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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포. 두룩여 74주년 특집] 제2 노근리 사건이 아니다

⓶ 이야포. 두룩여 학살은 제2 노근리 사건이 아니다

  • 입력 2024.09.12 07:23
  • 수정 2024.09.12 08:33
  • 기자명 양영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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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①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②제2 노근리 사건이 아니다.
              ③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④아, 안도. 빨갱이 무덤.
              ⑤여수, 대한민국 제물 도시
              ⑥당신들의 나라, 당신의 천국 대한민국

▲피난민 학살 미군전폭기 F-80을 지목하고 있는 이춘혁 마지막 생존자 ⓒ양영제 작가
▲피난민 학살 미군전폭기 F-80을 지목하고 있는 이춘혁 마지막 생존자 ⓒ양영제 작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북한 인민군은 삼팔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던 사람들은 피난길을 떠났다. 1차 피난이라고 한다. 서울시민 모두가 피난길에 나선 것이 아니다. 주로 이승만 초대 정부에 몸담고 있거나 군경가족이 인민군을 피해 부랴부랴 대구 부산을 향해 피난길에 나섰다. 대부분 서울 일반시민은 머뭇거렸다.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한다는 라디오 녹음 방송도 있고 인민군도 같은 동족인데 설마 해코지하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에서 월남한 가족들은 달랐다. 군경가족과 마찬가지로 인민군한테 해코지 대상으로 여겨 부랴부랴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부산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천여 명 피난민 수용되었다. 대부분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었다.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부산을 통해 상륙하면서 병참기지로 운동장이 필요했다. 부산 임시정부는 피난민에게 이동명령을 내리고 부산 여수를 오가는 정기 여객선을 동원하여 통영을 거쳐 욕지도에 수용했다. 전선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욕지도도 위험해지자 정부는 이북 출신 천여 명 피난민들을 대형 화물선 두 척을 동원하여 또다시 떠나게 했다. 피난민을 태운 피난선은 십승지(十乘地. 재난이 일어날 때 피난을 가면 안전한 지역)를 찾아 항해하다 그중 한 척이 여수반도 끝 섬 연도와 안도 사이 해상을 지나가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여수반도 안도와 연도 사이 해상은 경찰이 그은 해상방어선이었다.

안도 이야포 곶부리에서 해상경계를 서던 경찰은 해상방어선을 항해하는 피난선을 검문검색 한다며 이야포에 정박 명령을 내렸다. 그날이 한국전쟁 발발 초기 1950년 8월 2일 오후 해거름 무렵이었다. 그 당시 작전에 방해되는 지역주민 소개 명령은 미군에게 있었고, 명령에 따라 피난을 떠나는 피난민에 대한 검문검색과 불순분자 즉결 처분은 한국 경찰에게 있었다. 이야포에 정박한 피난선은 경찰 검문검색을 기다렸다. 피난선에 승선해 있던 피난민들은 부산 경찰이 발급해 준 피난민증을 전부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다음날 1950년 8월 3일 아침 아홉 시경 이야포에 나타난 것은 검문검색 하겠다던 한국 경찰이 아니었다. 슈팅스타라는 미군전폭기 F-80 4대였다. 곧바로 학살이 일어났다. 미군 전폭기들은 태극기를 매단 피난선에 기관포를 퍼부었다. 피난선에 승선해 있던 350여 피난민 중 150여 명이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노인의 부모와 형제 4명이 포함되었다. 며칠 후 8월9일 인근 해상 두룩여에서 또 미군기들이 조기잡이 어선들을 무차별 공격하여 어부 여러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을 사람들은 ‘제2 노근리 학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군기에 의한 이야포, 두룩여 학살 사건은 노근리와 마찬가지로 미군에 의한 피난민 학살이라는 면에서는 동일 성격이나, 폭격 요청 주체를 특정할 수 없어 섣불리 제2 노근리 사건이라고 부를 수 없다. 노근리 피난민 폭격 요청한 주체는 미1 기병사단이다. 그런데 이야포 두룩여 피난선과 조기잡이 어선 미군 폭격기 폭격 요청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두룩여 조기잡이 어선 학살은 함재기에서 발진한 전투기 두 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야포 피난선 학살은 일본 오끼나와 미5 공군 기지에서 발진한 F-80 슈팅스타기 편대 4대다. 슈팅스타 전폭기 편대는 스스로 한반도 상공을 돌아다니면서 목표물을 설정하고 폭격하는 전폭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전폭기 편대가 정찰 중 이야포에 정박해 있는 피난선을 적으로 오인하여 오폭을 가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 왜냐면 미군 전폭기 F-80 슈팅스타는 편대는 지상군이나 정찰기로부터 폭격 요청이 있어야만 기지에서 발진하여 임무를 수행한다. 오끼나와 기지에서 기름을 최대한 채우고 발진한다 해도 한반도 상공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20 여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시 정찰기가 돌아다니다 피난선을 발견하고 오끼나와 미공군 기지에 좌표를 불러주지 않았을까 의심도 해봤다. 그건 아니었다. 내가 몇 년을 걸쳐 금오도 안도 연도를 돌아다니면서 당시 거주민들을 찾아 미군 정찰기 목격 여부를 물어봤으나 정찰기를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2023년 안도 마을회관 사무실에서 여수시 의회가 주최한 안도 주민들과의 대담에서도 공개적으로 물어봤다. 당시 안도에서 살고 있었던 주민들이 참석했으나 전폭기들이 나타나기 전에 정찰기를 본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피난선은 8월 2일 해거름 무렵 이야포에 정박했고 다음 날 아침 아홉 시에 폭격을 맞았다. 정찰기가 돌아다니면서 피난선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대도 아니었다.

그럼 어느 누가 오끼나와 미공군 기지에 좌표를 불러주고 피난선을 특정하여 폭격 요청을 했을까? 안도와 연도에는 미군이 없었다. 나주와 영암에서 후퇴해 온 한국 경찰만 있었다.

▲연도에 한국 경찰이 주둔해 있었다는 故 이춘송 생존자 육필 증언 ⓒ양영제 작가
▲연도에 한국 경찰이 주둔해 있었다는 故 이춘송 생존자 육필 증언 ⓒ양영제 작가

이야포 학살은 여전히 많은 의문점이 풀리지 않고 있다. 도대체 미군 전폭기는 이야포에 피난선이 정박해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정확히 날아와서 기관포를 퍼부었을까? 이 의문을 풀지 않고서는 이야포 학살 사건의 실체를 다 알아냈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관련된 여러 의문이 꼬리를 문다.

-왜 경찰은 피난선을 검문 검색한다고 정박 시켜놓고 나타나지 않았을까?

-무엇 때문에 경찰은 미군기 학살이 일어나고도 6일 동안 이야포에 나타나지 않았을까?

-학살 이후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다는 소문은 누가 무엇 때문에 퍼트렸을까.

-왜 경찰은 살아남은 피난민들을 안도에서 연도로 분리 이동시켰을까.

-연도로 이동시킨 피난민들을 다시 욕지도 수용소로 보낼 때 동원된 군함은 누가 오게 했을까.

의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두룩여 조기잡이 어선 학살이 일어난 날 8월9일이 되어서야 경찰은 통통배를 타고 이야포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야포 수면에 떠오르는 시신들을 건져 피난선에 올리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그날 밤, 살아남은 피난민 200여 명을 동원된 어선 4척에 실려 연도 역포마을로 이동시켰다. 전시 중에 어선 4척을 동원하여 한꺼번에 200여 생존 피난민들을 이동시킬 수 있는 조직적 힘은 경찰밖에 없었다.

연도는 여수반도 끝 섬으로 더 이상 후퇴 할 수 있는 섬이 없다. 연도 역포마을은 이야포가 빤히 보이는 곳이다. 당시 작전지도를 보면 안도와 연도 사이 해상이 경찰방어선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만약 피난민으로 위장한 적이 연도에 경찰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면 경찰은 고립무원으로 큰 피해를 당하는 것은 뻔한 이치다. 그렇게 긴장감이 팽배해 있던 곳이 안도와 연도였다. 그래서 미군이 방어선을 치고 남하하는 피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노근리 사건과는 결이 다른 것이다.

1950년7월 26일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일어난 학살은 미군 방어선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은 민간인이든 누구든 가릴 것 없이 사살하라는 명령에 의한 것이다. 민간인으로 위장한 인민군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작전 명령은 “다 죽여라‘ 이었다. 8월3일 이야포 학살 작전 명령은 누가 요청한 것일까. 전폭기 편대가 정찰비행 중에 피난선을 발견하고 적으로 오인폭격 했을 것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사람을 추상적 적으로 객체화시키면 그때부터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죄의식이 없어진다. 한낱 동물 따위로 보이는 것이다. 이를 잘 표현한 소설이 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 (George Orwell) 동물농장을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자 200만 명이 넘었다. 그 중에 적에 동조할 수 있는 잠재적 협력자로 간주하여 자행한 무차별 ‘학살’로 인한 죽음은 전쟁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부수적 피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군기에 의한 이야포 두룩여 학살 역시 부수적 피해가 아닌 전쟁범죄이며 대량 학살인 제노사이드다.

이런 대량 학살 과정에서 민간인 생존 사투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한국전쟁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전쟁폭력의 민간화(privatization of violence)는 무장 세력 간의 관습적인 전쟁사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전쟁이라는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퓰리처상 수상자 어니스트 베커 Emest Becker는 대량 학살에 있어 사건이 반복되면서 가해자들의 폭력이 나선형으로 증폭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 간 전쟁에서 피난민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매일 확인하고 있다.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감이 해소되지 않은 한반도에서 정권 안정 목적으로 군사긴장을 높여 한미일 군사동맹을 읊조릴 때, 우리는 역사를 떠올려야 한다. 강대국 각축장이 되는 한반도와 노근리, 이야포 학살을 떠올려야 한다. 동맹이든 우방이든 그리고 적이든 그들에게 우리는 객체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것이 추모제를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고 참석한 여수시 행정당국이나 정치인에게 듣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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