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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포. 두룩여 74주년 특집] 당신들의 나라

⓵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입력 2024.09.04 07:26
  • 수정 2024.09.04 10:02
  • 기자명 양영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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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①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②제2 노근리 사건이 아니다.
              ③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④아, 안도. 빨갱이 무덤.
              ⑤여수, 대한민국 제물 도시
              ⑥당신들의 나라, 당신의 천국 대한민국

▲ 이야포·두룩여 미군폭격사건 민간인 희생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족 이춘혁 어르신이 안도 이야포해변에서 그날의 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찬현
▲ 이야포·두룩여 미군폭격사건 민간인 희생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족 이춘혁 어르신이 안도 이야포해변에서 그날의 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찬현

노인은 혼자 서 있었다. 생존자 노인이 혼자 매표소 앞에서 서 있었다. 승차권 매표소는 폐쇄되고 발매 창구 앞에는 자동발권기만 서 있었다. 언제부터 유인 매표소가 폐쇄되었는지 모르겠다. 구십이 넘은 생존자 노인은 자동발권기 키오스크를 스스로 조작하여 승차권을 뽑을 수 없었다. 영화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생각나게 만든 장면이었다. 여수 고속버스 터미널 대합실 안 누구도 홀로 서 있는 생존자 노인에게 말을 걸거나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 생존자 노인을 배웅하려고 여수 고속버스 터미널 대합실에 들어갔을 때, 노인은 그렇게 서 있었다. 노인은 여수 부속 섬 안도 남면 이야포. 두룩여 미군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74주년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 참석 후 부산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이번 74주년 추모제는 작년, 재작년에 비해 행사에 참석하는 인원이 줄었다. 학살 사건을 목격한 지역주민들도 연로해져서 참석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고, 젊은 사람들은 관심이 덜 하다. 그런 까닭에 추모제 행사는 작년 행사를 재방송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원된 정치적 수사들도 작년과 다를 바 없는 동의어 반복이었다. 이런 행사를 두고 ‘요식행위’라고 한다.

마지막 생존자 노인은 이미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시대의 바람에 떠밀려 다니는 역사 유령이었다. 그래도 생존자 노인은 학살 사건 증인으로 사람들에게 잠시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다. 증인의 증언은 기록되면 그때부터 증인 존재에 대해서는 관심 대상에 멀어진다. 그래도 나는 관심이 많았다. 노인은 이야포 학살 사건 생존자로서 증언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인은 은폐되어 있거나 드러나지 않는 역사 혈흔을 찾아낼 수 있는 루미놀 시약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산행 승차권을 발권해서 생존자 노인 손에 쥐어 주었다.

“어르신 내년에 또 이야포에서 뵈요.”

“여수시에서 출장 오신 분이요?”

여수시에서는 지금까지 생존자 노인을 위해 출장 나온 적이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은 세월의 슬픔이다. 어젯밤에도 안도 민박 방에서 함께 잠을 잘 때 노인은 나를 앞에 두고 “해마다 서울에서 양 선생이 내려오는데 이번에는 안 왔소?” 하고 물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세월만 탓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심하게 어두워져 앞을 잘 못 보는 탓도 아니었다. 그러다 잠을 자던 생존자 노인이 갑자기 옷을 주섬주섬 걸치기 시작했다. 나는 노인이 부모형제 무덤으로 가는 줄 알았다.

“어르신 이야포에 나가보시려고요?”

“굶어 죽지 않으려면 담치를 캐야 해요.”

담치는 통칭 홍합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여수 안도에서는 홍합을 담치라 불렀던 것 같다. 노인은 안도 이야포에서 학살 사건 때 생명은 건져 산속에 숨었으나 굶어 죽을 판이었다. 그때 담치를 삶아 먹으며 버틸 수 있었다고 여러 번 나에게 여러 번 말했다. 마지막 생존자 노인은 식당에서 식사를 충분히 했으면서도 야심한 밤에 담치를 캐러 나간다는 것이다. 생존자 노인은 전쟁신경증(war neurosis) 앓고 있었다. 셀 쇼크 (Shell shocked)라고도 불리는 전쟁신경증을 노인이 앓기 시작한 것은 74년 전이고 그곳이 바로 여수 부속 섬 안도 이야포이었다, 그날이 한국전쟁 개전 초 1950년 8월 3일이었다.

한국전쟁(1950-53)은 일제 식민지지배에서 벗어난 한반도에서 상호 부정하는 남과 북 정치권력이 그 부정성을 근거로 하나의 통일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내전이었다. 또한 한국전쟁은 패권 국가들인 미국과 중국 간에 벌어진 국제분쟁이기도 했다.

강대국 패권 싸움과 내전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한국전쟁 개전 초 여수 안도 이야포 및 두룩여 해상에서 미군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150여의 피난민과 여수 어부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임당했다. 이런 것을 제노사이드 Genocide라고 부른다. 제노사이드는 전쟁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부수적 피해가 아니다. 적에 동조할 수 있는 잠재적 협력자로 간주하여 자행한 무차별 ‘학살’은 전쟁 중에 부수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불행한 피해가 아니다.

이런 대량 죽임의 과정에서 민간인 생존 사투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한국전쟁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전쟁폭력의 민간화(privatization of violence)는 무장 세력 간의 관습적인 전쟁사의 시각, 즉 탈감각화(desensitization)된 하나의 개념으로 바라보게 되면 한국전쟁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은 한 인간이 자연적 토대 위에서 존재해 왔던 방식을 파괴하는 실존의 문제다. 전쟁고아는 대표적 상징이다. 그러나 전쟁고아로 살아야만 했던 생존자 노인의 존재 파괴는 단순히 전쟁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민간인 대량 학살이라는 전쟁범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추모제에서 불행한 과거사를 위로 하고 정치적 수사나 나열하는 추모제는 요식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요식적이고 형식적인 여순사건 추모행사도 마찬가지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대량 학살이 일어난 엄청난 비극 역사를 대하는 여수시의 역사 인식이 읽혀 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모제를 하면서 말하는 역사는 그 안에 내재 된 의미와 현재와 상호작용을 해석하기 위함이다. 과거와 현재를 단절한 채 추모하는 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단순히 과거 불행한 사건을 나열하고 죽은 언어로 애도 하는 것은 현재를 해석할 인식능력이 없거나, 해석하기 껄끄럽기 때문이다. 탈감각화 된 추모제는 전쟁범죄와 제노사이드를 말소해 줄 뿐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웨워드 카(E.H.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 하여,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을 끄집어내어 현재의 관점에서 그 해답을 찾으라고 말한다. 역사를 말할 때 알파요 오메가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사를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은 역사와 현재를 분절시키는 것이며 역사를 박제화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를 해석하는 기제로써 역사를 대하지 않을 때, 지금의 문제를 역사에서 찾지 않고 과거와 단절된 추모제는 비극적 역사 종말 작업에 불과할 뿐이다.

▲ 박금만 화백의 작품 ‘심장에 새긴 이야포’다. 이 그림은 피해자 유족의 증언을 기초로 했다. ⓒ조찬현
▲ 박금만 화백의 작품 ‘심장에 새긴 이야포’다. 이 그림은 피해자 유족의 증언을 기초로 했다. ⓒ조찬현

우리가 ’남면 이야포. 두룩여 미군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에 참석하여 학살된 민간인들을 애도하는 것, 또‘여순사건 희생자 추모행사’를 하는 까닭은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위로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추모와 애도에는 의무가 부과되는 것이다.

올해 ’남면 이야포. 두룩여 미군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74주년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 추모제 행사도 애도만 있었지 부과된 의무를 실행한 결과는 없었다. 여수시에 부과된 역사 의무는 한치도 실행되지 않았다. 이야포 바다 속에 있는 피난선 보조엔진으로 추정되는 기관도 인양하지 않았다. 전문가 아닌 민간탐사업체가 바다 위에서 초음파로 스캔한 것만으로 피난선과 연관성이 없다고 단정 짓고 더 이상 진척이 없다. 여수시 행정당국은 과거사 주체가 되어 정부나 미국에 그 어떤 진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의회 특위와 더불어 민간 연구 단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존자 노인에게 이렇게 인사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건강하게 오래 사시면 좋은 소식이 있겠지요.”

하지만 마지막 생존자 노인은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인의 모습에서 한국 현대사 비극이 부정되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노인은 나에게 종말되어 가는 학살 사건을 이렇게 말했다.

“양 선생 나는 이제 여수 안 올 것이요. 내 부모 형제 무덤 있는 여수에 정 오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왔다 갈 것이오.”

작년 추모제에도 생존자 노인은 같은 말을 나에게 했다. 그러고도 또 무언가 희망이 남아서 부산에서 홀로 여수까지 왔다. 생존자 노인이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쥐고 놓지 않고 있던 것은 ‘배상’이고 주변 사람들이 이제는 잊어버려야 편해진다고 하는 것은 ‘기억’이다.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노인이 인생 종점에서까지 배상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미국의 사죄와 정부의 책임을 배상으로 증명받고 싶은 것이다. 한국 정부의 명령으로 부산 피난민 수용소 이동했고, 한국 경찰의 피난민 검문검색 명령에 따라 이야포에 정박했다. 그리고 미군기에 학살당했다. 그러니 미국과 한국 정부는 그 책임을 배상으로 분명히 보여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고령의 마지막 생존자 노인이 매년 추모제마다 정부 그리고 여수시에 간청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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