의뢰가 들어온다. 그 어려운 걸 해결했을 때의 기쁨과 자부심이 지금껏 어르신을 지탱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못 고친 거 가져왔을 때 해결하면 쾌감을 느끼죠. 자부심도 느끼죠. 누가 못 고치면 가만히 있어도 들어옵니다. 누가 ‘여기 오래돼서 잘 보더라’는 말이 알음알음 전해져서. 이제 그거 하나 자부심으로 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