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잣돈의 사전적 의미는 ‘먼 길을 오가는 데 드는 돈’이란 뜻이다.
이웃과 친척 사이에 정이 메말라 가는 요즈음 세태를 가슴 아파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노잣돈이 그리워진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손님을 빈손으로 보낸 적이 없다. 돈 나올 구멍이 없는 시골에서 돈을 만지려면 5일장에 가서 농산물을 팔아야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추수 후부터 모내기까지가 농한기다. 그래서 결혼식도 주로 겨울에 하고 출입도 겨울에 하는 경우가 많다. 부계를 중심으로 한 씨족사회에서 살다 보면 온 동네가 일가들이다. 작은아버지, 큰아버지, 아지매 아재 할배, 할머니 들이다.
그래서인지 동네를 방문하는 거의 모든 손님이 우리 집 사랑방을 거친다. 마음씨 좋은 아버지는 그들을 무조건 초대하신다. 아니, 그게 아버지 시대의 관례였다.
사돈 팔촌까지 다 초대해 대접하고 노잣돈을 들려 보내는 풍습이 있었지만, 내 아버지는 유별나셨다. 자녀의 학교 사친회비를 안 주더라도 노잣돈은 항상 준비해 놓으셨다.
만약 수중에 돈이 없으면 나를 꼭 부르신다, 돈을 꾸어 오라는 명령이다.
식사대접을 위한 부식과 다과 거리가 없으면 그것도 빌려와야 한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동네를 다니면서 생선 몇 토막, 김 몇 장, 계란 등을 빌리러 다녔다. 빌린 것은 다음 장에서 사다 갚으면 된다. 나는 그때 남을 대접 한다는 기쁨에 신바람 나서 이집 저집에서 빌려왔다.
엄마는 부엌에서 “개코도 없으면서 손님 부른다”고 구시렁구시렁 거렸다.
그때는 엄마가 미웠다. 왜 손님 접대에 저러시나 했는데 지금은 이해가 간다.
주부들은 상차림을 꺼린다. 자신의 음식솜씨가 평가받는 게 싫기 때문이다. 엄마가 싫어하든 말든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명령이 떨어지면 어디서 구하든 상을 번듯하게 차려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난리가 났다.
손님 접대상은 아버지가 먼저 검열하셨다. 아버지 눈에 상차림이 그럴듯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이 날아갔다.
아픈 기억도 있다. 어머니가 하얀 쌀밥이 아닌 보리쌀 섞인 밥에 국도 끓이지 않고 상을 내놓자 아버지가 상을 엎어 버린적이 있었다. 그릇도 깨지고, 음식이 튀어 엄마의 얼굴에 벌겋게 묻어 눈물을 닦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날아가는 까마귀도 먹여서 보낸다’는 전설을 가지신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항상 힘들었다. 하지만 철없는 나는 아버지가 인심 좋은 분이라고 소문이 나 기분 좋았다.
돌이켜 보면,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을 아껴 남한테는 체면과 형식을 갖추려고 하셨던 아버지. 가끔 불평하는 가족들한테 “우리 먹을 것 다 먹고 남 줄 것이 어딨냐?”고 하시던 아버지. 그런 남편 밑에서 물자 귀한 시대에 그 세월을 꾹 참고 사는 것이 미덕인 줄 알고 살아온 어머니와 우리네 어머님들…
청솔가지로 불을 때 연기 자욱한 재래식 부엌에서 일어났던 갈등을 조명해 본다. 그 역경을 다 이겨 내면서도 한 집안 가장의 체면 유지를 묵묵히 담당해 준 3천 불 시대에 살던 우리 어머니들이다.
세상이 변했다. 노잣돈 문화도 변했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모두 살만한 환경이 되고부터는 꼬깃꼬깃한 노잣돈 대신 봉투에 담아 주던 시대에서, 이제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용돈을 이체해 주는 이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 부모님들은 근검과 절약, 희생이 미덕이었다. 몇 푼의 노잣돈으로 훈훈한 정을 나누고 살았던 시대였다. 우리라는 울타리 속에서 함께 성장했었다.
하지만 핵가족도 부족해 1인가구가 다수인 요즈음 꼬깃한 노잣돈이 주는 옛 정서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된 것 같아 아쉽다.
- 장수연 시민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