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고흥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곳, 고흥분청문화박물관을 두번 째 방문했다. 이곳은 고흥 역사와 문화를 기록·보존하고, 분청사기 등 도자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2017년 10월 31일 개관했다. 상설 전시관으로 역사문화실과 분청사기실, 설화문학실이 있고, 기획전시실과 특별전시실 등이 있다.
상설전시관 입구에는 '높게 흥하는 고장. 고흥 高興'이라는 타이틀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높게 흥한다!' 말만 들어도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한 발 들어서니 '고흥으로 가는 길, 고흥 10경' 사진이 입체적으로 화려하게 펼쳐져 사진만 보고도 가슴 설렌다.
1경. '팔영산 자연휴양림과 편백 치유의 숲', (중략) 10경. 싸목싸목 걸어가자 어머니 품 같은 운암산으로 '분청문화박물관과 운암산 녹음길'이다.
분청사기, 운대리에서 '덤벙'으로 꽃 피우다
500여 년 전 운대리 도공들은 1,200℃ 이상의 열기 속에서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예술 혼을 불태웠을 것이다. 그들의 땀과 혼이 스며든 작은 조각들을 분청사기실에서 만날 수 있다.
고흥 운대리 일원은 고려시대 청자 5기, 조선시대 분청사기 27기 등 32기의 가마터 밀집 분포 지역으로 우리나라 분청사기 최대 생산지였다. 이곳은 풍부한 땔감, 양질의 태토(胎土), 바탕흙인 태토를 정선하는 물, 가마터를 설치하기 좋은 적당한 구릉 등 가마터의 필수 조건인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백토를 사용한 다양한 장식의 분청사기를 제작했다. 특히 덤벙 분청사기의 대표적인 제작지다. 이곳에서 꽃핀 덤벙 분청사기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은 백토 분장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분청사기의 짧은 역사
고려청자, 조선백자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도자기인 분청사기는 14세기 후반 고려 말부터 16세기 초기까지 150연간 제작했다. 고려 말 왜구 침략이 극심해져 남해안 청자 가마들에 대한 약탈, 방화 등으로 수많은 도공들이 죽어나갔다. 해안 20㎞ 안에는 사람이 살수 없게 됐다.
공납(貢納)용 자기를 제작하던 강진·부안의 대규모 고려청자 가마는 폐쇄되고 도공들은 내륙으로 흩어져서 체계적인 청자 제작 방법을 전승할 수 없게 됐다. 그 후 전국에 수많은 가마가 생겨나고 질 낮은 고려청자가 제작됐다.
고려 말 분청사기 초기에는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을 이어 받은 상감과 인화기법으로 제작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문화와 불교 영향으로 영롱한 비취빛의 화려한 고려청자를 생산했지만, 조선 초에는 검소하고 소박한 선비정신 영향으로 화려한 그릇보다 수수하고 실용적인 분청사기를 선호했다. 분청사기가 왕실과 관청의 공납(貢納)자기로 결정되면서 전국적으로 요업이 활성화 됐다.
15세기 중반 경기도 광주에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할 백자를 생산하기 위해 관요(官窯)를 지정함에 따라 분청사기는 민간의 그릇으로 바뀌게 됐다. 새로운 수요자의 취향을 반영하여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분청사기들이 제작됐다. 16세기 이후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던 백자를 민간까지 사용하게 되면서 분청사기는 점차 자신만의 특색을 잃고 백자화 되다가 쇠퇴했다.
분청사기는 철분이 함유된 점토로 형태를 만들어 초벌구이 한 후 표면에 백토를 바르고 문양을 장식하여 장석계의 유약을 입혀 다시 고온에서 구워낸다. 운대리 분청사기는 철분 2~5%를 함유한 퇴적 점토를 사용하고, 분장토는 철분 1% 미만의 고령토를 사용하여 제조했다. 높은 온도인 1,200℃ 이상까지 나무를 연소시키는 재벌구이의 과정을 거쳐 만들었다.
그릇 표면에 백토를 입혀 분장한 후 7가지 장식 기법으로 문양을 표현한 것은 분청사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분청사기 7가지 장식 기법〉
△상감 象嵌 도자기 표면에 음각을 한 후 그 안에 백토를 넣어 장식하는 기법
△인화 印花 도자기 표면에 반복적으로 문양을 도장으로 찍고 그 홈에 백토를 넣어 장식하는 기법
△박지 剝地 장식한 소재의 배경 면에 남아 있는 백토를 긁어내어 장식하는 기법
△조화 彫花 백토를 얇게 발라 분장한 후 뾰족한 도구로 표면에 그림이나 선을 그려 장식하는 기법
△철화 鐵畵 백토를 얇게 발라 분장한 후 철분 안료를 이용하여 붓으로 무늬를 장식하는 기법
△귀얄 돼지털이나 말총으로 만든 붓인 귀얄(풀비)에 백토를 발라 도자기의 표면에 얇게 칠해 장식하는 기법
△덤벙(담금) 도자기를 백토 물에 담가서 장식하는 기법으로 '덤벙 소리가 난다'고 해서 덤벙 기법이다.
'고흥 운대리 1,2호 가마터' 국가사적 제519호 지정
운대리 가마터는 1980년 미술사학자 '소불(笑佛) 정양모 선생'과 '일본인 코우모토 후쿠지'가 운대리 저수지 주변에서 15개소 가마터를 최초 확인했다. 1984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됐다.
1989년부터 국립광주박물관, (재)전남문화재연구원,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 등에서 정밀 지표조사와 발굴 조사하여 학술적·역사적 가치의 중요성이 널리 인정되어 '고흥 운대리 1,2호 가마터'를 2011년 12월23일 국가사적 제519호로 지정됐다.
출토유물은 대접, 접시, 잔, 병, 편병, 항아리, 단지, 벼루, 고족배(굽다리접시), 제기 등으로 대접과 접시가 주류인 것으로 보아 일상생활용 그릇을 주로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사기 7가지 장식기법이 모두 확인되어, 분청사기 출현에서부터 쇠퇴에 이르는 제작 과정과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 7호와 14호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덤벙 분청사기는 운대리 분청사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그릇이다. 덤벙은 분청사기 후기 기법으로 그릇의 일부나 전체를 백토 물에 담갔다가 꺼내는 것을 말한다.
전시실에는 '운대리 가마터 발굴과정 등'을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분청사기의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상시 틀어주고 있다. 과학적인 제작방법과 역사적·학술적 가치 등을 서술한 자료를 액자로 만들어 유물들과 함께 전시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운대리 14호 가마터를 1/2 로 축소하여 재현했으며, 분청사기 제작과정을 모형으로 전시하여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관람객을 배려했다.
분청사기 작품 전시 공간에 붙인 미술사학자 해곡 최순우(1916~1984)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말이다.
"이 가락진 멋과 싱싱한 아름다움을 네가 알아본다면 좋고 모른다면 그만이지."
〈상감 연꽃 버드나무 무늬 병〉은, 조선 15세기 작품으로 그릇을 제작 후 도장, 조각칼을 이용하여 홈을 파고 분장토를 바른 후 긁어 낸 흑백 상감의 연꽃이 물 위에서 활짝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덤벙 무늬 대접〉은, 조선 15세기 작품으로 그릇을 성형 후 백토 물에 담가 백토물이 흘러내리는 그 자체가 문양이 되어 자연스럽다. 500년 전에 제작 됐지만 현대적 미감을 보여준다.
전통을 잇고, 현대를 빚은 분청사기
2층 전시 공간에 분청사기의 전통기법을 살리고, 현대적 감각으로 빚은 창의적인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고흥분청사기 전국공모전' 수상 작품 중에서 선정한 작품들과 '입주작가' 작품들이다.
〈분청사기 귀얄파도문 대편병〉은 제3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설화 작가' 작품이다. 귀얄(풀비)의 굵기·방향·속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굽이치는 파도의 모습과 불규칙한 거품들로 역동적인 느낌을 표현했다. 형태는 동그란 몸체 가운데를 가볍게 두들겨 불분명한 편병을 만들어 약간 둥근 조형미와 역동적이고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맨눈으로도 굽이치는 파도와 거품의 질감이 뚜렷하게 만져진다.
〈비상〉은 이곳에서 개최한 '국제도자창작워크숍'에 참여한 '안성만 작가' 작품이다. 우주의 관문인 고흥의 기상을 닮은 나로호를 석고 태스팅 3D 프린팅을 이용하여 독특한 각을 가진 작품으로 표현했다. 고흥의 미래를 찾아 우주로 날아오르는 나로호를 통해 확장된 고흥분청사기 도자예술의 미래를 보여준다. 문화해설사는 작가의 말을 이렇게 전해 줬다.
"작가는 냉면 집에서 냉면을 길게 뽑아내는 냉면 뽑는 기계를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박물관에서는 분청사기 등 도자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학술대회와 워크숍'을 개최하고 매년 '입주 작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현재 입주 작가 3명이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다. 2018년부터 매년 '고흥분청사기 전국공모전'을 열어 수상작을 발표하고, 수상 작품을 전시하여 젊은 도예가들 창작 의욕을 북돋워 주고 있다.
500년 전 도공들의 불꽃 같은 열정과 숭고한 예술 혼에 가슴 뭉클한 감동의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분청사기 전통을 잇고, 현재를 창조하는 아름다운 도자예술이 지속적으로 찬란하게 빛나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