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이라면 충무공 이순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최초 삼도수군통제영 여수와 이순신 관계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난 3월 초 '오문수 작가와 함께 하는 역사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하여 지인들과 '선소'에 갔다. 이 프로그램은 고흥군 문화해설사 6명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작가의 재능기부로 진행했다.
풍전등화 같았던 임진왜란에서 왜군과 싸워 나라와 백성을 지켜 낸 그를 찾아 나선 일정은 다음과 같다. 선소에서 시작해서 오충사와 이순신자당기거지-여수고소대-진남관-묘도봉화산봉수대-흥국사에서 마쳤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철갑선, 거북선을 탄생시킨 선소
작가는 자신이 쓴 기사 22년 3월 22일자 오마이뉴스 '이순신의 발포만호 경험이 '신의 한 수'였던 이유' 자료를 나눠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순신의 발포만호 근무에 이은 전라좌수사 근무는 '조선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이었을 것이다. 육군만 경험했던 그가 수군 전투지휘관이 되어 바다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소는 사적 제392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조선소로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던 장소다. 장군은 선박건조기술자 나대용 군관에게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도록 했다. 거북선 건조에는 많은 의승수군들이 투입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수시 지도를 보면 날개를 활짝 편 나비 모양을 닮았다. 선소는 나비 양 날개 아래 홀쭉하게 들어간 가운데 하단 부분에 위치해 있다. 선소는 먼 바다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망마산 산자락 아래 가막만(灣) 끝 깊숙이 휘어진 곳에 숨어 있다. 뒤쪽에서 장도와 가덕도, 2개의 섬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군사요충지로서 최적의 장소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하느라 소란스러웠을 선소는 지금은 고요하기만 하다. 호수처럼 잔잔한 선소 앞 바다에는 청동 오리들이 떼 지어 한가로이 노닐고 있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평화롭다.
현재는 거북선을 만들고, 선박을 대피 시켰던 '굴강', 수군 지휘소였던 '세검정', 무기를 정비하던 '무기고' 등이 복원되어 있다. 여수에서는 돌로 만든 장승을 '벅수'라고 한다. 마을의 수호신이자 군사요충지를 지켰던 호국벅수가 지금도 선소입구와 옛 선소마을 터였던 선소 체육 공원입구를 지키고 있다.
전쟁 중에도 지극한 효심과 나라를 지킨 장수들
오충사와 이순신자당기거지는 전라남도 문화제 제295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오충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구국을 위하여 공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과 창원정씨 충신 네 분, 즉 다섯 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창원정씨 네분은 '충절공 정철, 충의공 정춘, 충숙공 정린, 충정공 정대수'다.
오충사는 앞면 3칸 팔작지붕이며 신당, 강당, 재실등의 부속 건물이 있다. 신당의 중앙에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고 양쪽에 장수 두 분씩 모셨다. 이곳에는 영정 사진을 동판으로 제작하여 모신 것이 특이 했다.
이순신자당기거지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목화솜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하얀 목화솜에는 미래를 꿈꾸는 까만 씨앗들이 몇 알씩 들어 있을 것이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변씨 부인이 임진왜란 때 5년 동안 살던 곳이다. 효성이 지극했던 장군은 충청도 아산의 어머니와 가족들을 웅천동 송현마을에 있는 부하장수 정대수 집에 모셨다. 전쟁 중에도 지극 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신 효심에 가슴 뭉클해진다.
여수 고소대 2개의 보물
여수 통제이공수군대첩비(麗水 統制李公水軍大捷碑)는 보물 제571호로 지정됐다. 이 비(碑)는 충무공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최대 규모의 대첩비로 1615년(광해군 7년)에 세웠다. 일제강점기 1942년 전남 해남에 있던 명랑대첩비(보물 제503호)와 서울로 옮겨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광복 후 경복궁 근정전 앞 땅속에서 찾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일제 강점기 악마 같은 일본의 만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碑)는 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 돌 위에 거북받침돌을 두고, 비석 몸체를 세운 후 구름과 용, 연꽃 등이 조각된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글은 백사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다.
수군대첩비 왼쪽에는 1698년(숙종 24년) 남구만이 지은 <동령소갈>이 있다. 이순신의 부하였던 제5대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 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대첩비를 세운 경위와 타루비 이전 등 비 건립 전후의 기록이 남겨 있다.
여수 타루비(麗水 嶞淚碑)는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됐다. 이것은 이순신이 돌아가신 6년 뒤인 1603년(선조 36년) 충무공의 덕을 기리기 위해 충무공의 부하들이 세운 눈물의 비석이다.
이순신의 혼이 살아 있는 곳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 ) 국보 제304호
작가의 해설 내용이다.
"1593년(선조 26년) 8월 30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3도의 수군을 이끌도록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다. 전라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여수는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이 됐다.
충무공 이순신이 제1대와 제3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고, 제2대는 원균이다. 1601년(선조 34년) 3월에 제4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통제영을 변경할 것을 제언했다. 전라·충정·경상도 3도를 관할하는 통제영이 지리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이유에서다. <난중일기> 1593년(선조26년) 7월27일자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후 경상우수사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현재의 통영이 삼도수군통제영으로 바뀌게 됐다."
국보 제304호 여수 진남관은 최초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으로 사용했던 장소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 수군의 중심 기지인 호국 성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다.
1599년(선조 32년) 충무공 이순신 후임인 제4대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진남관을 지었다. '진남'은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현재의 건물은 1716년(숙종 42년)에 불탄 것을 1718년 (숙종44년)에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충무공 이순신이 돌아가신지 120년 되는 해를 기려서 다시 세운 것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여수 공립보통학교 등으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이곳은 충무공 이순신의 고뇌와 열정, 뛰어난 리더십이 곳곳에 서려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건물규모는 정면 15칸, 측면 5칸, 총 75칸이며, 건물면적은 240평으로 단층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지방관아 건물로는 최대 규모이다.
붉은 단청을 한 70개 민흘림 원형나무기둥으로 구성되어 내부 공간이 확 트여 보이는 거대한 목조건물에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난다. 7년 전에 보고 온 '돌기둥으로 지어진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이 연상된다.
진남관 뜰 안에는 머리에 두건을 쓴 사람 모양의 '석인상'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제 제33호다. 임진왜란 때 왜구의 공격이 심해지자 이를 막기 위해 7개의 석인상을 만들어 보초서는 군졸로 위장했다고 한다. 현재는 1개만 남아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철쇄방비시설'이 새로웠다. 이 시설은 철로 제작한 쇠사슬을 이용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설치한 군사시설물이다.
이것은 침입해 오는 적선(敵船)의 선저(船底)를 걸어서 저지하거나 침몰시키는 기능이 있다. 임진왜란 직전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들이 종포(현재 종화동)에서 돌산 우두리 사이에 설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남관 '석인상'과 종포 '철쇄방비시설' 등은 이순신의 기발한 발상이다. 이는 목포 유달산 '노적봉에 볏단을 쌓아 올려' 군량미로 위장하고, 명랑대첩에서 '강강수월래'로 부족한 병력을 위장했던 경우와 유사 사례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이순신의 빛나는 전술 중의 하나다.
최후의 격전지 묘도에서 학익진(鶴翼陣)으로 재탄생하다
작가 해설 내용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동아시아 최대의 전투이자 최후의 승전지, '노량해전' 전투를 준비했던 곳이 여수 묘도다. 명나라 진린 도독을 설득하여 조·명연합군 합동전선을 폈다. 묘도 봉화산 봉수대를 중심으로 여수 산단 쪽은 조선 수군이, 광양만 쪽은 명나라 수군이 맡았다. 이순신은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고 호령하며 전투를 지휘했다."
지금도 충무공 이순신의 '쩌렁 쩌렁'한 호령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묘도를 중심으로 2번의 전투가 있었다. 왜교성전투와 노량해전이다. 왜교성전투는 정유재란 시기였던 1598년 9월 20일부터 11월 19일 노량해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조·명연합수륙군과 왜군이 순천 왜교성과 여수 장도· 묘도 일원에서 싸운 전투이다.
노량해전은 11월19일 조·명연합수군과 왜군이 노량해협 및 현 광양만과 여수반도 동쪽 바다 일원에서 싸운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왜선 500척 중 200여척이 분파되고 150여척이 파손됐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량해전은 세계사에 빛나는 이순신 통제사 최후의 전투가 되고 말았다. 이순신은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적하던 중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진勿言我死)"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 묘도에 2013년 2월 이순신 대교를 개통했다. 이 다리는 '학익진' 모형의 현수교로 길이는 1545 m다. 현수교 길이는 주탑과 주탑 사이 구간을 말한다. 현수교 길이 1545 m는 충무공 탄생년도를 기념하고, 학익진 모형은 한산대첩에서 대승한 전법을 상징적으로 형상화 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최후 승전지 묘도에서 학익진으로 날개를 활짝 펴며 묘도 앞 바다를 이어주는 이순신 대교로 재탄생한 것이다.
영취산 흥국사는 호국 불교 성지다
영취산 흥국사가 무슨 인연 있어서 충무공 이순신 유적지에 포함될까?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승려의 몸으로 의승이 되어 왜군과 맞서 싸웠던 의승수군 주둔지로 호국불교 성지다.
화엄사에서 의승을 모아서 말사인 흥국사로 보내면, 자운, 옥형 등 승병장이 의승수군 300~800여 명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켰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의승수군 300여 명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 절에서는 임진왜란때 죽은 영혼들을 위해 330년 넘게 수륙천도제를 지냈다.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에는 수륙천도제 관련 유물로 의승수군들 명단이 들어 있는 괘불탱화와 수륙재문 등이 있다. 편액 '공복루' 등 800여 점 문화재도 보관중이다. 이순신 장군 친필로 전해지는 편액이다. '편액'은 건물의 명칭을 쓴 것으로 건물 정중앙 처마아래 달아주는 것이다.
요즘 같은 총체적 난국에 충무공 이순신 같은 지도자가 절실하다
삼도수군통제영 여수 곳곳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고뇌와 흔적을 엿볼 수 있는 하루였다. 시간 관계상 들러보지 못한 곳들이 있어 아쉽다. 지금 여수에서는 다양한 상품들이 이순신 브랜드로 되살아나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지금도 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은 군사와 군량미다. 모든 것이 부족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오로지 왜군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조선을 지켜냈다.
그런데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에서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초법적 사건이 터졌다. 국민들은 탄핵 찬성과 반대로 갈라져서 대립하고 고환율속에 물가는 계속 올라 서민경제가 위태로운 풍전등화와 같은 형국이다. 이런 총체적 난국에 선조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오직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충무공 이순신 같은 지도자가 절실하다.
